초월/경전

12.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2)

開理無語 2014. 8. 13. 20:26

12.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2)


지난번 시간에 무아에 대해서 공부했다. 오늘 무아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하고 본문으로 들어가겠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에 그것은 그것일 수 밖에 없는 어떤 실체가 있다라는 전제 위에 살아가고 있다. 


여기 컵 뚜껑이 있다. 이것은 큰가 작은가? 어떤 사람은 작다 하고 어떤 사람은 크다 한다. 작다고 말한 사람은 솥뚜껑하고 비교를 하던지 장독대 뚜껑하고 비교하던지 뭔가와 비교를 해서 작다는 말이 생긴 거다. 또 크다 하는 사람도 이것보다 작은 어떤 것을 상정해서 이것을 크다 하고 말한다. 이것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무거운가 가벼운가 하면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새 건가 헌 건가? 새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늘 크다 작다 무겁다 가볍다 새 거다 헌 거다. 이렇게 사용한다. 그러면 “무겁다 가볍다 그것도 구분 못하나? 이건 무겁고 그건 가볍잖아. 그런데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라니 그럼 이게 같다는 얘기야?” 이렇게 반론을 제기 한다. 그런 뜻이 아니다. 


만약에 이걸 저울에 달아서 50그램이 나왔다면 그 50그램을 가지고는 무겁다고 할 수도 없고 가볍다고 할 수도 없다. 10그램에 비해서는 무겁고 100그램에 비해서는 가벼운 거다. 우리는 늙었다 젊었다는 말을 많이 쓴다. “이분은 늙고 저분은 젊고 그거 누가 몰라 금방 알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여고생들 2학년 3학년짜리 노는데 가서 가만히 들어 보면 3학년짜리가 “우리 늙은 거는 쉴 테니까 너희 젊은 것들이 해라.” 이렇게 말한다. 그 사이에도 늙고 젊은 게 있다. 우리 절에 보살님들도 70세가 있고 80세도 있는데 80세 되신 분들 모시고 여행을 가면 70세 되신 분들 어쩌다 끼어오면 젊은 것에 속한다. 여기에 참가할 자격도 없는 젊은 것들 안 그러면 젊은 것들이 가서 반찬도 차리고 일을 해야 된다. 이 늙었다 젊었다 하는 것도 상대적이다. 각 학교에서 1등만 하는 아이들 모아가지고 학교를 하나 만들면 그기에도 꼴지 하는 아이가 나온다. 전국에서 꼴지 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으면 그기도 1등이 나온다. 학교 선생님들만 모아놓고 강의를 하면 조는 사람이 있고 대학 총장님만 모아놓아도 조는 사람이 나오고 그렇다. 


우리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어떤 요소는 없다. 옷을 입는 게 좋으냐 벗는 게 좋으냐 이거 정할 수가 없다. 목욕탕에서는 옷을 벗어야 한다. 목욕탕 밖에서는 옷을 입어야 된다. 그러니까 누워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앉아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잠도 마찬가지다 자야 할 시간에 깨어있는 것은 잘못된 거도 깨어있어야 할 시간에 자는 것은 잘못된 거다. 자는 것 깨는 것 이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인연을 따라서 나툰다. 그러기 때문에 산이 하나 있다면 이 동네에서는 그것을 동산이라 부를 수가 있다. 저쪽 동네에서는 서산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이 사람들은 작은 산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왜? 그 옆에 더 큰 산이 붙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큰 산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왜? 그 옆에 더 작은 산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서 我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이런 얘기다. 얼핏 보면 그런 요소 실체가 있는 것 같은 데 자세히 보면 없다는 말이다.


회사 다니는 어떤 분이 갑자기 죽었다. 그 집에는 부인과 어린 아이 둘이 있는데 갑자기 가장이 죽으니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그 부인이 작은 bar를 하나 열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동료로서 도와주는 것은 나도 살기 어려워서 도와주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또 도와 준다면 자존심 상해하기 때문에, 그래서 절친한 친구니까, 그래서 퇴근 할 때마다 그 집에 가서 한잔하고 오는 것으로 도와 준다. 그럼 그 가게에서는 단골이 된다. 그러면 그 여자분. 친구의 부인 입장에서는 고마운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고마운 사람이다. 참 의리 있는 사람이고 남편이 죽었는데도 잊지 않고 늘 이렇게 보살펴 주신다. 큰 돈 아니라도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주건 거 고맙잖아. 그런데 이 사실을 집에 있는 부인이 알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에 온갖 자기 상상력을 동원해서 험담을 한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해 주는 데는 흑심이 있지 않는가? 라던지 그 사람 그렇게 도와주느니 나나 도와주지 라던지. 그 사람이 당신 부인이요? 그 사람이 당신 동생이요? 뭐 온갖 이유를 댈 거 아닌가? 그러니까 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한 사람이 이쪽에서는 좋은 사람 저쪽에서 보면 나쁜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사람이 볼 때는 애국자다. 길이길이 우리가 존경해야 할 애국자다. 근데 일본사람이 볼 때는 테러리스트다. 이 간격은 좁힐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애국자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게 실상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애국자라 부르고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오늘날 전세계가 다 마찬가지다. 달라이라마와 같이 세상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중국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는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남편 또는 시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장모 그렇지 않으면 형제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 아무개를 미워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기에 미워할 아무런 실체가 없다. 이게 무아이며 공이다. 이런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깨끗하고 더러움은 다 우리 마음이 짓는 바다. 존재 자체에 그런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허상에 사로잡혀서 얼마나 많이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한을 품고 원수를 갚고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제법이 공한 이치에서 볼 때는 원수라고 할 것이 본래 없다. 그건 다 자기 마음이 짓는 거다. 그래서 천수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고 하는 것에 이것이 죄다 할 스스로의 성품, 자성이 없다. 이것은 다 어리석은 마음 따라 일어난 거다. 그러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져버리면 죄라고 하는 것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삼조 승찬(僧璨) 대사께서 이조 혜가(慧可) 대사를 찾아가서 (이 승찬 대사가 문둥병 환자였다. 옛날에는 문중병이 천벌을 받은 죄라 그랬다.) “이 죄를 사해 주십시오.” 그랬을 때 혜가 대사께서 “그 죄를 이리 내 놓으시오.” 죄를 이리 내 놓으라고 했다. 내가 사해줄 테니. 이럴 때 죄를 찾기 위해서 책을 보거나 밖을 찾을 수가 없다. 


자기 속을 들여다 봐야 된다. 자기를 들여다 봐야 된다. 눈이 밖으로 향한 것을 안으로 봐야 된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내놔야 된다. 그때 비추어 봤다. 照見. 확 비추어 봤다. 확 비추어 보니까 텅 비었다. 내 놓을 게 없다. “죄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승께서 “내 이미 네 죄를 다 사했노라.” 이게 바로 罪無自性從心起 다. 이것이 바로 법성계에 나오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이다. 스스로의 성품을 가진 게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연기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다. 실체가 있는 단독자들의 모임인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면 홉스(Thomas Hobbes)가 얘기한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된다.


천수경-진정한 참회란?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이진참회

죄는 본래 자성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 만일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와 망심 모두 놓으면 마음 또한 공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진실한 참회라 하네.


승찬대사의 입탈-고승전

3조 승찬대사는 2조 혜가(慧可)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불치병이 들어 고통하고 있다가 2조 혜가대사가 인도의 달마대사로부터 팔을 끊어 바치고 도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2조가 물었다. 

「어디서 무엇하러 왔는고?」

「숙세의 죄업으로 불치병(不治病)에 걸려있습니다. 법으로써 이 목숨을 구해주시옵소서.」

「그래, 그렇다면 그 죄업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의 죄업을 손멸시켜 주리라.」

3조가 이 말을 듣고 죄를 찾기 위해 온몸을 뒤져 보았으나 마침내 찾을 수 없었다.

「죄를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그대의 죄를 다 없애 주었노라.」

생각해 보니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죄업을 가지고 여지껏 짊어지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승찬대사는 그 말 아래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법을 깨달고 해탈하였다. 그런데 때가 마침 혼란기라 법을 얻기는 하였어도 초조, 2조처럼 평안히 앉아 법을 전할 수는 없었다. 동서 양위(兩魏)와 후주(後周)•북제(北齋)•수(隋)•진(陳)등 밤하늘의 별빛처럼 빛나는 군웅이 할거하여변천무상 흥망성쇠를 보이니 전운(戰雲)의 폭도적인 불교탄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절을 보기만 하면 불을 지르고 스님을 만나기만 하면 잡아 죽였다. 그리하여 뜻있는 수도인들은 모조리 깊은 산 험한 골짜기에 들어가 풀뿌리 나무과일로 주린 창자를 위로하며 세상 밖에 나타나지 아니했다.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법난을 피하여 대호현에 있는 사공산으로 갔다가 다시 여러 산 깊은 곳을 유람하다가 그 후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세상이 안정되자 개황(開皇)12년. 4조 도신(道信)을 만나 법을 전하였다. 


화종수인지 (華種雖因地)

종지종화생 (種地種華生)

약유인하종(若有人下種)

화지진무생 (華池盡無生)

꽃과 열매가 비록 땅을 의지해 있으나

땅은 종자를 인해서 꽃과 열매를 맺나니

만일 사람이 종자를 심지 아니하면

꽃과 땅이 모두 종자를 내지 못하게 되느니라.


3조 승찬대사는 이렇게 법을 전하고 북으로 깊이 업도(業烈)에 들어가 30년 동안 전법하였다. 만년에는 서주로 돌아가 민중을 멀리하고 홀로 정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도속(道俗)들이 몰려오자 다시 감로법우(甘證法雨)를 밤낮없이 쏟아 주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법회 중에 뜰 앞에 있는 큰 나무 아래로 내려가셨다. 대중들이 묵묵히 따라가니 고요히 서서 사방의 풍경을 두루 바라본 후 두 손을 모아 가지런히 합장하고 그냥 그대로 서서 영원한 대선정(大禪定)에 들었다. 때는 수나라 양제 대업 (大業) 2년 병인 10월 15일이었다.


라틴어로 Bellum omnium contra omnes, 영어로 The war of all against all

이 문장은 토머스 홉스가 자연상태의 인간 존재에 대해 리바이어던에서 사고실험을 행하면서 거기서 도출된 결론을 묘사한 것이다. 이 사고 실험에서 인민은 사회-이전의 조건에 처해 있다. 홉스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이론화했다. 홉스에 따르면 인민은 결국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사회계약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인민들이 자연상태에서 가졌던 몇 가지 자유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 사고실험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주권의 역할이 국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실험이었으며, 또한 다른 기초를 통해 수립된 국가와의 비교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삶은 우리는 그물처럼 서로 연관되어있다. 그래서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다. 이렇게 되는 건데 우리는 잘못 알고 있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내가 행복 하려면 넌 불행해야 한다. 너를 딛고 내가 일어서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경쟁하고 투쟁하고 그래서 승리하고 이것이 성공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도 자연을 정복한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깨달은 눈으로 이세상을 보면 우리는 다 서로 연관된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의 일부다. 


여기에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이렇게 가려져있는 상태로 보면 다섯 개가 별개로 보인다. 움직이기도 따로 움직이고 모양도 다르고 그러나 이 가려진 것이 벗겨지면 한 손에 연관되어 있다. 똑같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 손에 연관되어 있다. 별개가 아니다는 말이다. 단독자가 아니다. 손의 관점에서 보면 한 손이고 손가락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손가락이다. 그러나 그 다른 손가락이 별개는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처럼 다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별개로 독립되어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있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본다고 하더라도 아주 좁은 범위만을 보고 그 자신만의 경험으로 한정해서 진리를 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지금 범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은 말씀은, 중생은 어떤 죄가 있는 게 아니다. 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계속 스스로 만든다. 自業自得이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애기다.


그래서 첫째 ‘나다’ 하는 것이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나’가 더 풍부해진다. 나는 인연을 따라 나투는[불경 우리말 해석본에서 '나투다'는 한문 원본의 '현(現)'자를 번역한 것으로서, '나타나다'라는 말의 고어(古語)]거다. 


만약에 스님이 부엌에서 밥을 하면 스님이 밥을 하는 건가? 그때는 밥하는 존재인가? 밥하는 존재다. 밥을 할 때는 밥하는 사람이 있다. 승객이라고 정해진 거는 없다. 차를 타면 승객이라고 불리는 거다. 밥을 하면 공양주라고 불리고 애기를 만나면 엄마라고 불리는 거다. 학교에 갔을 때만 학부형이라고 불리는 거다. 절에 오면 신도라고 불리는 거다. 그런데 회사에 가서 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절에 와서도 사장 흉내를 낸다면 갈등이 생긴다. 스님이 절 안에서가 아니고 밖에 가서 국회의원을 만났거나 장관을 만났거나 대통령을 만나서 관계가 다른 규정을 받아야 될 관계에서 상대를 신도로 취급하면 예의에 어긋난다. 반대로 그 사람이 절에 왔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장관으로 사장으로 취급해 주면 비굴해진다. 내가 고향집에 돌아갔다면 아버지는 신도가 아니고 아버지다. 그기서는 내가 아들이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절에 온다면 그 분이 여기 와서 스님의 아버지라고 다니면서 온갖 간섭을 하면 되겠나? 안 된다. 여기에 오면 거사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직분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갈등이 생기는 거는 바로 인연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연을 따르지 못하는 거는 뭔가를 움켜쥐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린아이는 보살펴야 된다. 아이가 다 자라면 독립(자립)을 해야 된다. 그런데 보살필 때 보살피지 못하면 아이가 자라지 못하고 독립을 시켜야 될 때 독립을 시켜주지 않으면 애완용 동물이 된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 애정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습관에 익숙해져서 애가 사춘기를 넘어가는데도 계속 어린애 돌보듯이 돌봐버리면 그 아이는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게 지금 큰 병이다. 


우리가 혼자 살 때, 처녀라고 불린다. 그때는 누구를 만나던 일정한 범위에서 행동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한다. 그러면 그기에는 자기의 존재가 변한다. 그러면 그기에 맞춰서 새로운 자기 존재를 인식해야 되는데 처녀적처럼 행동한다. 총각 때처럼 행동한다면 갈등이 생긴다. 이걸 가지고 왜 자유를 막느냐 뺏느냐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가 같이 살기 때문에 아내나 남편이 된다. 그런데 상대편께서 돌아가셨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남편과 아내가 아니다. 그런데 남편이 없는데 자기를 계속 아내라고 생각을 하면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오랫동안 살다 보면 그렇게 습관 들어서 아직도 아내인양 착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다. 


택시를 탔을 때 승객인데 택시에 내렸는데도 계속 승객이라고 고집하면 안 된다. 탔을 때만 손님이고 가게 갔을 때만 손님이다. 그런데 내가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갔는데 가게의 주인은 손님은 왕이다 해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그런데 그분이 절에 와서 자기가 왕처럼 행동한다. 절에서는 평등한 신도지 손님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나툰다. 

이것을 한문으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한다. 

이 법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삶이 자유로워진다. 

지금까지 한을 품었던 것도 놓을 수가 있고,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행위도 이해하게 되고, 

움켜쥐고 있던 것도 내려놓을 수가 있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도 당연히 없다. 

그래서 무소유가 된다. 

내 의견이 옳다고 고집할 것도 없다. 

사람에게는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게 아니다. 無我執. 

그러니까 중생은 ‘내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이게 중생의 삼대 무지다. 

모든 병은 여기에서 나온다. 

여기로부터 탐욕도 성냄도 나온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 無我.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 無所有. 

‘내가 옳다’라고 할 것도 없다. 無我執. 

이것은 다 한마디로 ‘無我’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지금 우리는 공기로 숨쉬고 있다. 내 것이라서 내가 이용하는가? 내 것이 아니라도 내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가? 이용할 수 있다. 그럼 내 코에 들어온 거는 내 거다. 그 공기가 금방 내 코에서 다른 사람 코로 들어간 거를 내 거 내 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이세상에 있는 천하의 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늘 이건 내 거라고 고집하고 있다. 움켜쥔다. 또 우리는 사람은 자기 태어난 환경에 따라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옳고 그름이 일어난다. 이 동네 사람들은 동산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듯이 이게 옳고 그름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다를 뿐이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 빛깔이 다르고 남녀가 다르고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가지고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우등하다 열등하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우월의식 때로는 열등의식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이 온갖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無常, 無我. 이 존재의 참모습을 


제법실상(諸法實相)


이라고 한다. 존재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가 확연히 알면 괴로울 일이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면 하는 일마다 온갖 일이 다 결국은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중생은 일체개고(一切皆苦)요. 깨달은 이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니 五蘊이 모두 空하다고 했는데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다. 그러면 먼저 색이 공하다. ‘색이 공하다’는 것을 소승수행자에게 확실히 ‘공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밝혀줘야 ‘색이 공하다’는 것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먼저 ‘색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을 하는데 첫째 ‘색이 공하다’하는 한 가지 방법은 ‘색이 무상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고 ‘색이 무아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해서 합해서 ‘색이 공하다’는 것을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첫 번째 문장에 色不異空 空不異色 이렇게 되어있다. 


不異라는 것은 다르지가 않다. 둘이 아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를 異자다. 다르지가 않다. 이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색이 공하다’는 말이다. 색을 요소라고 이해하면 오온설은 오요소설과 같이 돼버린다. 요소설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이 요소설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고 비판을 했다. 근데 불교를 요소설처럼 이해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만 사실은 이미 어긋나버렸다. 


동산이다 서산이다고 싸우는 게 이세상이라면 부처님이 그것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라고 말씀을 했다. 그랬더니 그러면 “동산과 서산은 거짓이고 진실은 非東非西山이다” 이런 거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산과 서산을 그건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오직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와 같다. 그러니 다시 부처님이 그것은 法執이다. 진리라는 또 하나의 想이다.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인연을 따라서 동산이라고 하니까 동산이 아니요 서산이라고 하니까 서산이 아니요 그 상을 깨뜨린 거다. 상을 깨뜨렸다면 이 산은 남산도 북산도 작은 산도 아니고 큰 산도 아니다. 


그럼 이건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다. 이곳에 가면 동산이요 저곳에 가면 서산이요 큰 산이라 불릴 수도 있고 작은 산이라 불릴 수도 있다. 인연을 따라서 불린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空이요. 이것이 소승교설에서 말하는 無常과 無我다. 


이것은 교설이 서로 다른 게 아니다. 근데도 마치 소승교설은 틀렸고 대승교설은 맞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부처니의 가르침은 어떻게 표현되던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거다.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이라고 말하고 춘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이라고 말한다. 왜 동쪽이냐 서쪽이냐 그것은 오직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울 가는 길은 즉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얘기하는 거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오온을 구성하는 색은 공하다. 그런데 수(느낌)도 실체가 없다. 우리의 생각에도 실체가 없다. 우리의 의지에도 실체가 없다. 우리들의 (업)식에도 실체가 없다. 이것도 이런 논리로 다 공하다. 이것이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다. 이 말은 전부 합하면 오온개공(五蘊皆空)다. 


우리는 내 아이, 내 아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게 왜 내 아이인가? 내가 낳았으니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낳아서 내 아이가 아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을 해서 내 아이다. 내 부모. 부모가 나를 낳아줬기 때문에 내 부모다? 아니다. 내가 내 부모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내가 입양해서 키우면 엄마는 이 아이를 입양한 걸 알지만 아이는 죽을 때까지 말 안 하면 모른다. 자기를 낳은 부모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라고 하는 사람은 낳아 준 사람이라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 부모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믿음이 철저한 거다. 마치 우리가 돌이라도 뭐라도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게 진실이 돼버린다. 부모는 그러면 이해가 된다. 그러면 자식은 이거는 아니지 않느냐? 자식도 그렇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애가 고등학교 다니는데 혈액검사를 해왔는데 엄마 아빠 피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러면 누가 의심을 받는가? 남편이 의심을 받는가 아내가 의심을 받는가? 아내가 의심을 받는다. 그런데 아내는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너무너무 억울한 거다. 그러나 남편은 추궁은 안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다’하는 식으로 그냥 말을 잘 안 했다. 너무너무 억울해서 어떻게 어떻게 몇 개월을 수소문을 해 봤더니 병원에서 낳을 때 병원에서 딱 바뀐 거다. 


그러니까 애기를 낳자마자 부모가 못 보고 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바뀌는 경우는 가끔 있다. 그러면 그냥 내 아이다. 이건 낳은 게 아니다. ‘내가 길렀기 때문에 내 아이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내 아이라고 믿어서 내 아이다. 


우리 중에도 부모 아닌 사람을 부모다 자식 아닌 사람을 자식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상관없다. 왜? 본래 그렇기 때문에. 


‘자식 아닌 사람이 자식이다’ 이런 말 자체가 성립 안 된다. 왜? 


낳는 것은 생물학적인 문제지 우리들 인간(마음, 믿음)에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일체가 유심조라는 문제가 이제 확실해 지는가? 이런 거도 다 ‘내 부모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자식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 원리를 더 깊이 안다면 우리가 입양을 하던 아무 관계가 없다. 입양을 했을 때, 다만 내가 내 자식이 아니라는 정보가 있기 때문에, 입양이라는 생각 때문에 입양이지 그 생각만 버려버리면 입양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러분에게 저 히말라야에 가서 수행 좀 하고 오겠다고 수행도 부족하고 해서 한 10년 정진하고 올 테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갔다. 가다가 중간에 사고 나서 죽어버렸다. 근데 인도에서는 이게 누군지 몰라서 그냥 처리해 버렸다. 그래서 일년이 지났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행 잘 하고 있을까?’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다. 그러면 ‘야~진짜 대단하시다.’ 이러고 있을 거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님이 살았나 죽었나? 살았다. 이럴 때, 스님이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또 스님이 여러분이 상담 요청하고 법문 요청하고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있는 동안은 도저히 방법이 없겠다. 그래서 내가 인도 산속에서 한 10년간 수행을 하려고 그기에 가서 있다면 그기까지 따라 올 것 같아서 그냥 교통사고 났다고 해서 딴 사람 시신을 하나 화장을 해서 뼈를 갖다가 관에 담아서 신문에 크게 났다 ‘스님이 인도에서 사망해서 유골이 왔다.’ 그래서 여기에 분향소를 차려놓고 다 했다. 그러면 여러분은 49제도 지내고 다 하겠지. 1주기 2주기 3주기도 할거고 (그렇게나 해줄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면 스님은 히말라야에 살아있는데도 여러분에게는 죽었나 살았나? 죽었다. 


그럼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게 뭘 의미할까? 이걸 우리가 딱 깨치면 즉시 생사여탈(生死與奪)한다. 생사여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 육신이 안 죽는다 이런 소리하면 이건 무상에 어긋난다. 그래서 一切唯心造다. 나고 죽는 것도 내 아들 내 부모도 옳고 그름도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원효대사가 해골 바가지의 물을 먹고 토하면서 깨쳤다. 그 바가지 그 물인데 어제는 달콤하더니 오늘은 왜 토할까? “아! 더럽고 깨끗함이 마음 가운데 있구나. 진리는 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짓는 바구나.” 이걸 깨쳤다는 말이다. 


이걸 깨치면 여기에 무슨 세간이 있고 출세간이 있으며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고 진리 아닌 세계가 있겠는가! 


여기에 무슨 원수와 친한이 있겠는가! 


다 마음이 짓는 바인데. 결국은 우리는 어리석은 한 생각을 일으켜서 온갖 시비분별을 일으켜서 그기에 사로잡혀서 지금 이렇게 괴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소식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말씀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으면 즉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마치 깜깜한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찾는다고 더듬고 있다가 불을 탁 켜니 방안이 전체가 한눈에 보이듯이 우리의 온갖 번뇌는 즉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