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1)
13.강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1)
사리자야, 舍利子 是, 이것, 諸法, 이 모든 존재들이, 이 모든 법들이, 空相, 공의 모양, 공=존재의 참모습, 이세상 모든 것들의 드러난 모양이 아니고 이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참모습, 본질의 세계 그것은 곧 텅 비어있음. 공이다. 그러니까 드러난 현상의 차원에서 중생의 눈으로 본 세계를 갖고 논하는 게 아니고 ‘제법이 다 공하다’는 그런 차원, 제법실상의 차원,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이런 데서 본다면 이런 얘기다.
그러니까 드러난 이 현상계에서 본다면 분명히 태어나고 멸하고 이런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의 세계에서 볼 때는,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어난다 하지만 사실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죽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얘기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우리가 바닷가에 가서 바다를 가만히 한 번 보면 파도가 수도 없이 밀려온다. 파도는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진다. 어떤 때는 크게 치고 어떤 때는 작게 치고 어떤 때는 길게 어떤 때는 짧게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바다에는 치고 있다. 그 파도 하나하나를 우리가 본다면 “어, 파도가 생겼다. 파도가 사라졌다. 어, 파도가 생겼다. 파도가 사라졌다.” 이렇게 생멸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다 전체를 본다면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물이 출렁거릴 뿐이다. 생긴다 하지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출렁거릴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니다. 이 불생불멸을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교설인 제행무상과 불생불멸은 서로 모순이 아니냐? 이렇게 오해를 한다. 바로 제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변하기 때문에 (무상이라는 것은 변하는 거다) 파도가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출렁거림이고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는 것은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기고 물이 없어지고 얼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된다.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할 뿐이다.
그래서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함으로, 항상함이 없이 변하므로 사실은 생겨난다 하는 말도 맞지 않고 사라진다는 말도 맞지 않다. 생겨난다 그렇지가 않다 불생이다.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 불멸이다. ‘사라지지 않는다’가 아니다. ‘사라진다’라고 할 수가 없다. 생겨난다고 하지만 생겨난다고 할 수가 없다. 생겨난다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물을 잘못 관찰하기 때문에 그렇다.
차원으로 얘기해 보자. 2차원의 세계가 있다. 2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평면이다. 평면이라고 하는 것은 x축과 y축만 있지 여기에 높이(z축)가 없다. 그러면 평면상에 원을 그리고 그 원안에 개미를 한 마리 넣어 놨다. 개미가 이 원을 가로지르지 않고 원밖에 나올 수 있는가? 없다. 불가능하다. 어떤 궁리를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3차원에서는 그 개미는 금을 가로지르지 않고도 금 밖에 나올 수 있다. 그것은 개미를 들고 그 선을 넘어서 밖으로 내 놓으면 된다. 그러나 사실은 개미는 생겨난 것도 아니고 개미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이동했다. 어디로? 높이로 z축이, 높이가 제로인 상태가 그것이 1이나 2나 3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한다면 1차원이라는 것은 직선이다. 오직 앞뒤만 있다. 좌우가 없다. 오직 일직선이다. 그것은 마치 파이프 속과 같은 것이다. 파이프 속에서는 오직 앞뒤만 있지 옆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게 직선이다. 그 파이프 속에 꽉 찬 두 개의 구슬이 부딪쳤다. 그러면 피해갈 수 있는가? 없다. 불가능하다. 하나가 이기고 하나가 지는 것처럼 하나가 앞으로 가고 하나가 뒤로 가고 밀고 당기는 것 밖에 없다. 이 1차원의 세계에서는 너 죽고 나 살던지 내가 죽고 너 살던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던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내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너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2차원에서 볼 때는 그 구슬이 옆으로 피하면 된다. 옆으로 이동하면 된다. 만약에 관속이 아니라면 옆으로 비키고 지나가고 다시 와서 지나오면 된다.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해결이 너무너무 쉽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네 볼일 보고 나도 내 볼일 볼 수가 있다.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수직선 같은 1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을 못하는 거다. 죽고 사는 문제가 된다. 이기고 지는 승패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한 차원 높여서 내려다 보면 하나도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살짝 비키면 된다.
상대가 나를 향해서 욕을 할 때 우리는 네가 욕을 하니 나도 욕을 할 수 밖에 없다. 네가 화를 내니 내가 어떻게 화를 안 낼 수가 있는가? 이런 생각은 1차원의 세계다. 부처님은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니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그것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 부처님이 걸식을 갔는데 한 바라문이 음식을 주기는커녕 화를 내고 욕을 했다. 우리 같으면 그 비난이 듣기 싫으니까 “야, 음식을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되지 욕은 왜 해?” 이렇게 대응할 수 밖에 없다. 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그렇게 대응한다. 그러면 그 사람 또한 대응을 할 거다. “네가 왜 아침부터 내 집 앞에 서있었는가? 네가 내 집 앞에 서있지만 않아도 욕을 할 이유가 없다. 네가 먼저 와서 서지 않았는가?” 그럼 나도 또 할말이 있다. “길이 네 길인가? 대문 앞에 서있지도 못하는가? 내가 달라고 하지 않았지 않느냐 다만 나는 그냥 서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욕을 하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시비다. 옳고 그름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옳고 그름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화내고 욕설하는 바라문의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우리는 웃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1차원에서 옆으로 비킬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비켜섰다. 앞에서 화를 내고 오니까 살짝 비켜서준 거다. 지나가라고 그럼 지나 보내고 가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웃는 것을 보고 또 시비를 한다. “왜 웃는가? 왜 나를 비웃는가?” 그럴 때 부처님이 그 말에 대꾸를 안 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는가? “야, 웃지도 못하는가? 그럼 네가 욕하니까 내가 욕하면 좋겠는가? 웃으면 났지.” 뭐 이렇게 하는 것은 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거다. 그것에 개의(介意) 안 한다.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부처님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물었다.
“오지요” 이제 화재가 바뀌었다.
“올 때 선물 가지고 옵니까?’
“네, 가지고 오지요.”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거요?”
“가져온 사람 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니 손님 얘기는 왜 하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당신이 나에게 욕설의 선물을 줬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요?”
그때 그 바라문은 탁 깨쳤다. “아, 죄송합니다. 부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그러면서 공양을 접대했다. 여기에 이기고 지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발 살짝 비켜서니까 철천지원수가 아주 절친한 친구가 돼버렸다. 이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멸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러나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게 되면 생이 생이 아니며 멸이 멸이 아니다. 우리는 시비 속에 지금 갇혀있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이면 옳다 하지만 옳은 게 아니고 그러다 하지만 그른 것도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 제법이 공한 세계, 그 차원에서 보면 이렇다. 그러니까 오늘 범부중생의 세계는 1차원의 세계와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한 차원 높은 2차원과 같다. 범부중생의 세계가 2차원의 세계와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3차원과 같다. 범부중생의 세계가 3차원의 세계와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4차원과 같다. 한 차원 높여서 보는 거다. 같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범부중생은 1차원에서 苦와 樂이 있다. 그런데 苦는 없고 樂만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옥은 싫고 천당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 차원 높여서 보면 苦와 樂은 다 苦다. 苦만 苦가 아니고 樂도 苦다. 그러니까 고락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취할 바가 없다. 둘 다 버린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중생이 보는 1차원으로서의 苦樂의 樂이 아니라 苦樂을 여읜 苦樂을 떠난 한 차원 높은 세계의 즐거움이다.
중생의 세계에 있어서 이기고 짐, 승패. (여기서 패하기는 싫고 이고 싶다) 이겨서 얻는 그 즐거움이 아니고 승패를 떠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비켜서면 되니까. 욕을 했을 때, 맞받아서 욕을 하는 것 그래서 상대를 굴복시켜서 내가 이겼다 하는 상대가 굴복해서 내가 이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나한테 사과를 해서 내가 이긴 이런 기쁨이 아니고 승패를 떠난 옳고 그름을 떠난 세계 그래서 그도 살고 나도 사는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바라문은 깨달아 기분이 좋고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은 공양을 드셨다. 그는 깨달아서 좋고 공양을 올려서 복을 지어서 좋고 부처님 같은 훌륭한 스승을 둬서 좋고 그는 눈이 어두워서 어리석어서 붓다를 비난했지만 붓다는 그에게 그 비난의 과보로 화를 준 게 아니다. 그를 깨우쳐서 기쁨과 복을 줬다.
붓다가 준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얻었다. (“그때 왜 화가 났는가?”를 이해한다면 이 말도 이해가 된다.)
이건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러니까 단순히 생멸이 없다. ‘생멸이 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멸이 있다는 것은 바로 중생의 세계를 말하는 거고
깨달으면 생이라 하지만 생이 아니고 滅이라고 하지만 滅이 아닌 세계 그것은 곧 비유를 하자면 중생은 곧 고락의 세계에 빠져있고 깨달으면 고뇌에서 벗어난 윤회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그 열반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苦樂의 樂이 아니다.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생의 차원에서 늘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해를 苦樂의 樂처럼 이해한다. 승패가 없는 세계에서 붓다의 위대한 승리를 승패가 있는 세계에서의 승리와 동일하게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법을 이해하는 것은 온전하게 이해하는 게 아니다. 항상 자기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불교가 기복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이유
가 그기에 있다. 그 기복이라고 말할 때의 복은 행과 불행의 행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행과 불행을 떠나버린 행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이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래서 앞에 조건이 붙어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 모든 법이 공한 그런 세계에서, 그런 차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부처의 세계에서 보면, 우리가 악몽을 꿀 때 강도에게 쫓기고 있다면 그 강도에게 쫓기고 있는 그 꿈 안에서 꿈의 안에서는 분명히 강도가 있고 나는 두려움을 갖고 있고 도망을 가고 구원을 요청하고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 나를 구원해주면 그분은 고마운 존재고 이렇다.
이것은 꿈 속의 얘기다. 그러면 눈을 뜨면 “아, 꿈이구나” 꿈이구나 이거로 끝나야 된다. 꿈이구나 이 말이 뭔가? 제법공상. 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 참의 세계. 공의 세계. 공의 모습에서는, 눈을 뜨면, 강도가 없고 그러니까 두려워할 일도 없고 도망갈 일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일도 없고 도와줄 자도 없다. 이게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다. 존재의 본질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변할 뿐이다. 그 변화가 여러 종류의 변화다. 물질 같으면 ‘상태변화’가 있다. 그럴 때는 분자에는 변화가 없고 ‘화학변화’가 있다. 그럴 때는 분자가 변하고 원자의 변화가 없고 ‘핵변화’가 있다 그러면 원자까지도 변한다. 이 변화의 여러 차원이 있다. 신진대사를 하는 생명의 변화, 우주에 있는 별들의 변화, 지구상에 있는 바위들은 바위들대로의 변화, 지형은 지형대로의 변화 여러 차원의 변화가 있다. 그러니까
생하느니 변하는니 하는 것은 인식상의 오류다.
시간적으로 너무 짧게 관찰하거나 공간적으로 아주 좁은 범위를 관찰함으로 해서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이 공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인식상의 오류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떤가?
나는 북한 난민들을 많이 도왔기 때문에 그러다가 국군포로들도 만나게 되고 그분들 고향에 돌아올 수 있도록 조용히 도와준 적도 있는데 그분들 얘기를 듣고 고향에 찾아가보면 (그분이 살아있다 해도) 어떤 경우는 전혀 안 믿는다. 왜? 내가 어떤 분을 한 번 찾아갔는데 어제 저녁에 그분의 47주기 제사를 지냈다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돌아가셨다고 통지 받고 유품 받고 유골은 거의 없어져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그러고 국가보상 그기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40몇 년 동안 연금도 받았다. 매년 제사 지낸다. 그런데 살아있다.
그러면 살아있다 이 말을 듣기 이전까지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죽었다. 그분한테는 확실히 돌아가셨다. 그런데 실제로는 저기에 살아있다. 그런데 살아있다라는 정보가 제공되고부터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았다. 그런데 이 정보를 제공하는 그때는 이미 그 분을 돌아가셔버렸다. 그러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통보 안 하면 죽은 건가 살아있다는 건가? 살아있다. 그러니까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정보의 입력이다.
내가 낳아서 ‘내 아이다’고 하는데 내 아이가 아니다. ‘내 아이다’라는 인식이 내 아이다. 병원에서 바구니가 바뀌면 그냥 모르는 거다. 내 부모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정보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물을 인식하는 이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정보,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나고 죽음의 문제, 인식상의 문제이다. 어떻게 인식하는가?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가 제공되면 어떤가? 그냥 죽은 사람도 살았다가 되고 살은 사람도 죽었다가 된다. 그러니까 이런 인식상의 오류로 생멸이라는 거지 인식상의 오류가 사라져버린다면 사실은 난다 할 것도 없고 난다 하지만 난 것도 아니고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도 아니며 그러니까 이 생멸로 인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다 무지로부터 생겨난다.
이걸 확연히 깨쳐야 불생불멸의 도리,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안다. 그런데 우리는 생사가 없는 도리, 불생불멸의 도리라 그러면 영원히 안 죽는 걸 생각한다. 즉, 무상과 반대되는 항상함, 영원을 생각한다. 영원의 개념이 아니다. 난 것은 반드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멸해야 된다.
生者必滅 = 不生不滅 = 無常無我 = 空
파도가 일어나서 사라지지 않을 수가 없다. 파도가 일어나서 안 사라지는 것이 불생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생멸을 전체의 차원에서 딱 내려다 보면 그건 다만 출렁거림일 뿐이지 생기고 사라짐이 아니다. 지금도 출렁거린다. 좁게 인식하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거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파도가 생겼다가 사라지겠는가? 끝도 없이 파도가 생겨나고 끝도 없이 파도가 사라진다. 그러면 전 지구상에 있는 이 생명의 바다에서는 어떤가? 수많은 생명의 물결이 끝도 없이 출렁거린다. 마치 파도만큼이나 어쩌면 그 보다 더 많은 수가 생하고 멸하고 생하고 멸하고 하지만 전체의 세계에서 보면 출렁거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 파도가 일어났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한 파도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간다 하지만 간 곳도 없고 온다 하지만 온 곳도 없고 다만 변화가 있다.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데서 오늘 우리들은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뭔가?
너는 누구인가?
나에게 돌아와서 질문을 받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게 가상의 환상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꿈 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그것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밤새도록 쫓기는 거와 같이 우리는 어떤 환영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환영에서 깨어나야 된다.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甚麽)?
이 무엇고?
이 본질 적인 질문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이 환상에서 깨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여기서 나라고 하는 여기에서 발생된 것이 무언가? 나의 것이라고 하는 我所. 내가 옳다라고 하는 我執.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이것 또한 질문을 받고 탐구를 해야 된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정말은 누구의 것인가?
네가 옳다고 하지만 정말은 옳은 것인가?
어째서 옳은가? (그때 왜 화가 났는가? 그게 화날 일인가?)
이것을 끝없이 탐구해 들어가면 우리는 내 것이라 할 것도 네 것이라 할 것도 우리 것이라 할 것도 자연의 것이라 할 것도 하늘의 것이라 할 것도 없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이 없는 그것이 다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그것이 나의 것이든 너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자연의 것이든 하느님의 것이든 우주의 것이든
그것은 다 우리들의 망념에 불과한 거다.
(금강경,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을 진실한 형상 아님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꿈을 깨는 거다. 이것은 단지 꿈을 깨는 소재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므로 해서 그것을 참구(이게 화두다)함으로 해서 우리는 꿈에서 깬다. 근데 우리는 오늘 늘 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꿈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거다.
(금강경,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如 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법은 꿈이며 환상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와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화두 (話頭)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이 무엇고?’ 화두는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참된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것으로, 무자화두 다음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또한,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 ‘삼 서근’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말이며, ‘마른 똥막대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 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답한 말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켜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그의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닭이 알을 안을 때에는 더운 기운이 늘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주린 때 밥 생각하는 것이나 목 마를 때 물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 있어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현대의 고승 일타선사(日陀禪師)는 “화두를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切)’이야말로 화두를 드는 데 있어 가장 요긴한 것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해 나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대오(大悟)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조사의 1,700여 가지 화두 가운데 한 가지를 취하여 참선해 보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화두에 대하여 집중이 되지 않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입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법(誦話頭法)을 권하기도 한다. 입으로 계속해서 송화두를 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화두가 목구멍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염화두(念話頭)로 바뀌게 되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이루어진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불러일으키면 참의심[眞疑]이 생겨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때의 화두를 참화두(參話頭)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즉, 화두가 또렷하게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꿈을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廓徹大悟:확연히 꿰뚫어 크게 깨우침)하게 된다.
또, 이런 질문도 받는다. 이 불생불멸과 관계가 있다면 ‘너는 누구인가?’도 있지만 너는 어디서 왔는가? 내가 이 불법에 입문을 한 거는 바로 이 질문이었다. (법륜스님이 출연한 '힐링캠프'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너 어디서 왔느냐?”
“학교에서 왔다.”
“학교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
“집에서 왔다.”
“집에서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 추적해 가면 결국은 어머니 뱃속에서 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모른다.”
다시
“너는 어디로 가느냐?”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갔다가 어디로 갈 건가?”
“집에 간다.”
“집에 가서 어디로 갈 건가?” 자꾸 묻는다면 결국은 죽는다.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가?”
“모른다.”
결국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우리 인생은 이렇게 바쁘다. 바쁘다 바빠. 온 곳을 알고 갈 곳을 알아야 바쁘든지 할 텐데, 우리는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면서 바쁘다. 마치 가을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그러나 이런 것도 결국엔 깊이깊이 탐구해 들어가면 어떻겠는가? 불생불멸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런 이치를 깨닫는 다면 올래야 올 곳이 없고 갈래야 갈 곳이 없는 오고 감이 없는
불래불거(不來不去)
온다 해도 온 것이 아닌 간다 해도 간 것이 아닌, 오고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깨달았을 때, 붓다를 호칭하는 칭호가 뭔가? 타타가타(Tathagata, 如來), 옴도 없고 감도 없는 자다. 그걸 다른 말로 여여(與與)히 오고 여여히 간 자다. “고타마시여”하고 오비구가 부르니까 부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마시오.” [팔리어 gotama 산스크리트어 gautama 인도의 크샤트리야 계급에 속하는 여러 성(姓) 가운데 하나. 석가모니의 성(姓).] 나를 타타가타(如來)라 부르시오. 이렇게 말했다. ‘나를 높여라’는 말이 아니다. 오고 감이 없는 자.
그러니까 우리가 꿈을 깨듯이 악몽을 꾸다가 깨듯이 오늘 우리들의 이런 인식상의 오류, 이걸 무지(無智)라 한다. 이 무지에 우리가 사로잡혀있다. 여기서 깨닫게 된다면 눈을 뜨게 된다면 우리들이 지금 고뇌하고 있는 이것 때문에 죽겠다. 저것 때문에 죽겠다. 온갖 아우성. 초조하고 불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방황하고 들뜨고 하는 이런 모든 괴로움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지마는 쨍쨍한 해가 나게 되면 다 고요해 지듯이 이런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설령 다시 꿈속에 빠지더라도 헤매다가도 이제는 금방 자각하게 된다. “어! 이거 꿈이야.” 이렇게. 도망가다가도 “어! 이거 꿈이야.” ‘꿈이야’하는 생각이 들면 도망가지 않고 눈뜨려고 한다. ‘망념이야’하는 것을 알게 되면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빠지지 않고 금방 정신을 차리게 된다. 경계에 사로잡힌 것뿐이다. “어! 내가 또 경계에 사로잡혔구나.” “어! 내가 또 내 생각에 빠졌구나.” 그래서 우리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속에서도 그 물결에 빠지지 않고 허우적대지 않고 이제는 금방 정신을 차려서 제상태로 원상태로 돌아올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정을 한번이라도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선정을 해본 사람은 무의식에 의한 생각에 매몰되더라도 금방 되돌이켜 현재에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찰나찰나에 깨어있을 수 있는 동정일여의 경지로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하고 ‘물에 빠진 김에 조개나 줍자’하고 주워오는 사람하고는 삶의 태도가 다르다. 이세상에서 보면 겉으로 보면 똑 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행복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도움을 주고 세상에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삶이다. 바로 그런 대승보살의 삶을 보고 사리푸트라가 너무너무 존경해서 관자재보살에게 물었고 관자재보살은 이러한 대승보살의 삶은 법의 실상이 공한 줄을 꿰뚫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삶이 나올 수가 있다. 이런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뭐니뭐니해도 money가 제일이다. 이런 생각이나 ‘그래도 출세가 제일이다’거나 인기가 제일이라고 하거나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거나 이런 생각에 빠져서 지금 진정한 행복의 길로 못 간다. ‘그런 거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해탈의 길로 갈 수가 없다. 그건 번지수가 잘못됐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서 계속 그것만 구한다.
그러니 정말 이 불법 만난 이 인연의 소중함을 안다면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서 니르바나를 성취해야 된다.
(일단 초선정이라도 해야합니다. 불법공부도 중요하고, 나누기하고, 기도하고, 절하고, 보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명상을 소흘히 하면 안되겠습니다.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
그러면 이런 세상의 복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거다. 그 부수입이 우리가 죽자 살자 그것을 향해서 구하는 주식보다 결과적으로 더 많다는 이런 얘기다. 그런 부수입은 없어도 좋고 또 필요하면 따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하게 복을 구하는 법이다. 정말 복을 구하려면 해탈과 열반이라는 참다운 복을 구해야 된다. 고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력은 적게 하고 이익은 많이 보려고 하는 그런 좋지 않는 심보 설령 그렇게 해서 복을 얻었다 하더라도 인과의 법칙에서 다시 빚을 갚아야 하는 그런 유류복(有漏福, 반대말 무루복 無漏福, 지혜복 智慧福) 이것을 구하지 말고 이제 정신을 차려서 붓다의 진실한 가르침에 귀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인 해탈과 참다운 행복인 열반을 성취를 하자. 이것이 반야심경의 가장 핵심 된 요지다.
덧글-1: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존재의 참모습=공상(空相, 텅비었다)
명상을 깊이하다보면, 생각이 사라지고, 호흡이 사라지고, 몸도 사라지고, 생생한 알아차림만이 있다는 걸 체험합니다. (혜민스님의 강의 참고)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본성, 불성, 참나)으로 존재하게 되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는 대상의 본질도 여실이 볼 수 있습니다. 온몸으로 대상을 인식하게 되고 대상과 내가 하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여실이 본다는 말은 상대성이 모두 떨어진 차원의 세계에서 본다는 거고, 시간과 공간을 여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나의 주관도, 객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라고 여겼던 마음상태가 청정하게 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덧글-2:
행주좌와 어묵동정(動靜一如, 동정일여)에 하나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서 꿈에도 화두가 하나로 이어지며(夢中一如, 몽중일여) 나중에는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가 하나로 이어지면(熟眠一如, 숙면일여) 안팎으로 아주 밝아져서(內外明徹, 내외명철) 마침내 확철대오하게된다고 성철스님께서는 이야기하십니다.
보통 절에서 말하는 동정일여는 의식(6식 표면의식, 7식 분별의식)상태에서의 깨어있는 경지이고, 몽중일여는 가수면 상태,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의 깨어있는(화두를 들고 있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는 완전한 무의식(8식, 아뢰야식) 상태에도 깨어있는 경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썰(說)이 있는 부분은, 심리학에서는 '꿈은 무의식의 말걸기(고혜경 박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몽중일여는 무의식상태에서도 깨어있는 경지가 되고, 숙면일여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벗어나 깨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전자가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꿈속에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알고 꿈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제가 알고 있는 스님 한 분은 꿈을 무의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 분은 몽중일여나 숙면일여나 모두 하나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무의식이란 말 그대로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이 세계는 무의식이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무의식은 의식에 상대적인 하나의 상징적인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조차도 하나의 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이 꿈일지라도 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