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경전

19.강 사성제

開理無語 2014. 8. 13. 21:59

19.강 사성제


[12연기 정리]

지난번에 공부한 것은 오온, 12처, 18계, 12연기까지 공부를 했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12연기는 연각승, 그러니까 연기법을 관하는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냥 드러난 사물을 관찰하는 게 아니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 원인을 찾으면 또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방식으로 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연구하듯이 아주 그렇게 하나하나 연구해 들어가는 거다. 한번 다시 정리를 해 보면,


항상 불교는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을 한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뭐냐? 渴愛, 욕망이다.


욕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그것을 말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이거를 取라고 한다.


이렇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어떻게 나느냐? 그 결과가 남게 된다. 결과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 열매가 열린다. 그것이 有라고 한다.


그 열매가 있으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 씨앗이 된다. 새로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을 生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일어나면 또 유지되고 그러다가 사라진다. 이것을 老死, 늙고 죽는다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니까 生-老死는 미래에 한 마음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까지의 그 과정을 줄여서 표현한 거다.


그러면 현재의 이러한 갈애는 저절로 일어난 거냐? 아니다. 이 갈애가 일어나는 데는 어떤 원인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연하여 이 갈애가 일어났느냐? 그것은 受로 연하여 愛가 일어났다. 受라는 것은 느낌이다.


그럼 왜 이런 受가 일어나게 되느냐? 그것은 내 눈이 있고 바깥 사물을 보고 접촉이 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일어나지 눈도 없고 바깥 대상도 없고 접촉도 없다면 이런 느낌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똑 같은 경치를 똑같이 본다고 느낌이 같으냐? 다르다. 왜 다르냐? 같은 눈에 같은 경치에 같은 접촉이 일어났는데 왜 느낌이 다르냐?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業識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 業識이 뭐냐? 씨앗이다. 식이 다르다. 씨앗이 다르기 때문에 똑 같은 밭에 똑같이 심어서 똑같은 물을 주고 똑 같은 봄날에 자랐는데 다른 싹이 튼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그래서 受는 觸으로 반전하고, 촉은 六入으로 반전하고, 六入은 名色으로 반전하고, 名色은 識으로 반전한다. 이 識이 씨앗이다. 


그럼 무엇으로 연하여 일어난 거냐? 이건 처음부터 있었느냐? 아니다. 이러한 씨앗은 그 이전에 어떤 열매다. 그 이전, 즉 과거에 어떤 행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행은 한마음 일으키고 하나의 말을 하고 하나의 행동을 하는 거다. 이러한 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지고 그것이 識이다. 


왜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느냐? 그기에는 어떤 渴愛가 있었기 때문에 行이 이루어졌다. 


그러면 渴愛는 왜 있게 됐느냐?


이렇게 과거부터 수도 없이 되풀이 됐을 때, 그 근본 원인이 뭐냐? 無明이다. 無智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데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無智로부터 일어난다. 無明으로부터 일어난다. 


한 생각 사로잡히는 데에서부터 시작


되는 거다. 그래서 과거에 무수히 수없이 반복된 것을 합해서 無明-行이라고 말한다.


이 과거의 無明-行으로 인하여 즉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우리가 받는 현재의 결과 뭐냐? [識-名色-六入-觸-受]이다. 


그러면 이러한 受에 맹목적으로 충동해서 愛를 불러 일으킨다. 愛를 불러 일으키면 이거는 또 미래에 원인을 제공하는 게 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과거의 원인의 결과로 현재의 과보가 따른다. 이렇게 겹쳐있다. 과거에 지은 원인의 과보로써 나타난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다시 현재의 渴愛를 불러 일으킨다. 그럼 이 渴愛를 행함으로써 이게 원인이 되어서 미래에 또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가 현재와 미래가 이렇게 겹쳐있다. 그래서 삼세(과거, 미래, 현재)가 겹쳐서 인연을 짓고 흘러간다. 이것을 전생, 현생, 내생으로 전통적으로 설명을 하지만 그렇게 설명을 하면 주로 불교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렇게 설명을 한다. 전생에 원인을 짓고 현생에 받고 또 현생에 그것에 따른 원인을 짓고 내생에 받는다. 그러나 불법의 차원, 수행적 차원, 진리의 차원에서는 


한 생각 일으키기 전이 과거생. 한 생각 일으킨 지금이 현재생. 한 생각 다음이 미래생이다. 


그래서 현재 한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나의 행위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분석이 되면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일단 현재 渴愛가 일어났다. 그러나 하고 싶지만 그것을 행했을 때 나에게 손실이다. 하는 지혜가 있으면 그럼 지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내가 지혜를 얻는 거다. 


담배피우고 싶다고 담배피우고, 마약하고 싶다고 마약하고,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당신의 건강을 헤치고 당신을 불행에 빠트린다. 전에는 좋은 줄 알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또 내가 경험을 해 보니 [아! 이것은 순간은 좋지만 결국은 나에게 큰 고통을 가지고 오구나. 그렇다면 그 순간에 좋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 빠져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며,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취하지 않으며, 이렇게 행동을 절제한다. 말과 행위를 절제한다. 이것이 戒律이다. 

이렇게 말과 행동을 절제하게 되면 인격이 도야가 된다. 남을 피해를 주지 않고 이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에 지어놓은 나의 業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끊임없이 화를 내고 욕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戒律은 지켰다가 또 어기게 되고 지켰다가 또 어기게 된다.

그러면 어기게 되면 참회를 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된다.


그러나 수, feeling이 일어날 때 이것이 渴愛로 연결이 되지 않도록 즉 부싯돌이 부딪혀서 불은 반짝하지만 솜을 치워버림으로 해서 솜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한다. 이게 수를 관찰한다. 그래서 이 수라는 것이 快-不快가 다 사실은 苦의 원인이다. 


이게 관수시고(觀受是苦)다. 느낌을 그대로 관하면 그것은 다 苦의 원인이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체득을 하면, 受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 차리면, 그런 깨어있음이 있으면 우리가 그러한 快의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하고 싶은 쪽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 不快한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이건 내 業識으로부터 일어나는 거니까 이것을 혐오하는 쪽으로 渴愛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受를 알아차리고 그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것이 선정을 닦는 법이다. 비파사나. 관법수행. 

[비발사나, 毘鉢舍那,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팔리어 vipassanā의 음사. 관(觀)이라 번역. 몸과 마음은 무상•고•무아라고 통찰함.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함.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함. 통찰하는 수행.] 


이렇게 해서 자신의 識, 자신의 業識을 자신이 잘 아는 거다. “아! 나의 業識은 이렇구나. 나는 경계에 부딪히면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는 구나” 이걸 자기가 미리 알게 되면 자기가 그기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업식에 끌려가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이제 자기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된다지 않는가? 이러한 자기의 업식을 분명히 알고 또 소멸시켰다 하더라도 무지로부터 이런 행이 또 일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무지를 타파하면, 존재의 본질을 확연히 꿰뚫으면, 연기법을 알면,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면, 이것이 무명을 타파한다. 이것이 지혜다. 


그래서 이 12연기에서 나온 수행법이 戒定慧, 三學이다. 이렇게 우리가 戒定慧, 三學을 닦아서 바로 무명을 타파하면 아라한(Arhan, 羅漢, 부처)을 증득할 수가 있다. 이제 기본원리가 그렇다. 


여기서 비판하는 원리는 바로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강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강도로부터 도피처를 찾는 것이 하나의 구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꿈속의 얘기다. 눈을 떠버리는 것, 눈을 떠버리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이 된다. 잠을 깨버리면 그러면 강도가 본래 없었다. 이때 그 강도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때 강도로부터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할 때 두려움이 있다가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은 본래 두려워할 일이 없었다.


그러면 두려움은 어디에서 생겼나? 착각에서 생긴 거다. 두려워할 일이 있어서 두려운 게 아니고 본래 두려워할 일이 없었던 거다. 왜? 강도가 본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일이 없는 거다. 근데 그건 내가 일으킨 한 생각에 내가 사로잡혀서 착각한 거다. 그 착각에서 깨어난 거지. 강도가 있어서 내가 강도에서 벗어난 게 아니다. 


그것처럼 무명을 타파한다. 할 때, 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명을 타파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무명이라 할 그 어떤 실체도 없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는 거다. 그러나 어리석은 상태에서는 분명히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말은 하는 거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즉 괴로울 일이 있어서 그 괴로울 일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괴로워할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에서 의해서 괴로워한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無無明, 무명이라 할 것도 없다. 즉 無明이라고 하면 무명이라 할 어떤 실체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 그래서 無明이라 할 것도 없다. 어떤 차원에서 볼 때? 깨달음의 차원에서 볼 때 공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러니 무명을 없앤다 랄 것도 없다. 그게 뭐다? 亦無無明盡이다. 


그러면 行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無明이 없으니까 行도 없다. 行이라 할 것도 없으니 行을 없앤다 랄 것도 없다. 그러면 行이 없으면 識도 없다. 識이라 할 것도 없고 그러므로 識을 소멸한다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다 연결이 돼서 다 생략을 하고, 乃至 해서 생략하고, 老死라 할 것도 없다. 無老死. 그러니 老死을 다한다 랄 것도 없다. 亦無老死盡 이렇게 됐다. 그래서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렇게 됐다.


지난번 시간에 자세히 강의를 했지만 오늘 또 간략하게 정리하는 이유는 이 12연기에는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 너무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좀 막연히 하는 성질이 있다. 문제의 본질을 다 꿰뚫어서 공부를 안 하고 그냥 막연히 한다. 우리 불자는 공부를 할 때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가 과학자가 어떤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자세가 같아야 한다. 그런 데서 12연기는 매우 과학적으로 짜인 것이다. 그리고 그기에 따라서 수행하는 법도 아주 단계적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오늘 대승불교나 선불교를 하면서 그 대승불교가 갖는 요지, 선불교가 갖는 날카로움 이런걸 우리가 체득을 못하고 그냥 막연히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기도하고 이런 것만 하니까 자기 수행이 안 된다. 


~미얀마 수행법,,, 중략(직접 시청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이든 우리가 본질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종파에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 여기 12연기 수행법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러한 수행을 할 때 잘못하면 상을 짓게 된다. 수행이라고 하는 상을 짓거나 교리라고 하는 상을 지어서 무명이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 이런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니까 그런 法相을 가진, 진리라고 하는 어떤 형상을 지은 사람에게 그것은 너의 마음이 지은 거다. 너의 무지로 인해서 너의 마음이 지은 거다. 그러니까 네가 그 한 생각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사실은 無明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 無明을 없앤다 랄 것도 없다. 이거는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그 마음을 바로 딱 꿰뚫어서 진리로 들어가는 그런 관점에 서있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 전제가 붙어있다. 공중에서는(空中~), 깨달음의 차원에서 볼 때, ‘제법이 공하다’는 그런 세계에서 볼 때 그렇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바로 강도가 있고 나는 강도로부터 쫓긴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강도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고 쫓길 일도 없다. 이런 얘기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자~ 이렇게 한 번 복습을 하고 그 다음 단계인


[ 四聖蹄 ]


無苦集滅道


여기서 苦集滅道. 근본 교설의 4가지 성스러운 진리. 근본불교, 소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 ‘4성제’를 증득하면 바로 아라한(Arhan, 羅漢, 부처)이 된다. 깨달음을 얻는다. [사성제 ; 고집멸도, 고통극복의 심천적원리]

[이것이 苦다]고 아는 것이 곧 성스러운 진리는 아는 것


이다. 여기서의 고는 苦-樂의 고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苦-樂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합되어 있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 된다. 괴로움이 곧 즐거움이 된다. 


결혼은 못하면 괴롭고 결혼을 하면 즐거워진다. 결혼을 하고 보면 그것이 다시 괴로움이 된다. 애를 못 낳으면 괴롭다가 애를 낳으면 즐거운데 그 아이 때문에 도로 괴로워진다. 그러니 樂이라고 하지만 樂의 그 다음단계는 다시 苦가 된다.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괴롭기 때문에 즐거워진다. 그러니 苦-樂은 긴밀하게 붙어 있다. 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서로 분리하려고 한다.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즐거움을 취하면 괴로움이 따라온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윤회(무수히 반복)한다. 그러니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즐거움마저 본질을 꾀 뚫어 보면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빠지지 마라 그것이 곧 괴로움이 된다. [苦-樂의 윤회] 이것 전체가 苦(괴로움)이다. ‘인생은 苦다’=’인생은 고락의 윤회다.’


苦-樂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渴愛에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하는 그것이 원인이다. 이렇게 원하는 것은 나의 業識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고 싶고 하기 싫고]가 내가 주인인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業識이 주인


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원인을 규명해 들어간다. 그러면, 


내 마음의 [貪瞋癡(탐진치), 三毒(삼독)]이 물들어서 그렇다. 


이러한 苦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깊이 들어가면 ‘愛 -> 執着 -> 無明(無智)’라고 할 수 있다. 無智를 타파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無智=한 생각 사로잡힘=傳導夢想]. 그로부터 괴로움이 발생한다. 


원효대사가 어둠 속에서 물을 마셨던 바가지는 날이 밝아서 보니 해골이었다. 해골이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니 구역질(혐오, 싫어하는 마음)이 나왔다. 다시 돌이키니 같은 물이고 같은 바가지인데 어제는 꿀맛이었고 오늘은 왜 토할까? 더럽다고 하는 것이 바가지나 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다. 내가 더럽다고 하는 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기에 사로잡혔다. 내가 마음에서 지어놓고는 내가 꿈 속에서 강도를 만들어 놓고는 그 강도가 객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도망을 가야 된다.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와서 괴롭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해서 괴롭다. 아내가 잔소리를 해서 괴롭다.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해서 괴롭다. 여기서 괴로움은 다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괴롭다. 전도된 상태. 자기 마음에서 일으킨 것을 뒤집어져서 바깥에 책임을 전가한다.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이다. 


공동묘지 옆길을 가다가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걸렸다. 돌아보니 하얀 것이 보였다. 앗! 귀신이다. 죽기살기로 도망을 간다. 아침에 와서 보니까 나뭇가지에 옷이 하나 걸려있다. 귀신은 없었다. 두려움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난 거다. (객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 거다. 꿈(착각)인 줄을 알면 머리를 한 번 흔들고 깨어나면 된다. 오늘 우리가 다 이렇다. 책임을 바깥에 전가 시키고 해결을 하려니까 남편이 술을 안 먹어야 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하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안 해야 한다. 밖을 고치려고 한다. 밖은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진다. 


나도 내가 잘 안 고쳐지는데 남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안 고쳐지니까 이제 힘을 빌려야 한다. 부처님에게 빌거나 하느님에게 빌거나 해서 “제발 저 인간 고쳐 주십시오.”라고 한다. 돈을 내라면 얼마든지 내고 절을 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다고 어쩌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加被(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가 다 꿈속의 얘기다. 


바로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다(一切唯心造). 이것을 깨달아야 된다. 


즉, 나를 향해서 관점을 바꾸어야 본질을 볼 수 있지 자꾸 바깥을 탓하면 이 문제의 근본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원인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라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을 執이라고 한다. 현실의 괴로움으로부터 근본 원인, 괴로움의 원인을 執이라고 한다면, 苦에서 執까지 가는데 원인의 원인을 규명해 가는 것이 ‘12연기’와 똑같다. 원인의 원인을 규명해 보니 그 원인은 나의 無智로 일어났다. 한 생각에 사로잡힘으로 일어났다. 착각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니 착각에서 깨면 이 괴로움이 사라진다. 어떤 괴로움이라도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깨달으면, 꿈에서 깨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멸).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을 소멸 시킬 수 있는가?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방법론; 도)


苦-集-滅-道 


苦(현상을 정확하게 보아야 된다.)-집(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멸(치료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도(치료법, 약, 수술,방법)


8정도(8가지 바른 길)

정견(바르게 본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착각하지 말고 본다.)

정사(바르게 사유, 생각, 판단)

정견+정사=지혜

정어(바른 말; 거짓말, 욕, 아양 떨지 않는 것)

정업(바른 행동; 살생, 도둑질, 사음하지 않는 것, 오히려 방생, 보시, 청정하게 생활하는 것.)

정명(바른 생활, 직업)

정어+정업+정명=지계(계율을 지킨다)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르게 깨어있음, 그 마음이 뚜렷하게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

정정(바른 안정,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된 상태)

정정진+정념+정정=선정


‘수’를 관찰할 때, 깨어있어야 하고 고요한 상태여야 한다. 고요한(편안한) 가운데 예리함이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해보면 마음이 고요한(편안한) 상태에서는 졸음이 온다. 그리고 ‘번뇌/망상’이 치성한다. 결국, 망상에 찌들어서 깨어있지 못하게 된다. 신경을 바짝 써서 긴장을 하게 된다.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 두 가지(깨어있음+고요함)는 늘 안 맞는다. 


편안하면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지만 긴장하지 않아야 한다. 바닷가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편안한 가운데 환히 알아지듯이 뚜렷이 관찰하는 그것이 ‘정념+정정’이다. 이것이 ‘관법’의 핵심이다. 


이렇게 관찰을 할 때 우리는 놓치게 된다. 마음이 불안해도 놓치고 깨어있지 못해도 놓치게 된다. 놓치면 놓친 것을 알고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10번 놓치면 11번 돌아오고 100번 넘어지면 101번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정진’이다. 꾸준히 해야 한다. ‘선정’을 닦는다. 


8정도를 ‘계-정-혜’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8정도’와 ‘계정혜’를 닦는 것이 바로 ‘도(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수행법)’이다.





덧글-1: 남방불교(소승불교, 동남아 지역)는 지금도 가장 중요한 수행법이 사마타와 비파사나(관법)입니다. 


제가 아는대로 말씀드리면 사마타는 말 그대로 선정입니다. 정에 든다. 일반인의 용어로는 '몰입' 또는 '무아지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 니밋타가 등장합니다. (선정에 들면 달덩이 같은 아주 밝은 둥근원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이번 강의에서 설명하고 있는 비발사나 또는 비파사나 또는 위빠사나입니다. 이것을 모두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 고 하고 8정도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반야심경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남방불교의 수행법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에 들고 날때, 입출정이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간화선의 경지는 행주좌와어묵동정 깨어있는 상태(동정일여)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타는 정에 들었을 때만 깨어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한계를 지적한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수행한 방법이 남방불교의 수행법이므로 이것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매우 중요한 수행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부처님께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염화미소(拈華微笑)를 한 가섭존자에게 전법계를 준 예를 통해 조사선의 원형(프로토타입)을 알 수 있고 반야심경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소승의 부정이 아닌 비판의 진의를 잘 이해하여 반드시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 이번 강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인간 붓다를 비롯하여 인도 10대 제자 포함하여 28대 달마까지, 중국에 와서 1대 달마부터 29(인도 56대)대까지, 우리나라로 넘어와서 1대 태고보우(중국 30대, 인도 57대)부터 22대 숭산대선사(중국 51대, 인도 78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법맥이 있고 이들은 부처님과 (다르지만) 동일한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2500년 이상 인가를 받아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분명한 거는 이들의 공통점이 모두 '선정의 달인'이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법륜스님, 서암스님, 진제스님, 수불스님, 혜민스님, 봉암사 적명스님 등도 이들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희열감, 지복, 보물을 언제든지 누리고 계신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덧글-2: 생각을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바라밀)가 열립니다. 그래야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갑니다. 그전에는 모두 방황에 지나지 않습니다.


1.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관해서는 [놓아버리기, 아잔 브람의 행복한 명상 매뉴얼, 지은이 아잔브람, 혜안스님 옮김]

2. 사마타의 입출정이 있다는 지적은, [BTN <부처님오신날 특집>봉암사 적명스님과 아잔브람스님의 간화선과 초기불교의 만남]

3. 니밋타에 관해서는 1번과 유투브 [https://www.youtube.com/watch?v=QxGkBVUEFQU, 단지불회 1월 봉암사 적명 수좌스님 법문]을 각각 참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