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무지역무득(凡所有想 皆是虛妄)
20.강 무지역무득(凡所有想 皆是虛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소승 수행자에게 대승 수행자인 관자제보살이 비판하여 바로잡고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지혜(깨달음)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그 어떤 실체도 없고 그러므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할 것도 없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상대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자기가 상대를 나쁘다고 한 생각을 일으켜서 움켜쥐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상을 짓고 있는 거다. 이것은 사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내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관을 객관화 시켜 버린다.
내가 파란색의 안경을 끼고 하얀색의 벽을 보니 저 벽이 푸르게 보인다. 그럴 때 저 벽이 푸르다고 하는 것과 같다. 푸른 것은 나의 안경(나의 업식)에 의해서 나에게 그렇게 보인 것이지 그 벽이 푸른 색깔은 아니다. 그것처럼 남편이 술을 먹는다고 당신은 나빠 할 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술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내 생각대로 안되니까 내가 그 사람을 나쁜 인간이라고 내가 한 생각을 일으키고 그 ‘상’을 지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에 내가 그 나쁜 사람을 알았다는 식으로 우리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그 사람이 크게 반성을 하고 나한테 용서를 빌어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늘 사로잡혀서 세상이 그렇다고 보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던 사람이 그 강도로부터 나를 구해달라고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 비는(기도하는) 것과 갔다.
부처님의 본래의 가르침은 바로 그 꿈에서 깨는 것이다.
이것이 꿈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꿈에서 깬 뒤에 그것은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였고 ‘사로잡힘’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꿈 속에 강도가 있어서 깨면 강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도는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게 다 한 생각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까 ‘무지’로부터,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텅 빈 줄을 알았다. 이것은 헛것이고 내가 이것을 진짜인 줄을 알고 그 동안 집착을 했는데 알고 봤더니 가짜다.
그래서, 그 가짜를 벗겨보니 진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뭐가 없으면 허전하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無我가 제대로 이해되기 어렵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我는 가짜(假我)다 그래서 알고 봤더니 그 속에 진짜(眞我)가 있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아’를 발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럴까? 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집착을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가짜’더라. 이 ‘가짜’라는 말은 ‘가짜’와 ‘진짜’의 반대말이 아니다. 이 ‘가짜’는 ‘없는 것’이더라는 말이다. 텅 빈 것이더라. 凡所有想 皆是虛妄(범소유상 개시허망)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말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허망=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일체 ‘함’이 있는 법은, ‘상’이 있는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我라는 것은 없다. 앞은 ‘무아’이고 뒤는 ‘무상’이다. 그러니 모두가 ‘공’이다. 텅 비었다. 있는 것 같지만 알고(자세히) 봤더니 없더라. 그래서 허망하다고 말한다. 귀신을 보고 놀랐는데 사실은 귀신이라는 것은 없더라. 헛것을 봤더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만약에 상이 아님을 본다면, 그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금강경 사구게 (金剛經 四句偈)
1.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非相 卽見如來 (법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2.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基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3.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 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색신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4.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 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우리는 상대편이 있으면 그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을 통해서 본다. 상을 그려서 본다. 이러한 상(gap)이 크면 클수록 실망을 하게 된다.
또한, [나는 이런 인간이다]하고 자기가 자기를 그린다. 대부분 자기를 좋게 그린다. 그런데 현실의 자기는 자기가 봐도 좀 실망스럽다. 그래서 너무 잘난 척을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열등의식이 있다. 현실의 자기를 보면 열등의식이 있고 자기가 그린 상으로는 잘난 척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을 다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기를 세우고 어떤 때는 기가 죽는다. 이 갭(gap)이 크면 클수록 자기가 부끄러워진다. 자기는 자기를 너무 잘 그려놨는데 현재에 있는 자기는 말도 좀 신통찮고, 노래도 잘 할 줄 모르고, 거울을 보니 얼굴도 별로 안 예쁘고 이래서 이게 너무 실망이 크다. 그래서 자기 ‘상’과 현실의 자기 사이에 갭이 너무 크면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이 커지면 보기 싫어지고 그래서 문닫고 밖에 안 나간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가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주로 혼자 있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런 못난이는 없애버리는 게 낳다. 죽어버리는 게 낳겠다.”고 생각해서 자살로 간다. 내가 그린 것과 상대 사이에 갭이 커지면 상대를 실망하고 상대를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보기 싫고 안 보려고 한다. 그래서 헤어지면 되는데 안 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안보는 방법은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살인이다. 그래서
자살과 살인은 동일한 것
이다. 그래서 살생하지 마라는 말은 살인도 안 되고 자살도 안 된다. 본인에게나 남은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자살이 업보가 더 크다. 일체중생을 위하여 내 한 몸을 던지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이것은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고 자살은 정신병에 속한다. 생명경시의 세상에서는 살인도 늘지만 자살도 늘어난다. 이렇게 우리는 착각을 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잘 못 이해해 가지고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찾는다. 이것은 ‘유아’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무아사상도 아니고 공사상도 아니다. 그래서 여기 착각을 하지 마라. 無智 亦無得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한다.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야 한다. 한 생각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를 자꾸 얻으려고 한다.
깨우침은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놔버리는 것이다.
[내 것이다]하고 봤더니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고,
[나다]하고 봤더니 나라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고,
[내가 옳다]했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옳다 할 것도 없더라.
이것이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다.
이것을 깨쳐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와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돈에 집착을 한다. 권력에 집착을 한다. 명예에 집착을 한다. 인기에 집착을 한다. 그래서 기필코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기에는 내가 있고 내 것이 있고 내가 옳은 게 있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에 빠져있다. 우리가 이러한 본질을 꾀 뚫어 보면 이 집착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도’를 어떻게 구하는가?
‘도’를 돈 구하듯이 구한다.
도라는 것이 있고 돈이 있듯이 어떻게 해서든 고생 고생해서 도를 얻는다. 도를 깨닫는다. 도를 얻는다. 이런 식의 도를 구한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어서 30년 사업을 했는데 부자가 못됐다. 그러면 실패한 것이고 두 다리 뻗고 운다. 출세하려고 마음을 먹어서 30년 지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안됐다. 그러면 실패한 것이다. 연예인이 되어서 인기를 얻으려고 했는데 못했다. 그러면 절망에 빠진다. 그것처럼 그런 관점에서 도를 구한다. 내가 수행을 해서 도를 깨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지만 도를 못 얻었다. 그러면 다리 뻗고 운다. 한탄을 한다. 그 때의 ‘도’는 ‘돈’과 다를 바가 없다. 포장이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30년이 지났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수행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놔버리는 것이다. 텅 빈 줄을 아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데 괴롭다면 왜 괴로운지 보고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서 바로 놔버리면 번뇌가 사라지고 괴로움이 사라져 버린다.
스님 요즘 괴롭습니다. 수행이 잘 안되어서, 애가 말을 잘 안 들어서, 남편이 말을 잘 안 들어서, 아내가 말을 잘 안 들어서 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안되어서 괴롭다고 한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지 수행이 안 되어서 괴롭다고 할 때 수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의 수행은 절, 좌선, 염불, 공부, 호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수행이라고 하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에 ‘상’에 집착하여 괴로움이 생길 때 그 본질을 꾀 뚫어보고 그것을 놓아버릴 때 자유로워지는 것을 보고 이름하여 수행이라고 부른다.
수행이 안 된다고 말할 때, 수행이라는 ‘상’을 짓고 그것에 집착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수행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나 많다. 돈병, 출세병, 인기병에 걸리듯이 도를 얻으려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출세를 하려고 온갖 것에 줄 서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방황이다. 바로 자기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도를 밖으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티벳, 미얀마, 미국…구하러 다닌다. 그런데 구할 것이 없는 줄을 깨쳐야 되는 것이다.
無智 亦無得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모든 집착에서 놓여나야 된다.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뭔가 움켜쥐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소승교설의 잘못됨(법상, 법집)을 지적하여 비판하고 본래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 오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구조는
1. 대승의 진실(제법이 공한 도리)을 가르치고
2. 그 관점에 봤을 때 소성의 법집을 비판한다.
3. 대승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대승의 핵심을 말할 때의 주인공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여서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만 그렇게 하느냐? 아니다.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수행한다. 그래서 여기에 ‘보리살타(菩提薩埵)’가 들어가고 엄격하게 말하면 앞에 諸자가 붙어야 된다. 제보살은, 제보리살타는, 모든 보살마하살은, 모든 대승보살은 이렇게 수행을 해서 이렇게 깨달음을 얻는다. 보리살타(bodhisattva 보디사트바의 음사인 보리살타의 준말이 보살이다. Bodhi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 지혜, 불지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衆生, 有情을 뜻한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 또는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는 발심한 자, 발보리심한 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한 자, 위 없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한 마음 낸 자, 그런 선남자 선녀자를 보리사트바라고 한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모든 보살들도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그런 수행을 한다.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무지를 깨쳐서 바로 해탈해 버리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行深般若波羅蜜多時를 줄여서 依般若波羅蜜多-故라고 했다. 표현만 다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확 깨쳐버리니까 마음의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강도에 쫓기던 사람이 꿈에서 깨니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마음에 걸림이 있으므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여래(부처님)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셨다. 그것은 마음의 분별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예쁘고 못나고 젊고 잘하고 못하고 온갖 분별을 일으켜서 그것에 집착을 한다. 그래서 가지려고 하고 싫으면 버리려고 한다. 우리들이 일으키는 이 분별은 마음이 죽 끓듯이 한다. 조금 마음에 들면 우리는 전생에 천생연분이었구나,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우리는 전생에 원수였구나하고 늘 왔다 갔다 한다. 늘 분별에 끄달린다. 부처님은 그런 분별이 없다.
부처님이 어떤 바라문집에 걸식을 하러 갔을 때 그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욕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대들거나 할 텐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셨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괴로움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전도몽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전도몽상에 있는 것은 경계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헤까닥 해버린 것이다. 말에 끄달리고 모양에 끄달려서 눈이 확 뒤집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나쁜놈]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쁜놈인가 내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때 나의 분별이 저 사람은 나쁘다고 내가 그런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한 생각에 사로잡히니 그 놈이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遠離顚倒夢想 이 무지로부터 깨어났다. 照見五蘊皆空과 같은 말이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봤다. 그래서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마침내 니르바나(열반)에 이르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서 제법이 공함을 깨닫고 열반에 들 수 있다. 대승보살은 반드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보살만 그런 것이 모든 부처도 다 그렇게 수행을 했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걸림)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없다)뇩다라(위)삼먁(올바른)삼(넓음)보리(깨달음); 이 위에 다시없는 올바르고 두루한 깨달음의 지혜
(시방)삼세제불; 온 우주(온 공간)를 통틀어서, 온 누리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과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을 온통 통틀어서,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에 이르도록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들. 시방(동서남북사유상하)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 이 우주, 이 세계가 반드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데에서 어떤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머무른다. 그리고 흩어져서 사라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세계가 성립되는 지극히 긴 기간인 성겁(成劫), 머무르는 기간인 주겁(住劫), 파괴되어 가는 기간인 괴겁(壞劫), 파괴되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기간인 공겁(空劫)을 말함. 과거에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졌던 대겁을 과거세라고 한다.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흩어져서 사라진다. 현재세, 현겁. 미래에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진다. 미래겁, 미래성숙겁 (未來星宿劫). 주겁 때 생명이 탄생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산스크리트어 anuttarā-samyak-saṃbodhi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 anuttarā는 무상(無上), samyak은 정(正)•정등(正等), saṃbodhi는 각(覺)•등각(等覺)•정각(正覺)•변지(遍知)•변도(遍道)•진도(眞道)라고 번역. 곧,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
무상정등각 (無上正等覺), 무상정등정각
무상;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최고로 높다. 절대적
정등; 바르고 평등한, 보편 타당하다.
바르고; 객관적 진리, 타당하다.
평등한;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된다.
보편 타당한 진리 중에서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앞에 보살들에게 얘기할 때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했다면 법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합해서 여기서는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한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똑 같은 설명이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이 세상에 최상의 수행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