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반야심경 총정리 1
24.강 반야심경 총정리 1
Q & A
Q 기본토대(업식)가 없다면 여러 정보가 들어왔을 때 반응이 없지 않을까?
A 똑 같은 정보를 본 5명의 사람들이 받아들인 정보는 똑 같은가?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좀 더 엄밀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람마다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비유를 들면, 똑 같은 벽을 보는 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안경에 색깔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색깔의 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약간의 다른 색깔을 업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느낌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고, 판단도 다르다.
아무 욕심이 없어도 이런 일이 생긴다. 순수해도 그렇다. 그리고 또, 여기에 사람마다 욕심이 있다고 하면 욕심으로 인해서 사물이 달리 보인다. 두려울 때와 두렵지 않을 때, 기분이 나쁠 때와 기분이 좋을 때, 똑 같은 소리라도 달리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각각 자기 업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 현재 이전의 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 업식은 선천적이다. 전생으로부터 왔다. 이것이 나의 본질이다. 이것을 자아라고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형성된 거라고 한다. 선천적이든, 전생으로부터 왔던, 나의 본질이든, 이것이 현재에 작용하는 것은 같다.
본래부터 있었던 거는 현재 내가 바꿀 수가 없다. 형성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형성된 것은 맨 처음에 없었다는 거다. 여기서 없었다는 거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건가?
예를 들면, 담배 피우는 업식이라는 것은 담배 피는 업식이 없었다는 소식이다. 그때는 딴 업식은 있었지만 담배 피는 업식은 없었고 지금은 그때 있었던 업식은 없어지고 또 담배 피는 업식은 있다. 담배를 끊으면 그건 없어지지만 또 다른 업식이 생긴다. 이렇게 업식은 수백만 가지로 뭉쳐진 거다.
만약에 이것이 다 없어졌다면 반응이라는 게 없다. 그러나, 이거는 있다. 있는데 이게 변해간다. 형성되고 사라진다. 그러니까 이 반응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소멸시켜야 된다. 그러나 이 반응이 다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저 놈 나쁜 놈이다고 하는 분별 업식은 없애는 게 좋다. 그게 나한테 행복하다. 업장소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릴 때 받은 상처(트라우마)는 없는 사람이 반응하는 거하고 있는 사람이 반응하는 거하고는 천지차이다. 학벌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은 학교 얘기를 하면 아주 격렬하게 반응을 한다. 그러나, 없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현실의 인간은 어떤 업식이 있던지 있다. 아무런 업식이, 반응이 없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에 우리가 고통을 가져오는 업식을 소멸하면 우리가 고통이 안 온다는 말이다. 이것 때문에 저 벽 색깔이 다르다는 견해를 알면 다른 사람과 다툴 필요가 없다. ‘아~~~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게 보이겠구나’ ‘저 사람의 견해는 저렇구나’하고 내가 이해가 된다. 내가 이해가 되면 내가 안 괴로워지고 그게 이해가 안되면 ‘저 사람은 도대체 눈을 가지고 있나? 안 가지고 있나? 눈이 삐었나?’ 내 가슴이 답답해지고 속이 터지려고 한다. 숨이 막힌다.
남편과 아내가 얘기할 때, 숨막힐 때가 있다. 이것은 상대의 이해 부족이다. 결국, 내가 괴로워진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내가 괴롭지도 않고 갈등이 안 생길 수 있다. 그러면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고 색깔을 통일시킬 수도 있다. 또, 싸워가면서 갈등을 일으켜 가면서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 내가 괴롭고 힘들어진다.
갈등 없이 괴로움 없이 그렇게 해볼 수는 있다. 그냥 놔둘 수도 있고 해볼 수도 있는데 이건 의지 문제다. 놔두면 좋다. 이게 수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대승불교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승불교는 어느 쪽으로 나아가는 원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괴로워하면서 끌고 가면 세속이 되고, 괴로움 없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고집하면 내가 괴로워진다. 견해가 다르구나를 내가 이해하면 그럴 수도 있다. 견해다 다르면 내가 그의 견해를 따라 갈 수도 있지만 상대를 설득해서 돕도록 할 수 있다. 견해나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여기에 원력이 따라야 한다. 한 두 번 해보고 안되면 괴로워하고 좌절하면 욕심, 자기견해의 고집이고 괴롭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꾸준히 변경해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원력이 된다. 그래서 이 업식이 다르다고 한다.
다섯 명의 일란성 쌍둥이가 모두 다른 곳에서 자라면 모두 다른 사람이 된다. 모양은 같지만 업식이 다르다. 만약, 이 아이 중 하나가 늑대우리에서 자랐다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인류로서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정신적으로 하나도 안 가지고 있다. 인류로서의 인간성은 부모로부터 받는다. 안겨서 키워지며 커면서 각자 부모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진다.
그러면 개새끼와 아기를 똑같이 사람의 품에서 키우면 같을까? 다르다. 똑 같이 키웠는데 왜 다를까? 이거는 생물의 종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드웨어가 다르다. 같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달라서 다르고 이거는 컴퓨터의 종류가 다른 거다. 그래서 같은 아이를 같은 부모에게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다르다. 같은 집에서 자라도 다 다르다.
유전자의 조합에 따라서도 다르다. 한 아이는 아버지의 코와 어머니의 눈을 닮고, 한 아이는 그 반대가 되면 생긴 것도 달라진다. 그래서 형제라도 다른 거다.
카르마(업식)도 다르다. 첫 아이가 자란 환경과 두 번째 아이가 자란 환경은 다르다. 그래서 성격도 달라진다. 일란성 쌍둥이를 같은 집에서 똑같이 키웠다고 하더라도 생물학적 유전자가 조금만 달라도 같은 프로그램을 넣었지만 조금 달라지는 거다. 그래서 조금씩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를 다른 집에서 키운 것과 다른 아이를 한집에서 쌍둥이처럼 똑같이 키운 것 중에 어느 것이 성격의 공통점이 많을까? 한집에서 자란 아이들의 공통점이 훨씬 많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심느냐가 핵심이다.
천재가 되고 안되고의 유전인자적인 요소는 아주 적고 프로그램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해서 이 업식을 수정하자는 말이다. 수정을 하면 사람은 훨씬 훌륭한 인격이 된다. 인류로서 인간은 마음이지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면 인상도 좋아진다. 그리고 얼굴이 아주 예뻤는데 마음이 안 좋으면 나중에 형상이 바뀐다. 이렇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부부도 오래 같이 살면 닮아간다는 말은 성격도 닮아가니 외모도 달라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행정진을 해야 된다.
Q 6근에 ‘안이비설신의’에서 ‘의’도 감각기간인지? 6식의 의식과는 어떤 차이?
A 12처설에는 주관과 객관을 크게 나눈다. 인식의 주체는 6근이라고 하고 인식의 대상을 6경이라고 한다. 6근에 ‘안이비설신의’가 있고 6경에는 ‘색성향미촉법’으로 나눈다. 여기서 인식의 기관의 ‘안’이라고 했을 때, 눈만 말하는 게 아니고 인식의 주체까지 포함이 된다. 즉, 보는 작용도 포함이 된다. 눈만을 봤을 때는 똑 같은 것을 봤을 때 똑 같은 결과나 나타나야 되는 데 실제로는 보는 작용이 좀 달라진다. 인식하는 주체를 식이라고 해서 ‘안식~의식’까지를 또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18계설이 된다. 12처설의 ‘의’는 ‘의근’과 ‘의식’까지도 포함하는 ‘의’를 말하는 것이고 18계설의 의는 각각(의근, 의식)을 말한다. ‘의근’은 머리(뇌)를 말한다면 그것의 작용이 ‘의식’이다.
Q ‘수’에서 알아차림이 있어야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A 알아차림이라는 작용이 함께 있다. 우리들의 느낌은 항상 일어나고-사라지고-일어나고-사라진다. 우리가 알아차려도 일어나고-사라지고, 알아차리지 못해도 일어나고-사라진다.
알아차림은 일어나고-사라진다는 것을 안다는 얘기고,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일어나고-사라지는 것을 모른다는 얘기다.
일어나고-사라지는 것은 무상을 말하는 거고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은 무상의 원리를 아는 것이 되고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은 무상의 원리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가 아니고 “일어나고-사라짐을 알아차린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말은 맞다.
그러면 “알아차리면 사라진다”는 표현은 왜 썼는가? 이런 요인도 있다는 소식이다. 이를테면 내가 화가 났는데 내가 화난 줄을 모르면 화가 오랫동안 지속이 된다. 그런데 내가 화가 났을 때, ‘어! 내가 화났구나.’하고 알아차리면 화남이 사라진다. 알아차려도 화남이 유지될 때도 있다. 화라는 것은 [내가 옳다고 했을 때] 화가 나는가? [내가 잘못했을 때] 화가 나는가? 내가 옳다고 했을 때, 화가 난다. 화가 크게 났다는 말은 내가 옳다는 강도가 굉장히 강하다. 상대편이 잘못했다는 강도가 굉장히 강할 때 화가 크게 일어난다. 상대가 진짜로 잘못했다고 할 때는 눈에 뭐가 안보일 정도로 화가 일어난다. 조금 잘못했다고 했을 때, 화가 조금 나거나 짜증 정도가 난다.
이 때, 부처님의 본래 법에는 옳고 그럼이 없다. 즉, 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일으켜 그기에 내가 사로잡혀있다. 그것이 확 쏠려가 100% 옳다는 데 쏠려버렸다. 그 때, ‘내가 옳다는 데 사로잡혀 있구나’하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차려버리면 확 없어져 버린다. 근데, 내가 옳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있구나라고 내가 옳을 뿐이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모른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주장을 하니까 틀렸다고 하니까 화가 불같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하나의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는 것까지 싹 갈아버리면 (화는) 없어진다.
확 사로잡혔을 때, 내가 사로잡혔다는 생각이 들까? 안 든다. 내 문제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 네 문제라고 생각하지 내 문제라는 이런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러니 이렇게 정확하게 알아차림이 없으면 지속이 된다.
질문의 ‘수’는 느낌이다. 느낌은 지속되지 않는다. 느낌은 일어났다-사라지고 일어났다-사라진다.
느낌은 알아차렸다고 사라지고 안 알아차렸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는 알아차리든 안 알아차리든 순간순간 일어나고 순간순간 사라진다.
그러면 느낌이 일어나고-사라짐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되는가? 느낌이 일어나고-사라지기만 할 뿐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부싯돌은 번쩍이면서 저절로 꺼진다. 그런데 옆에 솜이 있으면 옮겨 붙는다. 그러니까 이게 ‘수’에서 ‘애’로 옮겨 가버린다. 좋은 느낌을 알아차리면 좋은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좋은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은 느낌은 곧 좋아함으로 ‘갈애’로 옮겨 가버린다. ‘욕’으로 올라가 버린다. 하고 싶은 거로, 갖고 싶은 거로 옮겨 가버린다. 그러면 이게 커져간다. 불꽃이 번지듯이……
그래서 알아차리면 옮겨가지 않는다. 일어나고-사라짐을 알아차리면 다만 일어나고-사라질 뿐이다. 이 ‘업식’이 있으므로 업식의 반응으로 일어나고-사라질 뿐이지 ‘갈애’로 옮겨가지는 않는다. 애욕과 혐오로 옮겨가지 않는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옮겨간다. 맹목적 충동으로 옆으로 나아가버린다. 그러면 욕구가 일어나고 그러면 가지려고 하는 행위(취)가 일어난다. 그러면 열매가 맺는다. 즉, 새로운 업이 형성이 된다.
과거 ; 무명(지)-행(위; 말, 행동)
현재 ; (업)식(;씨앗)-명색(몸)-육입(마음)-촉(접촉)-수(느낌; feeling)-애(갈애)-취(취착; 말이나 행동으로 옮김)-유(존재)
미래 ; 생-노사
그와 같이 애도 우리가 알아차리면 그기서 멈출 수가 있는데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것이 계속 커져나간다.
Q 깨어 있다는 것은 그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닌지?
A ‘알아차린다’하면 알아차리는 주체가 있다. 로보트나 센스가 있는 기계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알아차린다. 그런데 그게 알아차리는 실체가 있는가? 그 알아차리는 실체는 프로그램이다. 센스에 내장된 프로그램이 그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기계자체도 그렇게 만들어져야 하지만 프로그램이 없으면 감지를 못한다. 육신이 있지만 육신만 가지고는 감지가 안 된다. 프로그램=업식=정신작용이 있어야 된다. 코드를 뽑아버려도 감지가 안되고 기계가 작동을 안 해도 감지가 안 된다. 육신이 죽으면 감지가 안 된다. 육신=기계가 있어도 기계 속의 프로그램=센스를 삭제하면(뽑아버리면) 감지를 못 한다. 그래서, 감지하는 센스의 주체는 있는데 그 주체라는 게 自我는 아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업식이다. 업식은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성된 거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은 있다. 그러나, 그 작용하는 것이 自我라고 할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소식이다.
Q 지금 깨어 있다는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떻게 깨달은 줄 알 수 있을는지?
A 우리는 지금 깨어있지 못하면서 깨어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깨어있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깨어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깨어있다고 할 때도 그것이 어떻게 깨어있는지 깨어있지 않은지 구분을 합니까? 이런 질문이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는 상태, 이를테면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태양을 생각하고 전깃불을 생각하고 촛불을 생각해도 실제로는 안 밝아진다. 그런데, 눈을 뜨면 촛불이면 촛불만큼 밝아진다. 태양이면 태양만큼 밝아진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자기 마음을 보면,
이 생각으로 깨달음을 아무리 생각을 해도,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육조단경을 읽고, 불교가 이런 거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고뇌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훤히 밝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조금 기분은 좋지.
그런데 [깨달음의 장]같은 데서 뭔가가 꽉 막혀있다가 한 꺼풀이 탁 벗겨지면, 남편 술 먹고 오는 거, 바람 피는 거, 애 공부 안 하는 거, 이런 거 가지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걸 놔놓고 내가 어떻게 외면한다고 안 괴로울 수가 있는가?’ 이러다가 어느 순간 탁 한 꺼풀이 벗겨지면, 그것이 아무 문제도 안 된다. 그냥 길을 가다가 소나무도 보고, 감나무도 보고, 대추나무 보듯이, 그냥 컴퓨터 하면 컴퓨터 하고, 술 먹으면 술 먹는 거고, 그냥 하나의 일상처럼 보이면서, 내 마음속에 있던 어떤 마음의 무거운 짐이라고 할까 그런 것도 없어지고, 어두움이랄까 이런 것도 없어지고, 그냥 마음이 아주 가뿐하고 기분이 사~악 좋은 거다.
그러니까, 내가 깨어나냐 안 깨어나냐 하는 것은 수행자는 자기 점검이 된다. 그걸 항상 ‘완전히’ 이런 말을 자꾸 붙이니 이게 어려워 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오해가 탁 풀렸을 때, 마음이 답답하던 것이 시원해진 것과 똑같다. 뭔가 가려있던 것이 탁 벗겨지면 눈이 환해지듯이 확 좋아진다.
근데, 눈을 떠서 밝더라도 눈을 감으면 어두워진다.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다시 어두워진다. 한 번 눈을 뜨면 영원히 눈을 안 감는다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눈은 감기기도 하고 뜨기도 하는 건데 눈을 떠본 사람은 어두우면 불 켜는 행동만 하지 않고 눈뜨는 것도 같이 겸한다. 눈을 떴는데도 어두우면 불을 켜지만 가끔은 불을 켜놨는데도 자기가 눈감고 자꾸 어둡다고 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한번 눈떠본 사람은 자기를 향해 돌이킬 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하다가도 어! 내가 또 사로잡힌 지도 모른다. 옛날에 그랬다. 그래서 금방 확 돌이켜 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혔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확 눈을 떠 버린다.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몇 번 꾸다 보면 꿈 속에서도 꿈일지 모른다는 경험이 있을 거다. 잘 안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런 것처럼 도망가다가 아! 꿈일지도 모른다 해서 눈을 뜨는 쪽으로 확 바뀌어버린다. 그래서 수행정진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눈을 감은 경우가 있을 때, 촛불을 켜려고 하다가 눈을 확 떠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정진을 하게 되면 자기의 기쁨을 늘 간직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 늘 전깃불 켜고 촛불 켜고 늘 해결책인 줄 알았는데 내가 눈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눈을 떴을 때, 상대를 두고도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다. 그 괴로움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면 안다. 남한테 물을 것도 없고…
그런데 가끔은 꿈속에서 깼다는 꿈을 꾸듯이 그것처럼 우리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깼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자기는 깨달았다고 착각을 한다. 깨달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 중생의 병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다. 어리석은 중생은 깨달을 수가 있지만 깨달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리면 깨달을 생각을 내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이래되면 이것이 사도, 외도가 되는 거다. 이 세상에는 깨달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모르게 깨달은 자 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자기를 속이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냥 거짓말쟁이에 불과하고 자기까지도 속아버리는 자가 사이비교주가 되거나 혹세무민을 하거나 그래서 자기도 어리석음에 빠지고 남도 어리석음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제일 유의해야 된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거짓으로 깨달았다고 하지 마라. 원래 거짓말 하지 마라는 그기서 나온 거다. 세상적인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고. 수행자가 눈을 뜨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은 척하는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라. 이건 자기를 엄청나게 헤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