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반야심경 총정리 2
25.강 반야심경 총정리 2
Q 깨달음의 수행은 불교에만 있는가?
A 다른 종교에도 있다. 어찌 불교에만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종교는 불교처럼 깨달음을 제1목표로 삼지는 않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을 가장 중요시한다.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현상, 이것을 중요시 한다. 물론 불교도 이런 요소가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요소보다는 깨달음을 통한 완전한 해방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일부 불교종파나 일부 믿음을 통한 기적(가피력), 이거를 주장할 뿐이다. 다른 종교들은 다 믿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 여기에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자기변화, 자기성찰이 그 일부분으로 따라 오고 있다. 이것이 최고 목표는 아니다. 이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 자기성찰을 통한 깨달음, 뉘우침(깨달음의 일종)이 있다. 다른 종교에도 믿음을 제일 중요시하지만 뉘우침, 자기성찰,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나 딴 종교의 사람 중에도 불교에 있는 스님보다 인격이 더 고상한 사람이 있다. 불교는 깨달음을 최고로 치지만 사실은 실제로는 깨달음을 최고로 안하고 다른데 세속적 가치를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불교 안에서 그런 고상한 인격이 안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요소가 다 있는데 종합해서 볼 때, 불교는 자기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그러므로 인류의 스승이 될만한 참으로 나를 넘어서고, 민족을 넘어서고,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그런 가치, 그런 안목,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은 불교 수행자 중에 제일 많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위한 헌신, 나라를 위한 애국, 이런 수준에서 보면 꼭 불교가 아니라도 많은 가르침 속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자연까지도 생각하는 이런 가르침이 별로 없다. ‘살인하지 마라’고 하지, ‘살생하지 마라’고 하지 않는다. 내 민족 또는 많이 커야 인류 정도이지 그기에 만 중생 이런 관점의 폭이 적다. 그래서 뭘 해도 자기 종교나 어떤 민족적인 울타리 안에 갇히기가 쉬운데 비해서 수행자는 그런 울타리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스님들도 민족주의에 이런데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종파주의. 그렇다. 그러니까 그것은 불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는 최고다 다른 종교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그러나,
불법과의 차이는 알아야 된다.
그것을 어느 정도 연마하느냐에 따라서 그기까지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원래 불법의 가르침에 선다면 종교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이런 거 가지고 논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자기 성찰을 통해서 얼마나 자기 행복을 가지고, 넓은 안목을 가지고, 높은 안목을 가지고, 고상한 인격으로 자기가 나아가느냐 하는 게 중요하고 그것이 비록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종파의 사람이라도 그런 인격이라도 우리는 존중해야 된다.
Q 불교의 윤회사상은 믿어야 하는 건지?
A 불교에서는 믿어라 믿지 마라 이런 얘기 안 한다.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고, 믿어지면 믿고 안 믿어지면 안 믿어도 된다.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불교는 뭐로부터 출발하느냐? 자기 현주소로부터 출발한다. 지금 내가 괴롭다. 그래, 지금 내가 괴롭구나. 내가 지금 번민이 많구나. 부부간의 갈등이 있어서 번민이 많다. 자식 때문에 번민이 많다. 돈 때문에 번민이 많다. 건강이 안 좋아서 번민이 많다. 뭔가 나한테 괴로운 번민이 있다. 그럼 이게 좋은 거냐? 안 좋다. 해결해야 될 거냐? 해결해야 된다. 여기로부터 출발하면 된다. 뭘 믿고 안 믿고 이런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이러한 번민의 원인이 뭘까? 이걸 찾아야 된다. 애가 공부를 안 해서, 남편이 술을 먹어서, 돈이 없어서, 근데 이거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잘 못 찾았기 때문에 해결도 안되고 해결 되도 문제가 안 풀린다.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이 뭘까?
왜 괴로울까? 왜 괴로울까? 왜 괴로울까?
왜 화가 나는가? 왜 화가 나는가? 왜 화가 나는가?”
이렇게 근원을 추구해 들어가야 한다.
근원을 추구해서 들어갈 때 우리는 그 괴로움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이게
자기성찰
이다. 자기성찰이라는 게 혼자서 나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다.
이 苦의 원인이 뭔가? 근데 혼자서 하면 이거 두 번 세 번 들어가다 더 이상 안 들어가진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
한 거다. 아주 집요하게 근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된다.
Q 眞我란 어떤 것인가? 眞我란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 하는 것들을 다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각성이라고 알고 있다. 스님은 眞我와 自我가 따로 있고 眞我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 실제 하는 것은 오직 眞我 뿐이며 이 眞我는 단순히 보이는 대상 즉 객관과 분리된 보는자 곧 주체가 아니라 그 둘을 포함한 순수의식이라고 하였는데 眞我라는 게 없다는 게 스님의 견해라면 그것이 왜 그런지 궁금하고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의식상태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해하는지 어떻게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A 우리의 意識이 작용할 때, 보면, 분명히 여기는 ‘작용하는 주체’, ‘보는자’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다. 보는자를 主觀이라고 하고 보이는 대상을 客觀이라고 말을 한다. 그럼 지금까지는 보는자를 自我라고 말을 했는데 사실은 이 自我라는 것을 자꾸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해보니까 自我라고 생각했던 게 自我가 아니다. 이게 실제로는 없는 거다. 假我다. 그래서 자꾸자꾸 추적해 들어가보니까 그기에 가짜 자기를 양파껍질을 벗기듯 다 벗기고 나니까 이게 실제 아니더라. 나라고 했던 것이 내가 아니더라. 그래서 결국 마지막 안에는 뭐가 있느냐? 그기에 순수의식인 眞我가 있더라. 지금 이 질문은 이런 논리다. 그래서 우리의 과정은 그 眞我를 찾는데 있다고 하는 이런 얘긴데……
우리는 우리민족이라는 말을 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의 안에 들어오는가? 다 들어온다. 우리가족 할 때 아내와 남편은 다 들어온다. 우리민족 할 때 그때의 인식이 전부가 ‘나’이다. 그런데 우리가족 할 때 딴 사람은 ‘남’이다. 아내나 남편, 자식이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나’ 하면 아내나 남편은 ‘남’이 돼 버린다. 그래서 이
我라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의 인식의 상태에서 형성되는 것
이다. 이게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차를 타면 승객이 된다. 승객이라는 주체가 없다. 그렇게 규정되는 거다. 가게가면 손님으로 규정되고, 엄마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거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실은 그때그때 규정-되어-지는-것이다.
근데 어떤 규정이 오래가면 어떤가? 그것이 자기인줄 착각하게 된다. 애들 키우는 엄마노릇을 오래하면 엄마라고 착각을 하고, 아내노릇을 오래하면 아내라고 착각을 하고, 선생노릇을 오래하면 선생이라고 착각을 한다. 스님노릇을 오래하면 자기가 스님이라고 착각을 한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때그때 의식이 규정-되어-진다.
그래서
작용은 있다. 경계에 부딪힐 때 마다 어떤 작용은 있다.
그러나
그 작용의 주체가 그때그때는 주체가 있다.
그러나
항상 하는 주체, 언제나 하는 주체 그런 게 과연 있는가?
그래서 이것도 이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은 본래 없는 거야. 사성제를, 고집멸도를 외우고 있어도 우리의 괴로움은 안 없어진다. 그러나 스승을 만나서 왜 괴로운지를 계속 질문을 해서 우리의 알음알이가 다 끊어지고 백척간두에 서서 그기서 스승이 등 떠밀어서 더 밀어내면 안 떨어지려고 모르겠다고 발버둥치다가 그기서 넘어가버리면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이르는 것처럼 이런 얘기 10,000번 하는 것보다 스승이 우리에게
“너는 누구냐?” 이렇게 물었을 때,
“네가 말하는 내라고 하는 것이 누구냐?” 하고 물었을 때,
이거다 저거다 이거다 저거다 하고 나가다가 이제까지 내가 아는 아까의 假我가 다 떨어진다.
알음알이가 다 끊어진다.
부처님 말씀을 인용해서, 경전 말씀 인용해서, 禪 문구 인용해서, 온갖 소리를 해도 이제 더 이상 못 가는(?) 알음알이가 다 떨어지면 그 다음에
“네가 누구냐?” 하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우리의 이 과제는 주로 여기서 끝이 난다. 여기서 안 넘어가진다.
여기서 더 등 떠밀어서 한풀 넘어가버리면 우리에게 행방이 온다. 자유가 온다. 기쁨이 온다. 그기에 무슨 眞我니 假我니 自我니 뭐니 이런 말이 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니까 진실한 나가 있더라 다이아몬드 같은 내가 있어서 드디어 나를 찾았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이건 깜깜한 무소식이다. 하나도 모르는 소식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지어서 하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했던 거는
“말로 표현해서 나라고 할만한 게 없다”
얘기만 했지 眞我니 假我니 이런 말은 한적이 없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까 “眞我는 있어야 되는데 왜 眞我는 없다 그럽니까? 스님이 眞我를 없다고 하는 것은 견해가 다릅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
나의 얘기는 眞我니 假我니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것이 뭐라고 하든 ‘불변의 요소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점검해 들어가보면 그렇다고 주장할 만한 것은 없다” 이런 얘기까지만 내가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그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왜? 그거는 그런 것이 없는 줄을 알아버린 경지에 가면 우리는 기쁨이 온다. 훤해져 버린다. 그기서는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런 의문이나 번뇌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거는 알음알이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제 이런 질문도 하고 또는 우리가 토론도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통의 브라만들이 “우리에게서 고요한 영혼이라고 하는 아트만이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런 존재는 있지 않다” 이렇게만 말씀하셨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즉,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은 惡人입니다. 저 사람에게 惡性이 있습니다. 이럴 때 “惡性은 없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인연을 따라서 그런 작용이 있지 그 사람에게 惡性이라고 하는 성품은 없다.” 이게 無我다.
독이라고 하면 여기에 독성이 있다고 보통 말한다. 그러나 독성은 없다. 그런 물질이 그 작용을 할 때 독으로 작용을 하지 독성은 없다. 독성이 있다면 그건 약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물질이 약으로 작용할 때가 있는가? 있다. 그러니까 약이라고 이름하고 독이라고 이름하지 존재에는 독도 약도 없다. 이게 원래 無我의 개념이다.
-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가서 -
Q 眞我가 없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이다.
A 나는 “眞我가 있다 없다”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본인이 “眞我가 있다”고 하니까 내가 “그런 것은 없다”라고 본인이 들렸겠다.
Q 眞我의 유무를 떠나서 主觀과 客觀이 분리되지 않는 순수의식상태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스스로가 관찰자의 主觀이며 외부 사물을 客觀이라 하며 두 가지를 항상 나누어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와 타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보는 가운데 내가 잘 못 안 건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면 나와 타자와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 외부 사물을 어떻게 보는 건가? 스님의 가르침을 부탁 드린다.
(기록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지만, 가르침의 의미하는 바의 중요함에 치중하여 존칭은 생략하고 사투리 같은 어조사나 어미는 나름 표준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다.)
A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거 하고 “나라고 순간순간 인식-되어-지는 것이 있다”는 거 하고는 별개다. 우리는 언제나 순간순간 나라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있는가? 있다. 늘 작용을 한다. 그기에 잘 살펴보면 사실은 그렇게 순간순간 인식되어-질 뿐이지 그기에 뭔가 실체가 있어서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센스가 뭘 알아차린다에서 그기에서 알아차리는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기에는 프로그램만 있을 뿐이다. 이런 얘기와 같은 거다. 그럼 프로그램은 변경될 수 있는가? 있다. 그럼 변경되어지지 않는 언제나 있는 그런 我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지 그 감지하는 주체가 없는 게 아니다. 내가 너를 지금 볼 때 나는 보는 작용을 하는가? 한다. 이런 작용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늘 이런 오해가 자꾸 빚어지는 것 같다.
Q 독립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근거로 현대 물리학의 예를 설명했다. 분자설에서 원자설 그 다음 광자 전자 양자 중성자 중간자 등 소립자까지 이어지는 물리학의 이론을 보아도 불변 자아로서 요소에 대한 믿음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음을 본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의 의문이 있다. 논의를 물질에 국한시켜 볼 때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최후의 요소가 없이 끊임 없이 나아가는가 하는 점이다. 마치 수가 무한대로 이어지듯이 말이다. 아니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불변의 물질요소는 존재한다라고 전제해야 하는 건가? 어떻게 보면 연기와 무아를 올바로 보는 건가?
A 우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마음 공부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물질에 대해서 얘기한 거다. 그러면 얼음에서 물이 되고 물에서 수증기가 될 때 상태가 변한다. 우리가 육안을 볼 수 있는 것은 상태다. 그러면 상태가 다르면 다른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물질이 아니고 그 물 분자의 결합방식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그 결합방식에 따라 우리 눈에 인식되어-지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는 거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실은 똑 같은 물 분자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게 상호 어떻게 결합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인식되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되어-진다. 이런 얘기다.
그래서 여기에 본질의 세계 그 내면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을 구성하는 본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내면을 다시 들여다 보니까 그것도 또 수소와 산소로 결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물 분자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실체 같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까 그것은 구성되어-진(아마도 이렇게 단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생멸의 연장된 표현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일어나고-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것일 뿐이다. 구성되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면 그 구성되어-진 관계가 한 덩어리로 우리 눈에 보일 때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관계까지 들여다 보니까 실체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줄을 알았더니 더 작은 원자라는 것이 관계 맺은 작은 것들이 또 있더라. 그래서 그 작은 것들이 실체인 줄을 알고 또 들여다 보니까 그것이 또 관계 맺어져 있더라. 그 관계 맺어진 사이를 보니까 텅 비어 있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다시 소립자라는 것이 있더라. 그래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없더라. 이런 소식이다.
그러면 이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이제 영원히 간다. 안 간다. 이런 거는 의미가 없다. 그럼 지금 원자까지 왔으면 우리는 여기서 원자라고 하는 것이 실체로 인식되어-지는 그거는 반드시 관계 맺음이 있다. 이렇게 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그런데 관계 맺음이 있는 그기에는 다시 작은 요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끝이 나서 근본 요소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다.
여기서 無我라고 하는 용어의 핵심은 단독 알갱이는 없다. 우리에게 단독 알갱이로 인식되어-질 때는 그것은 관계 맺음이다. 緣起다. 이렇게만 이해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은 물질과 물질이 실체가 있게 인식되어-지면 다시 연구를 하면 될 거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自我라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 自我라고 하는 실체는 없는 거다. 관계 맺음이다. 관계 맺음을 보면 텅 비었다. 그러니까 실체가 없는 거다. 無我다. 더 연구하니까 어떤 그기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있었다 하면 그걸 眞我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 또한 그렇게 인식되어지는 게 (…) 더 깊이 관찰을 하면 관계 맺음으로 간다. 이렇게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텅 비었다”가 아니라 언제나 작용할 때는 자아가 있다/없다? 있는 거다. 언제나 작용할 때는 시간과 공안 안에서 작용의 주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공간을 떠나서 지속된 자아의 주체는 없다는 소식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늘 자아가 작동하는 속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자아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해서 우리들의 마음은 늘 열린 자세로 있게 된다.
Q 최근 중국과 미얀마의 대 재앙을 보며 불교의 인과와 유회가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목숨을 잃게 되는 이런 재앙을 업의 결과로 불 수 있는가? 연기론에 따르면 인이 있기에 과가 있으며 전생, 내생은 인과의 고리로 연결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전생의 업과 결과로 이런 끔찍한 과보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이를 불교의 연기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인과를 벗어나 우연적 요소가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고 봐야 하는가?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과 같은 분도 데바닷다의 암살기도로 상처를 입으신 적이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 같은 분이 이런 과를 겪은 것을 업 때문에 겪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답변하기 어려우면 이에 관한 답변을 얻을 만한 스님의 저서나 다른 도서를 소개해 주기면 고맙겠다.
A 우리가 윤회나 인과 응보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생긴다. 지진이 일어나서 쓰쵠성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전생에 많은 죄를 지어서 희생의 벌을 받는 거다. 미얀마에 태풍이 일어나서 죽은 사람도 그렇다. 북한의 죽는 사람도 그렇다. 이렇게 하면 이건 숙명론이다. 즉, 자연이 알아서 다 보복을 해주는가? 안 해주는가? 해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서 잘했니 잘못했니 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나중에 다 보복을 할 건데 뭐. 누가? 자연이 알아서. 근데 사람이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보복을 하면 성인의 가르침은 보복을 원수를 갚으라고 하는가 하지 마라고 하는가? 원수를 갚지 마라고 가르치면서 자연은 보복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겠는가? 이거 논리에 전혀 안 맞는 얘기다. 지진이 일어난 거는 사람이 지진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을까? 그기서 부부 아닌 사람이 삿된 음행을 해서 지진이 일어났을까? 도덕이 문란해 지진이 일어났을까? 그건 사람들의 생각이다.
지진이 일어난 거는 지각 안의 역학관계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거다. 그거는 굳이 인과로 말하면 지정학적인 그 지질구조 안의 어떤 원인이 있어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거다. 그건 사람이 착하고 선한 거하고 아무 관계 없는 그것도 다 일어난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그건 지질구조 상의 역학적인 인과로 해서 일어난 거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난 지역에 사람이 안 살았으면 다치는 사람이 없을 거고 그기에 대도시가 있었으면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거고 그런 거지.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뜻하게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 그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것이 자비심이다.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정신적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위로를 해줘서 안심을 시켜주고 내일이 아니라고 외면을 하지 말고 보살피고 그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거다. 근데 세상은 어떤가? 내 일이 아니면 외면하는 거다. 그 때 물자를 가지고 한 몫 돈 벌려고 하고 이게 이세상의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비록 그런 재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을 편안하게 갖도록 보살펴 나가는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갈등이 있으면 우리는 전생의 원수야. 우리는 원수라서 이생의 부부가 되어 싸운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자기를 고집하니 갈등이 생긴다. 자기 고집을 내려 놓으면 서로 화목해진다. 화목해지면 또 뭐라고 한다? 우리는 전생에 천생연분이었나 봐. 또 이렇게 얘기하겠지. 그러니까 이런 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건 그냥 현실을 어떤 이유로 설명하려고 하는 얘기고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다.
이 진리의 가르침은 어떤 고뇌에 우리가 처하든 우리를 늘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 부처님의 인격은 참 고상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너무 사람들이 존경을 했다. 그래서 프라세나짓 왕은 자기는 권력을 쥐고 그 신하들에게 돈을 주면서 총칼을 가지고 돈도 주고 하면서 이렇게 해도 자기 없는 데서 자기 욕하고 쿠데타 일으키려고 하고 말해도 잘 안 듣고 이러는데 부처님은 아무 주는 것도 없고 칼을 들고 협박하는 것도 없고 그런데 부처님 말씀하시면 다 귀 기우려 듣고 부처님이 없는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고 너무너무 신기하다 이거야. 자기가 볼 때는 도대체 부처님이 어째서 사람들이 이렇게 부처님에게 순종을 하느냐 이거야. 이럴 정도로 제자들이 부처님을 잘 따랐다. 그러나 다 그랬을까? 아니다.
말 안 듣고 계율을 어기고 말썽을 일으키고 이런 사람도 있었다. 자기들끼리 싸워가 부처님 말도 안 듣고 끝까지 싸운 사람도 있었다. 고삼비 비구라고. 그 중에 데바닷다 같은 사람은 부처님의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제2의 부처가 되려고 욕심을 내어 하다가 안되니까 부처님을 해치려고 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무슨 전생의 업이니 이런 얘기는 윤회로서 자꾸 설명하려는 데서 나온 거다.
여기서 부처님의 인격은 그런 재앙이 닥칠 때도 부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괴로워하지 않으시고 다 그들을 맞아도 구제를 하셨다.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던 앙골리말라도 구제를 하시고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처님의 인격이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 친족이 다 죽었다. 멸망했다. 그럴 때 부처님은 친족이라서를 넘어서서 (사람을 살상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홀로 가셔서 그걸 막으셨다. 뙤약볕에 않아서 그 대군을 막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안 듣고 끝까지 할 때, 부처님 그냥 보셨다. 부처님이 군대를 동원해서 안 싸웠다.
그러나 그 반대로 부처님은 사람을 죽이든 살리든 게의 안하고 나는 수행자니까 이래도 안 하셨다. 부처님은 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으셨지만 어리석은 자가 무력으로 하는 거를 그건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님은 그걸 외면하는 부처님이거나 안 그러면 신통력을 가지고 그런 군대를 없애버리는 부처님이거나 그런걸 자꾸 우리가 상상한다 말이야. 그러니까 북한에서 동포들이 죽어간다면 우리의 붓다의 제자들은 이걸 막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된다. 하나라도 살리려고 그러나 이걸 안 한다고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자. 안 준다고 이명박 정권을 타도하자.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이 말이야.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호소해서 이 사태를 막으려고 최대한으로 노력을 해야 된다. 외면하는 것은 그것은 붓다가 가신 길이 아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진리의 가르침이 있다. 저건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굶어 죽는 업보를 지어서 굶어 죽는다. 만약에 불교가 이런 게 불교라고 한다면 불교는 곧 이세상에서 없어질 거다. 이거는 보복을 합리화 한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는 진리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이런 데서 우리가 불교를 다시 봐야 한다.
자~ 그동안 25번의 강의 듣는다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종교로서 우리는 믿음에 따른 신앙도 있어야 되지만, 우리가 이 반야심경을 강의하는 동안에는 이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의 질문에 스님은 頓悟頓修(돈오돈수,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었으며, 한국 현대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성철이 돈오점수를 반박하며 제기함으로써 큰 논쟁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지눌 이래 한국불교 수행법의 주류로 이어져 온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친다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와 같지만, 깨치고 나서는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깨침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돈오돈수는 깨치고 난 뒤에도 더 수행할 것이 남아 있다면 진정으로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이다.)는 긍정을 안하고 頓悟漸修(돈오점수)를 긍정하느냐? 이런 질문도 있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비파사나(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하는 직관명상법을 말한다. 산스크리트 비파샤나(Vipasyana)를 음역한 말로, 의역하여 관-능견-정견-관찰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평화를 얻기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수행법을 말하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수행법으로서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 수행자들은 주로 하나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내적 황홀경이나 평화 고요를 체험하는 사마타 수행법을 따랐다. 기존의 사마타로는 궁극적인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긴 석가모니가 비파사나라는 새로운 양식의 수행법을 개발한 것이다.)에 대해 설명을 하니까 그런가 보다. 우리가 해탈로 나아가는 수행법에는 남방불교에는 관법수행이라고 하는 비파사나가 있다. 대승불교에는 간경수행(간화선의 등장, 선종이란 좌선을 주요한 수행 방법으로 삼아 깨침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이다. 불교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는 간경 수행, 주문을 외우는 주력 수행, 좌선을 통하여 깨침을 추구하는 참선 수행, 기타 염불 수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좌선 수행은 소위 看話禪(간화선)이다. 간화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 또는 ‘화두를 보게끔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를 들어 公案(공안)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공안선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공공 문서가 지니고 있는 그 권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사로이 처리할 수 없듯이 스승의 준엄한 검증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수행의 경지를 인가받게 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엄격하게 적용되는 사자상승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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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는 공안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이를테면 대혜는 조주 중심의 무자화두를 강조하였다. 조주의 無子話頭(무자화두)란 조주와 제자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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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대혜는 생생하게 공안을 들어 끊임없이 의심에 의심을 더해 가야 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대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통한 깨침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았다. 깨치는 데에는 우선 의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의심을 공안에서 찾아야 하나고 주장한다. 따라서 크게 의심할수록 크게 깨친다는 대의대오를 강조하였다. 그 방식으로서 대혜는 고인의 공안을 통하여 의심을 일으켜야지 문자를 통하여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경전의 가르침을 통하여 의심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일상의 번거로운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오로지 고인의 무자를 통해서 의심을 하고, 그 무자를 깨쳐야만 모든 의심덩어리를 꿰뚫어 부처님의 깨침의 심경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다. 이처럼 대혜에게 공안은 단순한 고인의 공안으로서가 아니라 깨침의 전부였다. 그리하여 대혜의 공안이 이전과는 달리 하나의 공안선, 곧 간화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이 있다. 정토정에는 염불수행이 있다. 밀교에는 주력수행이 있다. 선종에는 참선이 있다. 여기에도 5가 7종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간화선, 화두선은 이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화두선을 최상의 가치로 치는 소위 말해 임제종 그것을 계승한 대한불교 조계종에 소속이 되어있다. 그래서 그 임제종의 그 가르침의 원형은 육조 혜능대사의 가르침이다. 그 육조 혜능 대사의 가르침을 돈도돈수로 볼 거냐 돈오점수로 볼 거냐 하는 이 논쟁이다. 돈도돈수니 돈오점수니. 그런데 비파사나는 이거와 다른 가르침에 속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 반야심경 안에 이 소승가르침이 있다. 그 소승가르침이 뭐냐라는 설명을 할 때, 비파사나에 대해 내가 설명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건강에 안 좋아서 어떤 운동을 하면 좋으냐? 그럴 때 어떤 사람이 조깅이 제일 낳다 어떤 사람은 축구가 좋다 농구가 좋다 배구가 좋다 체조가 좋다 요가가 좋다 이럴 거 아니겠는가 그러면 의사는 건강을 위해서 운동 좀 하라 이게 의사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떤 운동을 할까? 그건 어떤 운동을 해도 좋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 조건을 따라서 운동종목을 선택해야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조깅이 좋다고 해서 전부 조깅을 한다. 조깅이 좋다는 데에 너무 빠져서 그저 환자까지도 아침에 달리기를 시킨다 이 말 이여. 그래서 부작이 생겨. 그러면 여기서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조깅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걷기가 좋다. 그래 이 사람이 걷기 해 보니 훨씬 좋다 이 말이야. 그러면 조깅은 틀렸다. 걷기가 제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각 역사 속에 흘러오다가 각 종파별로 나름대로 수행법이 있고 우리는 그 가운데서 참선 수행법을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서 화두선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 그 화두선 수행법 안에서 돈오점수니 돈오돈수니 하는 하나의 수행방법을 싸고 또는 그 검정을 싸고 이런 하나의 토론이 있다. 그래서 너무 이렇게 자꾸 나누고 논쟁적으로 하기 보다는 실제로 행하는 것, 실제로 행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 해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해야 된다. 해보면서 자기가 자기화 시켜가면서 질문을 하면 이제 너무 점진적인데 치우쳤다 싶으면 단박에 뛰어넘는 도리를 얘기해야 되고 너무 단박에 뛰어넘는 데 치우쳐서 일확천금을 노리듯이 허황되면 점진적인 도리를 가지고 그 병을 치유해야 된다. 이렇게 우리는 공부를 하나하나 해 나가야 된다. 끝.
덧글:
이렇게 해서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는 끝났습니다. 도움이 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반야심경 자체는 제목을 포함하여 270자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대승경전의 핵심을 압축한 경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도 있고, 이번 강의는 인간 마음의 이기적인 구조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의 종류,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인생의 지침서로 종교의 차원을 떠나서 대중에게 많이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꼭 책으로 출판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를 계기로 일관되게 언급되었던 '깨달음'에 대한 식견이 좀 더 생겼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는 짬짬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련한 자료들을 공유하면서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꿈이 꿈인 줄을 알았다면 눈을 떠는 쪽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