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가장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 반야바라밀다(1)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주문; 선주, 악주, 주문, 신주, 금주, 밀주, mantra(밀주), dharani(총지주), vidya(명주), 진언
크고 신비로운, 크게 밝은,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주문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주며, 진실하여 조금도 헛됨이 없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是 이것은(반야바라밀다를 수행 하는 것)은
大神呪
큰 신비한 주문이다. 신비=기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믿음.
진실한 믿음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우리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그런 기적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간절한 믿음, 진실한 믿음이 가져오는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을 불러오는 그런 가르침이다.
是大明呪
이것은 큰 밝은 주문이며… 밝다=훤히 안다. 안다는 것이 가장 잘 알 때=훤히 안다. 그러므로, ‘시대명주=앎’이다. 慧를 말한다.
훤하게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는 가장 밝게 알아서 이루는 그 어떤 것 보다 깨달음 보다 더 밝게 아는 것은 없다. 깨달음이야 말로 가장 밝게 아는 가르침이다.
是無上呪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가장 높다. 높다/낮다는 실천의 단계를 말한다. 우리가 어떤 실천을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최고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확연히 깨쳐버리는 것보다 더 높은 실천은 없다. 결과적으로 궁극적으로 깨치는 것이 최고의 높은 단계의 실천이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깨쳐버리는 이 반야의 행은 실천가운데 가장 높은 실천이다.
是無等等呪
이것은 같지가 않다. 비교할 것이 없다. 뭔가 얻었을 때, 비교를 한다. 우리는 누가 더 돈이 많은지 누가 더 신통력이 큰지를 비교한다. 어떤 도를 증득했다고 할 때, 어느 도가 더 높은지 비교를 한다. 깨달음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비교할 것이 없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종교적인 체험, 수행적인 체험, 그래서 궁극적으로 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을 증득한 것 보다 더 높다고 말할 수 있는 비교할 수 있는 그런 도를 증득한 것은 없다. 그러니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위대하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는 4 가지가 필요하다.
[信-解-行-證]
1.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신심이 있어야 한다.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된다.
2. 믿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믿음은 큰데 만약에 어리석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맹신이 된다. 큰 부작용이 된다. 미신이 된다. 어리석은 믿음이 된다. 만약에 차의 성능은 좋은데 길을 잘 못 들거나 운전이 미숙하면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킨다. 맹신, 미신은 ‘올바른 앎(이해)’이 없다. 그 반대로 앎만 중요시하지 믿음이 없다면 지식이 되 버리고 철학이 되 버린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알음알이’다. 알기만 많이 안다는 의미. 믿음은 부족하고 실천도 부족하고… 이 信解(믿음과 앎)가 함께 이루어져야 그것이 바른 믿음이고 바른 앎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바른 실천. 굳건한 믿음, 올바른 앎을 실제로 행해야 한다. 자기가 경험해 봐야하고 실천을 해야 한다. 실천 없는 앎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지만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 시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실천이 있어야 된다.
4. 그런데 부지런히 실천은 하는데 부지런히 행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자기가 그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의미가 떨어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진리를 증득해야 된다. 스스로 경험해서 채득해야 된다.
呪; 다라니 (陀羅尼), 비교적 긴 장구(章句)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 번역하며 불법(佛法)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즉 뛰어난 기억력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총지란 하나를 기억함으로써 다른 것까지 연상하며 다 기억한다는 뜻이고, 능지란 여러 선법(善法)을 능히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능차란 악법을 능히 막아 준다는 뜻이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진언(眞言)과 다라니를 지송(持誦)함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다라니>는 대부분 산스크리트를 번역하지 않고 음사(音寫)하였다. 그 이유는 번역으로 말미암은 의미의 제한을 방지하자는 것과 그 신비성을 간직하자는 데 있었다.
중국말로 번역을 할 때는 직역을 한 것이 있고 약간 의역을 한 것이 있다. 소리를 내에 그대로 음역을 하면 ‘다라니’가 되고 그것을 직역하면 진언(嗔言)이 된다. 진실한 말씀. 허풍, 거짓, 쓸데 없는 말이 있다. 말이 많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를 괴로움(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모든 번뇌를 여의게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말씀보다 진실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진언(다라니)이라고 한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반야바라밀다가 참으로 위대한 수행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은 그 어떤 믿음보다도 더 신비하고 어떤 앎보다도 더 밝은 앎이고 어떤 실천보다도 더 높은 실천이고 어떤 체험보다도 비교할 바 없는 최고의 체험이다. 반야바라밀다=깨달음. 그래서, 신해행증을 등장시켜서 말을 하다보니까 이렇게 ‘신비하다 밝다 높다 비교할 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呪는 이상한 개념의 주문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처님의 참으로 진실한 말씀이다. 우리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이다. 꿈에서 깨우는 그런 말씀이다.
왜 기적이 일어나려면 간절한 마음, 진실한 마음이 기적을 불러오는가?
옛말에 사람이 너무 지극하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천지신명이 감응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어떤 소원이 있고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내 힘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아가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병이 났는데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큰 자연 재난(재앙)이 일어났다. 사람이 막을 수는 없다. 이럴 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도록 이럴 때 말하자면 기도가 필요하다. 이럴 때
기적이 일어나려면 마음이 간절해야 한다.
욕심은 간절해질 수가 없다.
욕심은 정말 간절해지기가 어렵다. 옛날에는 부모에게 병이 나면 자녀에게 책임이 있고 그 자녀 중에도 첫째에게 있었다. 첫째가 능력이 없으면 둘째에게 있었다. 셋째라든지 막내는 책임을 안 져도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옛날에 부모가 병이 나서 모든 가족이 다 포기를 했는데 막내 아들이라든지 막내 딸(아들보다 더 책임이 없는 사람)이 많이 등장해서 그 부모 약을 구하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니까 의사가 “100년 묵은 산삼을 구하면 살릴 수가 있다”라던지 “눈 속에서 꽃이 피는 그런 약초를 구하면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막내 딸이 또는 막내 아들이 계곡을 건너 산을 넘어서 눈 속에서 헤매다가 100년 묵은 산삼을 구하던지 눈 속에 꽃이 핀 약초를 구해온다. 이럴 때, 꿈 속에도 산신령이 나타난다.
이런 얘기들이 왜 생기느냐?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사람이 하는 것은 이것은 기적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책임도 없는 막내가 온갖 고초를 겪어가면서 오직 부모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할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이게 바로 천지신명이 감동을 했다고 한다는 얘기다. 기적은 이런 데서 일어난다. 이렇게
간절해지면 욕심이라는 것이 다 없어져 버린다.
[내다]하는 것도 다 없어진다.
그리고 [이러면 될까 안 될까]하는 못 믿는 마음, 불확실한 마음도 싹 없어진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되야 한다.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거다.
안 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한다.
이게 바로 간절함이다.
그래서 옛날에 기도할 때는 1. 음식을 삼가 하고(먹을 거 다 먹고, 잘 거 다 자고, 부부관계 할 거 다 하고…그런다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간절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정말 간절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을 금(식)하던지 아니면 육식을 금하던지 2. 목욕을 한다. 그것도 겨울에 추운 데서 한다. 정성을 말한다. 3. 기도하는 기간에는 부부가 한 방에서 안 잔다. 이런 것들이 다 그만큼 정성을 쏟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주 높은 산꼭대기까지 간다. (음식을 삼가고 목욕을 하고 부부관계를 안 하고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이러한 모두가 간절함을 말하고 이런 것들 모두가 우리의 일상성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
모든 욕구를 다 놓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자기의 까르마(karma, 업식)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욕심으로 일어난 번뇌의식이 아니고) 순수의식, 저 마음 깊이로부터 있던 아주 순수한 의식이 일어난다. 이것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의 소리’, ‘하느님의 계시’, ‘신령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러한 얘기가 나온다. 아주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선의지, 아주 순수한 의식이 위로 올라온다. 이 순수한 의식이 올라 오려면 잡다한 번뇌가 다 사라져야 된다. 욕심이 다 사라져야 된다. 불평과 불만, 미움, 이런 거 다 사라져야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순수의식이 올라온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잘 모르니까 신령님이 도와주셨다. 천지신명이 감흥을 했다. 하나님의 계시다. 이런 말을 했지만 사실은 이것은 자기의 순수의식이다.
무당이 굿할 때 도끼 날 위에서 맨발로 펄쩍펄쩍 뛰어도 하나도 안 다친다.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야 신명이 난다. 의식의 세계에는 신명이 안 난다. 신명이 나면 우리의 몸은 일반 몸하고 다르다. 몸에서부터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 부처님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에 너무너무 가뭄이 들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장장이(천민) 아들 춘다가 “부처님, 왜 승낙을 하셨습니까?
[Cunda-Kammāraputta (純陀)춘다캄마라푸타; 부처에게 마지막 공양을 한 사람이다. 춘다의 버섯요리를 드신 부처는 식중독으로 열반에 드셨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해서 부처님의 일행을 자기집으로 초대를 했다. 나름대로 준비한 음식을 부처님께 드렸다. 그때, 초대를 받았을 때,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Ananda , 阿難陀, 석가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석가 곁에서 그의 말을 가장 많이 들었으므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린다. 경[經]의 편찬에 참여하여 후대에 전해지도록 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춘다는 가난한 이고 그래서 그는 절대로 대중에게 공양을 할 그런 형편이 아닙니다.”며 반대를 했다. 부처님이 “아난다야, 걱정 마라. 춘다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거다.”고 말했다. 다음날 정말 춘다는 음식을 준비하였고 대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할 수 없는 사람이 했으니 이것 자체도 사실은 기적이다. 부처님이 그 음식 가운데 하나인 스카라 맛다바(sukaramaddava, 야생 토란으로 추정)라는 음식을 받으신 뒤에 춘다에게 “이 음식은 다른 비구들에게 주지 마라. 이 음식은 보통사람들은 소화하기 어렵단다. 이 음식은 땅을 파고 묻어라. 누구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춘다가 시킨대로 했는데 공양을 받은 부처님이 춘다를 위해서 설법을 해주고 갑자기 배가 많이 아프셨다. 그리고 “아난다야 함께 가자.”고 길을 떠나는데 몹시 아픈 표정이셨다. 어느 정도 가다가 “아난다야 좀 쉬어가자.” 그러면서 피가 섞인 설사를 하셨다. 피똥을 싼 거다. 그리고 조금 가다가 또 쉬시고 설사를 했으니 목이 너무 말라 “아난다야 목이 마르다. 물을 좀 다오.” 그리고 북쪽의 카쿠다(Kakudha) 강가에 이르러서 목욕을 하시고 행진을 하다가 거의 죽을 정도로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니까 대중들 사이에 숙덕거림이 있고 “춘다는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나쁜 놈, 너 때문에 부처님이 다 죽게 생겼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이때 춘다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이 육체적 통증을 겪고 괴로워하면서도 춘다의 괴로움을 염려하셨다. 그래서 자리를 깔고 앉은 상태에서 아난다에 물었다. “춘다는 어떤가?” “춘다는 심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올린 공양으로 인해 부처님이 병이 났기 때문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도 춘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춘다를 이리 오게 하라.” 부처님은 춘다가 옆에 있는 자리에서 아난다에게 묻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에게 공양을 올릴 때,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뭐냐?”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입니다.” “그렇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에서도 최고가 되는 공양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정각을 누리기 직전에 마지막 올린 공양(수자타의 공양; Sujātā, 玉耶, 석가에게 어진 아내로서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교만을 깨달은 여성)이다. 또 하나, 그와 같은 공양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춘다의 공양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 한 번 만에 부처님께 음식을 잘 못 올려서 부처님이 춘다의 공양을 먹고 돌아가셨다에서 춘다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후로 공양을 올린 자가 되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춘다는 기독교의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수자타와 같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돼버렸다.
이 세상에 독이 든 음식 또는 독성이 있는 음식을 미리 알고 안 먹었다. 이런 기적을 행한 사람은 많다. 또, 먹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람도 많다. 먹었는데 배탈이 났지만 딱 토해버렸더니 아무렇지도 않더라는 사람은 역사상에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음식을 드시고 돌아가시면서도 그 음식을 올린 자의 마음 고통과 그를 비난하는 주위 사람들을 염려하셔서 이렇게 춘다는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공양을 올린 자로서 가장 위대한 공양을 올린 자다. 그러니까 춘다의 얼굴이 밝아지고 미소가 있고 대중들이 춘다에게 가진 의심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춘다의 공양을 찬미한다. 그러면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그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기적을 행했다고 하면 오늘날 과학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의 독성 검사로 미리 안다든지,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도 약물치료로 치료를 한다든지, 그 옛날의 기적은 오늘날의 과학기술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이 부처님의 마음은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대자대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들 이런 경험을 한 제자들이 부처님이 열반을 하신 뒤에도 한 분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의 위대함이 어떤 줄을 알기 때문에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몇 백 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위력이 있다. 이건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 속에는 이런 신비한 힘이 들어있다. 그건 정말 진실한 말씀이다. 진언이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2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경전을 읽으면서 감동을 한다. 뭐라고 마음이 형언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이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지옥도 마다하지 않겠으며, 내가 비록 천상에 가서 온갖 즐거움을 누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나는 천상도 마다하겠다.
이런 마음에서 뭔가 일어나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한 거다.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는 순수의식(선의), 이 좋은 마음에 오히려 탐심, 진심, 치심이라는 독성이 끼어들어서 이 마음이 독성이 돼버렸다. 물은 원래 깨끗한 감로수였는데 그기에 독이 들어갔을 때 그것이 독약이 돼버렸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듯이 이 삼독심은 우리를 괴로움에 빠트린다. 고통 속에 빠트린다.
삼독심에 물들면 믿지도 못하고, 이해도 잘 못하고, 실천도 안 하고, 그러니 물론 체험은 없다. 그저 어리석어서 쥐가 쥐약을 먹듯이 순간적인 쾌락에 빠져서 결국 고통을 자처한다. 그래서 괴롭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결국은 다 자업자득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행함 뒤에 따르는 과보다 그런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어리석음 그것을 제해야 된다.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반석 같은 믿음, 대지와 같은 믿음을 말한다. 이러한 믿음이 일어나려면, 마음이 간절해야 된다. 간~~~절해야 순수의식의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는 먹을 거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고 해서 순수의식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20세기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과 싸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절망에 빠졌겠는가? 게다가 대중은 어떤 손쉬운 기적을 자꾸 요구했는가? 힘이 모자라도 이기기를 원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게 안되면 대중은 떨어져 나가버린다. 대중은 성격이 조급해 과격해지기가 쉽다.
큰 힘을 가진 자와 대결할 때, 작은 힘을 가진 자는 이길 수가 없다. 그 때는 큰 힘을 가진 자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힘으로 이길게 아니라 마음을 바꿔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이 하는 것이 영국사람들이 감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반대자가 생겨야 한다. 그래야 이것이 일어나는 거다. 영국인들이 인도인을 미워하면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약한 자를 미워하는 이상 이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그런 데서 얼마나 고뇌가 많았겠는가? 그럴 때마다 지하에 내려가서 일주일씩 금식을 하거나 열흘간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 부처님 이것을 해결해 주세요. 이런 게 아니라 자기의 조급함 이런걸 다 떨쳐내고, 자기의 무지를 떨쳐내고 순수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거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될까 안될까 번뇌가 얼마나 일어나겠는가? 부처님도 6년간 고행을 하실 때 그런 번뇌가 많이 일어났다. 마왕 마라의 유혹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Māra; 마라는 불교 세계관의 대표적인 마족으로 그 이름에는 ‘죽이는 자’, ‘생명을 빼앗는 자’라는 뜻이 있다. 마라는 ‘마(魔)중의 마(魔)’라고 할 수 있는 불교세계 끝탄 대장 같은 존재다. 마라는 부처님께서 수행 중일 때 나타나 유혹한 적이 있었고(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루시퍼가 유혹한 것과 아주 흡사하다.)그 외에도 고행하는 승려들을 방해하기위해 사람의 번뇌가 보여주는 환상을 이용해 유혹을 하거나 뛰어난 미모를 가진 세 명의 딸을 보내 유혹하기도 한다. 세 명의 딸의 이름은 애집(탄하 : 한자 번역으로는 애욕(愛慾)), 불쾌(아라티 : 한자 번역으로는 애념(愛念)), 쾌락(라가 : 한자 번역으로는 애락(愛樂))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타니파타’ 제3편 제2장에서는 마라는 일종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 군대는 욕망, 혐오, 기갈, 망집, 수마, 우울함, 공포, 의혹, 허영, 고집이라고 한다. 군대의 이름만 봐도 대충 눈치 체겠지만 마라의 군대는 인간의 군대와는 다른 정신적인 존재들로 예상이 된다. 거기다 마왕주제에 상당히 높은 영의 세게(타화자재천)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의문이다. 타화자재천이란 육계 중 가장 높은 천계, 그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는 미륵보살이나 염마(염라대왕)은 물론이며 사천왕보다 높은 곳에 있는 존재이다. 어째서 마왕이 이런 위치에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판타지 라이브러리’ 3권인 ‘판타지의 마족들’의 필자는 마라는 수행자들의 시험관 같은 존재며 실은 악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마라는 틀림없이 악의 존재일 것이다. 타화자재천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영적인 힘이 강대한 마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선하고 성스러운 천국에 있고 악한 자는 지하속의 지옥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마련인데 그건 다 유대신화(기독교)의 설정이다. 불교 세계관에는 지옥에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지장보살님이 계시고 죄인을 벌하는 옥관들이 있다.(당연하겠지만 옥관들도 죄인은 아니다.) 그러니 천계에도 악의 존재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즉 마라는 신급 으로 강대한 마왕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마라의 이명으로는 호칭인 파피마를 붙인 마라 파피마 혹은 나무치 그리고 타화자재천을 뜻하는 제육천을 써서 ‘제육천마왕’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애욕의 신인 카마와 동일시되어 ‘카마 마라’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마라가 딸들을 이용해 수행자들을 유혹한 일화 때문에 성욕을 뜻하는 말도 있으며 음경의 은어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남자의 성기를 거시기 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그 때문에 여신전생이나 페르소나 시리즈에서는 이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여담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고 하는데 코끼리는 부처님의 태몽에 등장해서 성스럽게도 여겨지면서 마왕인 마라가 타고 다니기도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열반이란 없어. 열반이란 없어. 열반이란 본래 없는 거야. 그건 말만 있는 거야. 네가 이렇게 숲 속에서 혼자 고행을 하다 죽어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니 고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래서 신을 찬미하고 제사를 지내면 너에게 전륜성왕(인도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의 부귀가 도래하리라.” 이런 식의 유혹을 끝없이 한다. 이것이 정진하다가 그 장벽을 못 넘어가니까 그로부터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 때, 부처님은 다시 마음을 다잡으시고 “마왕아 물러가라. 나의 군대는 어떤(?; 오디오상태가 안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듦) 거다. 너의 군대는 어떤(?) 거다. 너의 군대를 쳐부수는 나의 군대는 어떤(?) 거다.” 이런 속에 믿음이 나오고, 진실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는 거다. 그런 얘기를 하신다. 그래서 여기 믿음이 중요한 거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욕심으로 해서 그 게 성취가 안 되면 ‘아이고 기도했더니 소용도 없더라’. 딴 사람이 와서 그거 하지 말고 굿을 한 번 해보라거나 다른 종교를 믿어 봐라 그러면 될 거다 하면 그냥 가버린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이건 얕은 믿음이다. 그래서 간절한 믿음, 간절한 마음, 이것이 굳건한 믿음을 가져오고 이것이 기적을 가져온다. 기도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가져오는 그것이 신비함(기적)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그 어떤 믿음, 그 믿음으로 가져오는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깊은 믿음에 속하고 더 큰 기적을 가져오는 거다. 그래서 그것을 시대신주(是大神呪) 라고 표현한다.
덧글:
[당신이 정진을 하기 전에 보인 분노는 집착에서 오는 분노였지만, 정진을 한 이후에 나타난 분노는 단지 비추어진 분노였을 뿐입니다. 더욱 열심히 수행한다면, 그런 비추어진 분노는 인지된 분노로 바뀝니다. 더 수행을 한 후에는 이 인지된 분노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오직 애정어린 분노만 지니게 됩니다. 속으로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단지 겉으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에서 오는 분노, 비추어진 분노, 인지된 분노, 애정 어린 분노로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중략-
집착에서 오는 분노는 몇 시간, 혹 어떤 때에는 며칠씩 가라앉지도 않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곧 바뀌지도 않습니다. 비추어진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인지된 분노는 분노를 느끼더라도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정 어린 분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단지 겉으로만 화를 내는 것이지요. 속으로는 아무런 분노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 숭산 대선사의 서한(편지) 가르침, 현각 편집, 무산본각 옮김, 물병자리 출판사]
집착에서 오는 분노는 뒤끝이 있는 분노고, 비추어진 분노는 뒤끝이 없는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하여 마음이 맑아지면, 깨끗한 거울처럼되면, 그래서 분노가 나타나면, 스스로에게 분노에 찬 행위가 비춰지는 것) 그러나 더욱 정진해서 화의 근원을 깨달은 사람의 분노는 업식에서 올라오는 것임을 알아차리는 인지된 분노로 바뀌고, 더욱 용맹정진하게 되면 옳바른 쓰임을 위한 애정어린 분노로 바뀌게 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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