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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소승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비판

開理無語 2014. 8. 13. 20:44

16.강 소승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비판


지난번 시간에 이어서 반야심경은 내용적으로 분류해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 번째 대승의 공사상을, 두 번째가 공의 세계에서 봤을 때 소승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法執을 비판하고 세 번째 대승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이번 강의는 소승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是故, 이런(제법이 공하다) 까닭으로, 그 공의 세계에서는 不生不滅이요 不垢不淨요 不增不減이다. 즉 不生不滅이고 不垢不淨고 不增不減인 그런 세계에서 본다면,

空中, 공 중에서는, 공 가운데에서는, 공의 세계에서는, 공의 차원에서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면, 


1. 소승교설의 첫 번째 일체는 五蘊이다. 오온설. 五蘊은 色受想行識이다. 色이라 할 것도, 受라 할 것도, 想이라 할 것도, 行이라 할 것도, 識이라 할 것도 없다.


오온설에 대해서, 오온의 교설에 대해서 실체가 없음을, 오온의 교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상화 하는 게 뭔가? 法相이다. 바로 그 법상을 비판하는 거다. 바로 그 법에도 실체가 없음을, ‘법도 공하다’는 소식이다. 



법상_ 원효 『금강삼매경론』(해제)

법의 진실상은 유와 무 양변을 떠나 있으므로 어느 쪽에서도 이치를 설명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유가 아닌 법이 무에 나아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진제를 속제로 삼았으되 무의 법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고, '무가 아닌 상이 유에 나아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진제를 속제로 삼았으되 유의 상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이 체득한 뜻은 명칭이 있는 명칭에 맞지 않으므로 '뜻이 없는 뜻'이지만, 명칭이 없는 명치에는 맞기 때문에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명칭과 뜻으로 나타낼 수 없지만 명칭과 뜻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법의 상은 마음[心]과 마음의 대상[心所]이 화합한 것도 아니고, 색도 아니며 공도 아니다.

대력보살이 말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진실의] 상(相)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가 무에 머물지 않고 무가 아닌 것이 유가 아니니, 유가 아닌 법이 무에 나아가 머물지 않고, 무가 아닌 상이 유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하여, 유와 무로써 이치[理]를 설명할 수 없다. 보살아, 명칭과 뜻이 없는 상은 불가사의하니 왜 그런가? 이름 붙일 수 없는 명칭은 명칭이 없는 것이 아니고, 뜻이 없는 뜻은 뜻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37)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이 법상은 합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매인 것도 아니요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이거나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오는 상도 가는 상도 없으니 불가사의합니다."(363)


2. 그 다음에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이거는 12처설이다. 일체는 12처다. 인식의 주체는 6가지 감각기관, 6근, 眼耳鼻舌身意 그리고 그 6근의 대상을 6경이라고 한다. 이 6근과 6경의 접촉에 의해서 우리가 인식 작용을 하는 거다. 일체라는 것이 딴 게 아니다. 이것이 12처설이다. 


3. 그 다음에 세 번째가 18계설이다. 18계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 안이비설신의, 그리고 인식 대상인 경계, 6경, 색성향미촉법, 이것의 단순한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있는 인식작용인 6가지 식이 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만 가지고 한다면 어떤 사물을 볼 때 누가 보나 똑같아야 된다. 다른 이유는 뭔가? 그 인식의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각각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6식,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다. 이러한 6+6+6=18계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개된다. 일체는 18계다. 이게 18계설이다. 여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거다.


원래 앞에 無가 다 붙어야 된다. 무색, 무수, 무상~ 無色 無受想行識 이거는 앞에 모두 無가 붙어있다는 거다. 그 앞에 空中, 공 중에서는, 공 가운데에서는, 공의 세계에서 보면, 이게 전제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오온설(6처)에도, 12처설에도, 18계설에도 모두 앞에 空中이 해당되는 거다. 


그러니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가 無다]를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하나하나에 다 붙이는 것이 너무 길어서 18개 가운데에서 첫 번째와 끝 번째 거만 쓰고 중간은 생략해버린 거다. 그래서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라고 표현을 했다. 기본 골격인 이런 18계설을 비판하고 있다. 이게 다 소승교설이다. 소승교설의 법상에 집착함을 비판한다. 그래서 법도 공함을 지금 깨우친다는 얘기다.


4. 그 다음이 12연기다. 연기법을 觀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거다. 12연기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일단 기본 골격을 이야기 해야 되니까 나중에 가서 자세히 설명을 한다.

무명이 있으므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해서 식이 있고~~~생이 있으므로 해서 노사가 있다. 


다시, 무명을 타파해 버리면 행이 없어지고, 행을 타파해 버리면 식이 없어지고~~~생을 타파해 버리면 노사가 없어진다. 이렇게 무명을 타파해서 생로병사까지 사라지는 그런 수행법이다. 


그런데 여기에 無無明 이라고 했다.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 이렇게 소승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무명이라고 하는 것에도 무명이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명이 없으므로 ‘무명을 없앤다’라고 할 것도 없다. 무명의 다함도 없다. 그게 無無明 亦無無明盡, 가운데 10개를 다 생략하고, 無老死 亦無老死盡 (노사가 없으므로 또한 노사의  다함도 없다)이다. 이렇게 12연기에 대해서 쓰여지고 있다.


5. 소승 가운데 성문승은 기본 수행법이 뭔가 4승제다. 연각승은 12연기. 사승제는 고집멸도다. 



삼승[三乘]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수레를 말하는 것으로, 불타의 교법(敎法)이 중생을 실어 열반의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을 비유한 말. 세 가지 교법,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을 이른다.

성문승은 사성제(四聖蹄)의 교법(敎法)을 듣고 그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며, 연각승은 12연기(緣起)의 교법을 스스로 깨달아 벽지불(僻支佛)의 성위(聖位)에 오른 것이고, 보살승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도 깨닫고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함으로써 성불(成佛)하게 되는 것이다.


4성제.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움을 없앤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깨닫지 못한 소식이다. 그러니까 괴로움은 없다. 괴로움이라 할 실체가 없다.


우리가 밤에 잘 때,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 꿈속에서는 괴로움이 있나 없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괴로움이 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 보니까 사실은 괴로워하기는 했는데 괴로울 일은 있었나 없었나? 없었다. 괴로울 일이 있어서 괴로운 게 아니고 그냥 환영에 휩싸여서 괴로운 거다. 그러니까 본래 괴로워할 일이 없다. 우리는 뭔가 깨달음의 맛을 봐야 된다.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할 일이 없다는…


괴로워할 일이 있으니까 괴롭다? 그렇지가 않다. 괴로워할 일은 없지만 우리는 어떤 착각에 의해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데 깨닫고 보면 ‘아! 괴로워할 일은 없는 거구나.’ 괴로워할 일이 없다면 괴로움도 없다. 이 괴로워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그래서 무고(無苦), 괴로움이 없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도 없으며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다. 이게 무고집멸도다. 


우리는 깨닫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할 실체도 없다. 우리는 깨달음이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을 쓴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할 것도 없다. 이게 無智 亦無得 이다. 이것이 소승의 수행 체계에 대해서 한마디로 비판한 거다. 


그런데 그것을 비판할 때 그냥 비판한 건가 어떤 차원에서 비판한 건가? 어떤 차원에서. 쉽게 예를 들면, 사람들이 산 골짜기에서 이게 크니 저게 크니, 이게 높니 저게 높니, 이게 맞니 저게 맞니, 아무리 토론을 해도 끝이 안나. 사실은 이 골짜기에서 나가면 이거보다 훨씬 넓은 게 있고 훨씬 더 큰 게 있고 훨씬 더 높은 게 있다. 이건 우물 안의 개구리다. 이런 논쟁은 이 마을 밖을 벗어나면 이런 논쟁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서 저 높은 산에 올라가봐라. 저 높은 산에 올라가보면 넓은 세계가 보인다. 그럼 이런 논쟁은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까 온 세계가 다 보이고 정말 우리들의 시비분별은 하잘것없는 거다. 그기가 세계라고 앉아 있다. 그기가 정상이라고, 여기가 부처님이 가리킨 곳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산에 다녀보면 알지만, 밑에서 보면 정상인데 그기에 올라가 보면 더 높은 봉우리가 있을 때가 가끔 있다. 당연히 밑에서 볼 때는 이곳이 보여서 이곳에 왔지만, 그러나 올라가 보니까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면 부처님이 저 높은 봉우리로 가라 할 때는 자동으로 높은 봉우리로 가야 할 텐데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이걸 가리켰다는 거다. 저 높은 봉우리로 가라고 했다. 그게 이곳이다. 이렇게 여기서 주저 앉는다면 그는 이 세상의 1/4밖에 못 본다. 아니면 반밖에 못 본다. 더 높은 봉우리의 뒤편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더 높은 봉우리, 최고봉에 서서 “그기는 정상이 아니다. 그곳에서 벗어나 이리로 오느라.” 이런 소식이다.


그러면 이것은 근본교설의 차체를 비판하는 건가 근본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건가?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거다. 그러니까 대승교설과 근본교설이 다른 게 아니고 잘 못 이해한다. 그것을 법을 법상으로, 공이라 하면 모양이 없는 이치를 깨치는 것이 아니라 공이라는 모양을 만들어서 이해한다. 그러니까 이미 이거는 공이 아니다. 공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사가 해결이 안 된다. 아무리 알아도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얘기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금강경을 외우고 매일 천 배를 해도 자식을 미워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이걸 버리지를 못한다. 내가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다. 내가 돈을 빌려준 걸 못 받았다. 이렇게 괴로워한다. 그러니 제법이 공한 도리를 바로 깨달으면 이런 것이 다 한 여름 밤의 꿈같다. 그것이 그냥 마음이 그냥 지은 바다.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것은 법을 잘못 이해했다. 법에 모양을 지었다. 그래서 法相이다. 法執이다. 이렇게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그 법집을 타파하고 법마저 공함을 법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려라. 이게 부처님이 뗏목에 대한 비유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서 사상의 중심 개념이 바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생각될 수 있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반야심경을 알기 전에는 확연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자의 자연(自然)은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하다”로 해석할 수 있고, 불교의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 “스스로의 성품을 가진 게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 나툴 뿐”, “그것을 그것으로 다만 일어나고 사라짐을 다만 지켜볼 뿐”과 의미가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자는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으므로 노자의 사상은 불교의 영향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면서 이 사리자로 대변되는, 대표되는 소승을 바로 대승보살의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로 지금 인도하고 있다. 이런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다음 시간으로 하고 이 法執을 떠난다. 법집을 벗어난다. 참 중요한 거다.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我相 또는 我執이라고 한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집하는 것을 法相 또는 法執이라고 한다. 여기는 법의 상을 짓기 때문에 집이 생기는 것이다. 집착하는 거다. 내가 집착하고 고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거다.


그러면 한 예를 들어서 정리를 해 보겠다. ‘열반경’에 보면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일체중생 개유성불(一切衆生 皆有佛性).


[大般涅槃經]

초기에 성립된 열반경을 흔히 소승열반경이라 하며, 대승불교 흥기 후 성립된 경전을 《대승열반경》이라 하나 두 경의 이름은 모두 《대반열반경》이다.

부처가 열반하였을 때의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 이 경은 불신(佛身)의 상주,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 그리고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석가의 육신은 곧 법신으로서 상주하고 변하지 않으며 나타남이 아닌 데서 나타남이 있으며 육신의 모습에서 한량 없고 그지없는 법신을 보게 되고, 무아에 한정되지 않은 진아로서의 불성은 깨끗하며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중도관에 입각하여 일체 중생이 반드시 불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집착이요, 없다고 하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여 말할 수 없는 이러한 경계 자체는 있다고 하여 일체중생의 성불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편 소위 《소승열반경》은 이러한 후기 대승교학과는 관계없이 석가의 유언으로 법과 율에 의지하라는 당부와, 게으르지 말고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아난에 대한 충고가 주요내용이다. 이 초기경전은 발리어본으로도 남아 있으며 그 번역이 법현역의 《대반열반경》 외 두 종류가 있으며 《대승열반경》의 한역은 법현과 불타발타라 공역의 《대반니원경》 6권 18품, 북량 담무참 번역의 《대반열반경》 40권 18품, 그 후 위의 2가지 번역본을 종합하여 36권 25품의 《남본열반경》이 있다.


더 나아가면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다. 왜? 부처가 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식이다. 

그러면 우리가 경정을 공부하면서 “아~그렇구나.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구나.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되겠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마라.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 


한 수행자가 우리처럼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 어느 날 양지 바른 곳에 딱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선으로 말하면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근데 뭔가 옆에서 자꾸 따그닥 따그닥 딱딱 자꾸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린가? 궁금했다. 집중도 안 되고. 근데 따~~악 화두를 가지고 참구를 하는데 이렇게 보면 되나 안 되나? 안 된다. 여러 사람이 대중이 같이 할 때는 마음은 보고 싶지만 안 본다. 신경을 건드리지만 맘을 딴 데 잡고 하는데 아무도 없는 혼자 공부할 때는 볼까 안 볼까? 본다. 요렇게 봤더니 강아지가 한 마리가 살점 하나 없는 마른 뼈다귀를 가지고 와서 그걸 깍깍깍 깨물고는 탁 뱉었다가 또 도로 깍깍깍 깨물고는 뱉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물끄러미 봤다. 보니까 저거야 말로 천하에 쓸데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점이 있으면 의미가 있지만 그 마른 뼈다귀를 계속 깨물고를 하는 것은 아무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저거 왜 저렇게 쓸데 없는 짓을 할까? 하는 그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함 보자. 개가하는 행동이 쓸 데가 없다. 아무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있다. 아무 이득 없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거를 부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할 수 없다. 부처가 아무 쓸데 없이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이 현실 위에서 저 강아지는 부처인가 아닌가? 아니다. 그럼 강아지는 불성이 없다는 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는 있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의심이 딱 든 거다. 그냥 지금까지는 모든 생명 가진 것에는 다 불성이 있다. 이걸 그냥 믿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데 오늘 강아지의 행동을 보고 저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은 저건 불성이 없는 거다. 그런데 경전에는 있다고 했으니까 의심이 드는가 안 드는가?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의심이 든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어데 부처님 말씀을 안 믿어’ 근데 불가에서는 의심이 들면 물어야 된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의심이 일어난 거다. 실제 일어나는 거를 보고 의심이 들어야 활구(活句)가 된다. 살아있는 화두가 된다. 의심이 들어서 스승님에게 가서 물었다.


“스승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걸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면 저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저 개새끼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 말이다. 이 질문에 있다는 얘긴가 없다는 얘긴가? 내가 볼 때는 없다. 그러나 열반경에는 있다고 되어있다. 그래서 질문을 한 거다. 

스승이 “그래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불성이 있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으면 어떻게 될까? ‘아~저렇게 쓸데없는 것 같지만 내 눈에 그렇게 보이지. 그래 맞아 다 불성이 있구나’ 이렇게 돌아가면 되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럴 때 딴 거는 다 생략됐다. 왜 질문을 했는지 이해만 되면 된다.) 이런 사유가 있어서 질문을 한 거다. 그냥 물은 게 아니고. 


그때 스승이 딱 하는 소리가 “야 이놈아 개새끼한테 무슨 불성이 있냐?” 이렇게 말했다. 

이거를 점잖게 말하면 “無(없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 이 말을 듣고, 스승의 이 말을 듣는 순간에 눈이 멀어 버리고 귀가 먹어 버렸다. 멍 해져버렸다. 완전히 깜깜해져 버리고 하나도 안 보이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그런 눈 멀고 귀 멎는 상태가 되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이 말을 들어도 그렇게 안 된다.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서 물은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는 이것이 나의 것으로, 내 인생에 아주 심오한 과제로 우리에게 안 돼 있기 때문에 이건 남의 얘기다. 이 분은 진지하게 관찰하고 궁금해서 물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도 아무리 이거다 저거다 말해봐야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한 것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1. 근데 여기에 대답이 스승이 ‘없다’고 하면 첫째 나타나는 현상이 “스님 열반경에 있다고 써놨는데요” 이렇게 말하겠나 안 하겠나? 한다. 열반경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저 개에게도 마땅히 불성이 있다고 써놨다. “근데 왜 스님은 없다고 합니까?” 


이 의문은 궁금해서 물은 의문인가? 스승의 말이 틀렸다는 건가? 틀렸다는 거다. 경전에는 있다고 써놨다. 그러니 스님 말씀이 틀렸다는 거다. 이 선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공부를 해야 된다. 책보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以心傳心으로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교감을 하는 거다. 근데 스승을 불신하고 스승을 믿지 않는데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 없나? 없다. 그러니까 “열반경에는 있다고 그러던데요” 이러면 이미 틀렸다. 이것 스승을 불신하는 거다. 


2. “아~ 스님 그렇습니까?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믿었다. 스님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게 되나?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는 거다. 부처님이 틀렸다. 열반경에는 왜 있다고 잘못 기록 했을까? 그러면 불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안 믿고 그걸 부정하고 의심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없다. 


그러니까 ‘없다’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나타내는 태도, 우리들의 기본 마음은 부처님을 불신하거나 스승을 불신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깨달을 수가 없다.

깨달음을 참구히기 때문에 스승을 부정할 수도 없고 


3. 나오면서 “아이고, 경에는 써놨고 스승님은 없다고 그러고 어느 게 맞을까?” 이렇게 혼자서 궁리를 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이거는 둘 다 부정하는 거다. 둘 다 못 믿는 거다. 이게 제일 하수다. 부처님도 안 믿고 스승님도 안 믿고.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90%가 이렇다. 둘 다 부정한다. 우리는 늘 “이 스님은 이래 말하고 저 스님은 저래 말하고, 이 경에는 이래 써놨고 저 경에는 저래 써놨고, 어느 게 맞노?” 믿음이 부족하다. 둘 다 부정하는 거다. 이 경 저 경, 이 스님 저 스님, 스승님 부처님 다 못 믿는다. 


4. 그러면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부처님 말씀도 믿고 스승님 말씀도 일 점 일 획 의심 없이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無!!!’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멎고 눈이 멀어버린다. 왜? 여기 한 생각을 낼 수가 없다. 한 생각을 냈다면 의심이다. 


그러면 ‘스승님의 말씀도 맞고 부처님의 말씀도 맞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無!!!’ 할 때는 없다는 뜻이 아니다. 


‘無!!!’, ‘없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게 무슨 소식인가? 이게 무슨 소린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이 無라는 말이.” 


그냥 우리는 글자로 그대로 해석하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無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알음알이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無라 … 無라 … 無라 …’ 이게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배겨가지고 삼켜도 안 넘어가고, 캑~캑~해도 안 뱉어지고, 물을 마셔도 안 빠지고, 밥을 먹어도 안 빠지고, 전화를 받아도 따끔따끔하고, 애기를 해도 그렇고, 자도 잠시 놓친 것 같지만 따끔따끔하고, 마치 목에 생선가시가 배겨서 무슨 일을 해도 늘 그기에 신경이 가는 것처럼 앉으나 서나, 오나 가나, ‘無라 …’ 일체의 다른 알음알이가 다 끊어지고 오직 ‘無라 …’ 


“이게 도대체 무슨 소식인가 이게? 없다니, 없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 이게?” 이렇게 참구해 들어가야 된다. 


(여기에 법륜스님은 간화선의 화두 참구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어야 되고 그래야 되는데

“스님 화두 하나 주세요.” “나는 무자 화두 하나 받았습니다.” 

‘無라 …’ 내 딴 생각하고 앉아 있다가 ‘어, 無라 …’ 하다가 밥 먹다가 잊어 버리고, 길 가다 잊어 버리고, 잠 자다가 잊어버리고, 얘기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래서 하는 얘기가 “스님, 화두가 안 들리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안 들리는데 뭐 때문에 자꾸 그거 들을라고 하는데?”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어야 화두다. 내려 놓을래야 내려 놓을 수가 없어야 그게 화두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관념의 세계로 빠진다.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분별의 세계, 어떤 자기 생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 이게 뭐가 된다? 사구(死句)가 된다. 


그러니까 이 스님은 그런 진지함 속에서 스승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대로 탁 그기에 몰입이 됐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그래서 깨쳤다고 하니까 나도 무자 화두 들고 깨친다고 무라~ 하다가 잊어버리고 무라~ 하다가 놓쳐버리고. 이게 이제 자기 밥을 먹어야 되는데, 자기 밥상을 챙겨야 되는데 남이 먹다가 버린 쓰레기통 뒤는 거다. 이 책 저 책 뒤져가지고 그걸로 자기 거를 삼으려고 하는 이게 사구(死句)라 한다. 이건 죽었다. 이건 살아있는 활구(活句)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에 진지해야 된다. 진지해야 참구(參究)가 된다. 연구(硏究)가 된다.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참선을 하면 부처님 말씀을 부정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게 된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되 우리는 그 글자에 얽매이면 안 된다. 진짜 깊은, 해석적 의미로 깊은 뜻이 아니다. 참구(參究)에 들어가야 된다. 실제와 결합해서.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실제와 결합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그러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불성이 있나 보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아이고 불성이 있구나” 이건 그냥 하나의 相에 불과하다. 절에 다니면 좋다. 부처님 믿으면 복 온다. 많이 베풀면 좋단다. 이것은 하느님 믿으면 천당 간다. 아미타불 부르면 극락 간다. 이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다. 이거는 믿음의 분상(粉狀), 종교의 분상이다. 이거는 꿈속의 소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좋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실천이 잘 안되고, 매일 나누기 할 때도 생각으로 지어서, 7식에만 머물러 “내 마음이 이러니 저러니~” 하고 다음에도 똑 같은 정도의 연속입니다.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럴까?”, “내가 이러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그럴까?”, “정말은 옳은 건가?”에 대한 깊은 자기 탐구는 사실은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도에게 쫓기는 사람이 “부처님 나 살려주세요. 하느님 나 살려주세요.” 해서 살려줬다. 나를 구원해 줬다. 그래 너무너무 고마워. 아무리 고마워도 이건 어디의 세계다? 꿈속의 세계다. 눈을 뜨면 강도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다. 이게 붓다의 가피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피며,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다. 바로 눈을 떠야 한량없는 가피를 얻게 된다. 바로 내가 부처님과 다름없는 그런 자유, 행복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천금을 주고도, 어떤 지위를 주고도,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이건 비유가 될 수 없는 얘기다. 그건 다 꿈속의 얘기 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깨달음의 맛을 봐야 된다. 이게 바로 내가 불자인, 내가 불자일 수 밖에 없는 정체성,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도 형식마저도 뛰어넘는 세계이다. 그런 相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다시 그런 형식마저도 다 수용하는, 그 뭇 중생들의 온갖 복을 구하는 그 어리석고 애절한 마음도 다 받아 수용하는 다시 이 세상으로 오게 된다.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에 서지만, 그러나 죽었다고 하면 울고 태어났다고 하면 웃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돌기 때문에 봄이라 한다고 특별할 것도 아니고 가을이라 한다고 특별할 거 아니지만, 봄은 봄대로 좋아하며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좋은 이런 세상에 노닐게 된다. 


(여기에 법륜스님은 다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맛을 봐야된다.”) 


그러니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하는 말은 ‘일체는 五蘊이다’하는 말과 같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진리다라는) 그 말을 하나의 상으로 지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내 삶에서 작용은 안 한다. 그러니,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스승이 無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분별심으로 “없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된다. “틀렸구나” 이게 아니다. “소승교설은 틀렸구나” 이렇게 가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대립된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이게 지금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할 때 “없다”라고 하는 스승의 말씀은 그 법집을 지적한 거다. 그 때 다시 우리는 이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그 의미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無라…’ 이 무슨 소식인가? 지금까지 아는 알음알이 그런 것으로는 이게 답이 안 나오는 얘기다. 그래서, 눈멀고 귀먹었다고 말하는 거다. 여기 바로 이 깨달음의 세계, 공의 차원에서 볼 때, [오온이다. 오온은 色受想行識이다. 色은 뭐다. 뭐다.]이런 얘기로는 안 되는 얘기다. 그래서 바로 空中無色 無受想行識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것이 갖는 의미가 뭐냐? 이게 무슨 소식인가?” 이렇게 들어가야지 ‘아~ 오온설은 틀린 것이구나 이것은 수준이 낮은 것이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된다. 그래야 이게 회통(會通)이 된다. 소성과 대성의 선이, 이상과 현실이, 번뇌와 보리가 통일되는 둘이 아님을 아는 이런 경지로 우리가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설명을 할 때, 우리가 소승교설을 알고 소성교설은 그대로 진리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法相이 된다. 바로 法相을 짓고 法執에 빠진 사람에게 앞에 실체가 없음을 ‘無라’ 함으로 해서 화들짝 깨어나도록 한 거다. 이게 바로 ‘반야바라밀다’다. 꿈에서 깨는 소식이다. 꿈속에서 복 받는 얘기하는 게 아니고, 꿈속에서 구원 받는 얘기하는 게 아니라, 꿈에서 확 깨어나는 소식이다.



덧글: 이 강의에서는 선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선사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없다(無).”고 한 것에 대해,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타파하게 되면 견성(見性)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無!!!", "오직 모를 뿐!!!"의 진수를 한 번 다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면, 군대에서 사단장님이 여기 땅을 파라면 "네"하고 파고, 또 다른 중대장님이 와서 "여기가 아니야 저기 파라"면 "네"하고 여기 메꾸고 또 저기 팔 수 있는, 아무런 모순 없는, 이래도 맞고 저래도 수용할 수 있는, 그래서 내 마음이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할 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긍정의 힘입니다. (마음 속으로는 '아닌데~' 하면서 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한편, 그 반대로 누가와서 "이렇게 해라"고 하면 "네"하고 대답하고 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늦게 결혼 못한 자식에게 매번 부모가 "결혼하라"고 채근하면 잔소리한다고 부모와 다투지 않고 대답은 긍정으로 하되 내가 나의 인생을 사는 방향으로 갈 수가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게 동산도 서산도 아닌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 텅비었지만 생생하게 알아차림이 있는, 공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럴려면 깨달음의 맛을 봐야합니다. 초견성이라도 해야합니다.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찰나찰나에 알아차리고 내려놓음이 현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다만 그것으로 보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에 오염된 망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것이 실체다, 객관이다고 보고 분별하고, 화내고(미워하고), 싫어하는 세계를 늘 살고 있습니다 는 말입니다. 또한 반야심경을 좀 공부하고 이해할 즈음 또 하나의 상(법상)을 지어 상대의 다른 점을 그냥 '봐내지 못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지보다 더욱 고치기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면, 추앙하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또하나의 철옹성같은 관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컴퓨터를 오랫동안 쓰면 자주 다운이 되어 재부팅하는 것처럼 reset 기능을 자주 활용하여야 합니다. 생각을 쉬어야 합니다. 이게 명상입니다. 필요하면 아예 포맷시키고(싹 지우고) reload 해야 합니다. 생각이전으로 가야합니다. "無!!!", "오직 모를 뿐!!!" 이게 선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