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대승의 공사상 입장에서 본 소승교설의 비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소승 수행자에게 대승 수행자인 관자제보살이 비판하여 바로잡고 있다. 소승의 가르침은 나와 이 세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5온, 12처설, 18계설이 있다.
[오온설]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의 일부이다. 이 무한한 세계 가운데서 나라고 하는 것은 정말 티끌같이 작은 존재다. 동시에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라고 하는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세계이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이 세계에 대해서 달리 그리고 있다. 이 세계가 똑 같은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사람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달리 그리고 있다. 옛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다. 이런 얘기다. 그러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세계, 자기식대로 알고 있는 세계가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다. 그러니 이 세계는 내 속에 있다.
나는 이 세계의 일부고 이 세계는 다시 나의 일부다.
이거 정말 묘한 도리다. 세계는 한 없이 많은 티끌로 구성이 되어있다. 티끌이라는 것은 이 세계의 일부다. 그런데 ‘그 티끌 가운데 하나의 티끌에 이 세계가 다 포함이 되어있다’라고 하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아주 작은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 이런 말이다. 이 세계는 내 마음 가운데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일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나와 이 세계를 통틀어 일체라고 하는 것은
1. 첫째는 물질세계다. 이 세계는 물질세계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그 물질로 이루어져있는 나의 육신이다. 이것을 ‘색(色)’이다. 이렇게 말한다. [색, 물질세계] 그러나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곧 내가 알고 있는 세계, 내 마음 가운데 그려진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러한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되어있다. 아니면 물질을 대표해서 이 육신이라면, 육신과 마음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이 물질세계 또는 육신을 색이라 하고 그러면, 정신세계, 이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세계를 담고 있는 그 정신세계,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4가지로 나눈다.
2. 우리가 이 세계를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계를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 것으로 해서 나에게 받아들인다. 이게 五感이다. 여기에 한 개 더해서 머리로 생각하는. 이렇게 해서 받아 들이는 작용, 외부의 정보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이게 ‘수(受)’다. [수, 감수작용]
3. 이걸 받아들여서 그 정보를 저장을 한다. 통과하는 게 아니라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쌓이게 된다. 저장을 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다시 기억해 낸다. 저장했던 것을 도로 꺼내 쓴다. 그 기억해 내는 것, 그래서 그걸 가지고 생각을 해 낸다. 이것이 ‘상(相)’이다. [상, 생각, 표상작용]
4. 그러니까 바깥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되살려내고 다시 그것이 바깥으로 나간다. 정보를 생산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작용에서는 의지작용. ‘뭐를 해야지’ 하는 의지작용. 뭘 하고 싶고 어떤 충동에 의해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또 상당히 지혜롭게 뭘 행하는 것도 있고. 우리 중생의 의지작용은 대부분 충동에 의해서 일어난다. 하고 싶은 거 하기 싫은 거 이런 거에 따라서 행한다. 이게 ‘행(行)’이다. [행, 의지작용]
5. 이러한 결과로 소위 정보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이게 정보가 분별되어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걸 ‘식(識)’이라고 한다. [식, 요별작용, 정보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정보가 분별 돼 있는 하나의 그릇]
그러니까 이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컴퓨터로 말하면 프로그램과 같은 거다. 정신작용에 있어서 가장 토대다. 이 프로그램이 어떠냐에 따라서 똑 같은 정보가 들어와도 똑같은 기억을 해도 달라진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감수작용이지만 이 기존에 깔려있는 (업)식, 이 프로그램과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가 반응을 하면서 쾌-불쾌가 일어난다. 몸에도 감각이 일어나고 마음에도 feeling이 일어난다. 이게 ‘수’다. 수는 바깥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되지만 그러나 이 기본토대 업식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정보가 들어오면 똑같이 반응을 해야 되는데 반응은 다 달라진다. 그것은 각자 자기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형성되어-진 토대가 있다는 말이다. 이미 형성되어-진 토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의 정보가 자꾸 달리 들어오면 반응이 달라진다. 토대가 없다면 외부의 동일한 정보가 들어오면 동일하게 반응할 거고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달리 반응한다. 그러나 토대가 있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지면 반응을 달리한다.
그래서 우리가 동일한 곳에 가서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듣고, 동일한 것을 맛보고, 동일한 것을 감촉해도 그 사람의 느낌이 다르다. 왜 그럴까? 이미 그에게 형성되어있는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일한 업식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이곳을 갔을 때 저곳을 갔을 때 느낌이 다르다. 왜 그럴까?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이것도 ‘수’고, 그게 반응하는 느낌 몸에는 감각이고 마음에는 feeling, 이것도 ‘수’다. 이 기본 토대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가 들어와서 일으키는 생각도 다르다. 또 그 느낌에 반응하는 맹목적인 충동의 이 행도 달라진다. 그러기 때문에 밖에서 어떤 정보가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안에 있는 그것에 반응하는 기본토대 이 업식이 어떠냐? 이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이 색하고 다음에 식이 와야 된다. [색-식-수-상-행] 이렇게 순서를 매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색-수-상-행-식] 이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반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행동을 하는 그렇게 생산되어-진 것이 또 저축되는 게 어디다? 식이다. 그래서 이 업식이 조금 바뀌게 된다. 그 과보, 그 행위의 결과물로 다시 쌓여서 그 프로그램이 조금 변화가 된다. 다시 말하면, 요즘 말로 프로그램이 조금 업그레이드 된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일체는 오온(五蘊)이다. 이러한 五蘊 밖에서 진리를 찾아서는 안 되고 또 나라고 하는 것도 이 오온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어떤 독립된 실체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게 구성이 되어있고 이것이 계속 변한다. 바깥 경계도 변하고, 쉽게 말하면 우리의 몸도 변하고 이 우주도 변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 느낌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일어나고-머무르고-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의지도 항상 일어나고-머무르고-사라진다. 생멸을 거듭한다.
그러면 이것의 토대인, 마음작용이 토대인 식은 이것도 사실은 형성되어-지고, 현재 머물러 작용하고 있고, 또 업식은 앞으로 바뀌어 나간다.
그러니까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 업식이 있는 사람은 바깥에 [담배]가 있고 그걸 [눈]으로 보고 그러면 아주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우]게 되고 그러면 다시 그 결과물로 [습관]이 더욱더 형성이 되어-진다. 그러면 이 담배를 피우는,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이 기본은 담배 피우는 습관이 내면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불멸한 건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라질 수도 있다. 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식이라 하는 것도 항상하는 게 아니다. 원래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불법에서 말하는 열반, 지고한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런 행복과 다른 거다. 우리는 욕구가 있어서, 바라는 바가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다. 그 기분이 좋은 게 뭔가? 행복이다. 근데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가라앉고 나쁘다. 이게 불행이다. 근데 우리는 이 불행은 싫고 행복은 원한다. 이 불쾌는 버리고 쾌만 얻으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들뜬다. 기분이 좋을 때는 마음이 들뜬다. 팔짝팔짝 뛴다. 너무 좋으면 만세를 부르고. 그런데 바라는 바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하는 게 아니고 이 바라는 바 차체가 사라져버렸을 때, 바라는 바에 전혀 내 마음이 구애를 받지 않을 때, 그때는 쾌도 없고 불쾌도 없고, 행도 없고 불행도 없는 세계, 그런 내 욕구에 구애 받지 않고, 경계에도 구애 받지 않는 상태, 그때는 마음이 들떠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어떻다? 고요하다. 마음이 평정된 상태다. 그래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그게 지고한 행복에 속한다.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는 행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행복을, 열반을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행복과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을 구한다. 불교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버림으로 해서, 욕구의 속박에서 벗어남으로 해서 지고한 행복인 ‘열반’에 들어야 하는데 그 욕구가 충족이 돼서 얻는 그 기쁨과 혼돈하기 때문에 “부처님 내 바라는 대로 좀 해 주세요.” 그게 이루어지는 게 극락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불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세상에 사는 중생은 늘 자기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길 바라는가 안 바라는가?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스님도 그걸 바라는가 안 바라는가? 바란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데로 안됐을 때 원하는 데로 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 드는 거다. 이거는 중생의 세계다.
이거는 늘 행과 불행이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세계다. 윤회의 세계다.
그러면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건 바로 자신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기에 마음이 구애 받지 않게 된다. 그래서, 행도 불행도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쾌와 불쾌가 함께 사라진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거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난 세계, 열반]
열반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버린다. 이것은 불행으로 바뀌는 그런 행복이 아니다. 이것이 열반인데 이 열반을 우리식대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의 어떤 사고의 근저, 사물을 보는 세계관, 어떤 철학 여기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것만의 그것이라고 하는 그 어떤 요소 이걸 기초로 두고 우리가 이세상을 이해한다. 이 말이다. 그러한 자신의 업식, 자신의 세계를 보는 그러한 눈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와야 되는데 그 안경을 끼고 불법을 본다. 그래서 이렇게 요소설에 빠졌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됐다. 그래서 첫 번째 앞에 무자를 붙여서 그 법에도 실체가 없음을 다시 깨우치고 있다.
두 번째 소성교설의 중요한 것 하나가 12처설이다.
[12처설]
일체라고 하는 것,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아는 세계다. 그러면 내가 아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눈이 있고 바깥에 모양과 빛이 있어서 봄으로 해서 아는 거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어서 들어서 아는 거다.
코가 있고 냄새가 있어서 냄새 맡고 아는 거다.
혀가 있고 맛이 있어서 맛보고 아는 거다.
몸이 있고 감촉이 있어서 만져서 아는 거다.
머리(뇌)가 있고 뜻이 있어서 알음알이로 아는 거다.
그래서 이 바깥 세계를 사실은 내 몸에 있는 이 6개의 감각기관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을 근본이다. 뿌리다. 6근이다.
[육근, 여섯가지 감각기관, 인식기관, 眼耳鼻舌身意]
그러면 여기에 대응되는 인식의 대상, 객관세계, 여섯 가지 경계, 6경이다.
[육경, 인식대상, 객관세계, 여섯 가지 경계, 色聲香味觸法]
이것이 만나서 우리들의 앎이, 우리가 아는 세계가 형성되어-진 거다. 이 세계라는 거는 별거 아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맛 보지도 못하고, 감촉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면 그런 세계는 있나 없나? 없다. 우리가 뭐라뭐라고 해도 다 그것은 눈으로 봤거나, 들었거나, 냄새를 맡았거나, 맛을 봤거나, 감촉을 했거나, 아니면 생각을 했거나 그 밖의 따로 세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일체라고 하는 거는 이 12가지다. 그래서 이것을 12처다.
그런데, 이 두 개의 5온설, 12처설 이게 핵심인데, 이 오온은 정신에 비중이 높고, 12처설은 유물론 비슷하다. 12처설에서 볼 때, ‘나’라는 것은 별거 아니다. 내가 아는 세계라는 거는 바깥세계가 눈으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고, 코로 들어오고, 혀로 들어오고, 몸으로 감촉되고, 머리로 알음알이 되는 그거다. 이것만 갖고 설명을 하면 우리는 동일한 환경에 가면 동일한 세계가 형성이 된다. 이렇게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동일한 환경에서 사람을 키우면 동일한 인격이 형성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 본 게 똑같고, 들은 게 똑같고, 냄새 맡은 게 똑같고, 맛본 게 똑같고, 감촉한 게 똑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가까운 관점이다. ‘우리의 의식은 형성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의 의식을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바깥세계가 바뀌지 않으면 늘 그기에 영향 받기 때문에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사회가 바뀌어 버리면 인간의 의식은 따라 바뀐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이 사회를 정의롭게 바꿔버리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회혁명을 사회를 바르게 하는데 집중을 하는 거다.
그에 대해서 종교인들은 세상이 어떻든지 간에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러니까 세상문제를 가지고 얘기 하지 말고 네가 어떻게 할 거냐? 그러니까 너만 잘하면 너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종교는 주로 개인문제를 중요시 다뤘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로 사회주의는 사회문제를 주로 중요시 다뤘다. 그러니까 이 둘이 앙숙으로 싸운다. 한쪽에서는 유신론, 무신론으로 기독교에서는 상대를 보고 우리는 유신론이고 너희는 무신론이다. 사회주의 쪽에서는 자기는 유물론이고 이쪽은 관념론이다. 이렇게 해서 갈등을 일으켰다.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
마르크스, 엥겔스는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의 형이상학적(비변증법적)인 성격과 헤겔의 변증법의 관념적인 형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여, 유물론의 최고 형태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립했다. 이에 의하면 세계의 본질은 스스로 운동하고 발전하는 물질이다. 의식(사고)은 그 하나의 발전 단계로서의 특정한 유기적 물질(뇌수)의 소산이며, 인식이란 인간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 물질의 모사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이 인식 활동도 포함하여 서로 연관하는 모든 과정의 통일이며 모순을 내포하고 질적인 비약을 포함하여, 저차의 것으로부터 고차의 것으로 향해 나아가는 무한한 발전 과정이다(→ 변증법).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 사회에 적용되어 사적 유물론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러니까 불법은 그렇게 2개로 나누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어-진다. 이런 요인도 있다. 반대로 자기의 업식이 어떻느냐에 따라서 똑 같은 환경에 대해서도 달리 반응을 한다. 이런 요소도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있다. 그래서 원리를 설명할 때도
인(직접적인 원인)+연(간접적인 원인, 조건)=과보
라 한다. 그러니까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원인이 작동하는 주위 환경이 어떠냐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성냥불을 버렸다. 이게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그때 주위에 인화물질이 있었느냐? 주위가 그냥 시멘트바닥이냐에 따라서 내가 원인을 제공해도 그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또 똑 같은 조건이지만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똑 같은 인화물질이 있는 그런 환경이었지만 성냥불을 버리지 않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 거고 성냥불을 버리게 되면 불이 일어난다. 한가지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존재도 나로부터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게 있고 세계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게 있다. 이 양자가 동시에 작용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철학은 그 중에 한 개만 가지고 논한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아니야 악하다. 이렇게 대립을 한다. 불교에서는 선한 요소도 있고 악한 요소도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거는 불교를 조금 덜 이해한 거다. 둘을 동시에 본다는 건 맞는데 더
근본적으로는 본질에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악하다고 말한다. 선과 악은 우리들의 의식에서 형성되어-진 거다. 이렇게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십이처설은 환경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십이처설, 환경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측면을 설명]
오온설은 이 식이 느낌과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까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달리 반응이 일어난다.
[오온설, 우리들의 내면 세계에 주로 더 초점이 맞추어 설명]
이 두 가지가 각각 다 진리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보완해서 다시 설명한 것이 ‘18계설’이다.
[십팔계설, 오온설과 십이처설을 보완한 것]
12처설만 갖고 설명을 하면, 6근과 6경으로만 보면,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것을 보면 동일하게 느껴야 되는 데 안 그렇다. 왜 그러냐? ‘보는 놈’이 있다. 그 ‘보는 놈’이라는 것은 어떤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똑 같은 걸 보더라도 다르다. 이미 각자에게 형성되어-진 업식이 있다. 보는데 작용을 하면 안식이라고 하고, 듣는데 작용하면 이식이라고 하고, 이렇게 6가지 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18가지고 이걸 설명을 하면 좀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이게 18계설이다.
[여섯 가지 인식기관 6근] + [여섯 가지 경계, 인식대상 6육경] + [형성되어-진 업식의 인식활동 6식]
그래서 식에는, 보는 안식 - 듣는 이식 - 냄새 맡는 비식 - 맛보는 설식 - 감촉하는 신식(전5식) -생각하는 의식(제6식). 5가지는 몸뚱이에서 바로 작용하기 때문에 전오식. 이렇게 말한다. 여섯 번째가 의식, 이렇게 해서 식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육식이라고 한다.
[전오식, 보는 안식, 듣는 이식, 냄새 맡는 비식, 맛보는 설식, 감촉하는 신식, 생각하는 의식]
그런데 제 6식, 제 여섯 번째 식을 말할 때는 그것은 의식을 말하는 거다.
의식=제6식, 6번째 식이다.
그런데 식에는 이렇게 의식만 있느냐? 즉 6가지 식만 있느냐? 아니다. 식에는 7번째 식, 8번째 식이 있다. 그러니까 6번째 식을 표면의식, 드러난 의식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잠재된 식이 있다. 그기에 제7식과 제8식이 있다. 잠재의식, 무의식(제7식; 말라식, 제8식; 아뢰야식 阿賴耶識)이 있다. 서양은 19세기에 개념이 도입된다. ‘프로이드, 꿈의 해몽’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 阿賴耶識 ]
불교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앞의 다섯 가지를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번째의 식(識)을 제6 의식이라고 한다.
전5식은 자체로서 판단•유추•비판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나’라는 주관이 외부의 객관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일 따름이다. 전5식은 제6 의식에 의하여 통괄되며, 자신이 수집한 갖가지의 정보를 이 제6 의식에 보고하는 기능을 가졌다.
제6 의식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은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가 제6 의식, 둘째가 제7 마나스식(Manas識), 셋째가 제8 아뢰야식이다. 현대심리학에서의 구분방법에 따르면 제6식은 의식의 세계이며, 제7식과 제8식은 무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원적인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보았다.
아뢰야식이라는 무의식의 바다는 모든 종자(種子)를 갖춘 가능성의 바다이다. ≪성유식론 成唯識論≫에서는 그 가능성을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의 셋으로 요약하였다. 능장은 만물을 인식하는 근본원인을 담아 두었다는 뜻이다. 소장은 다른 일곱 가지 식에 의하여 판단된 모든 정보를 훈습(薰習)한다는 뜻이며, 집장은 오래 전부터 상주하기 때문에 제7 마나스식에 의하여 진실한 자아인 양 집착하고 오도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모두가 궁극적 근원으로서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 마음의 세계를 규명하는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불교수행의 과정을 아뢰야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세 단계로 설명하였다. 철학적 입장에서 아뢰야식을 가장 잘 분석한 경론으로는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이 있다. 아뢰야식의 자리를 일심(一心)의 진여문(眞如門)으로 보고, 그것이 7식과 6식을 거쳐 전5식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생멸문(生滅門)이라고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전개된 것이 바로 삼라만상이라고 설명하였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와 ≪별기 別記≫를 통하여 이 아뢰야식의 전변(轉變)과 추이를 철학적으로 논구한 바 있다. 즉 8식은 함장식(含藏識)으로서 선악을 포용하는 거대한 바다와 같다고 보았다. 그러나 7식은 에고(ego)의 의식에 의하여 좌우되는 아만(我慢)의 마음이며, 6식은 탐진치(貪瞋痴)로 나타나게 되는 생멸적 작용(生滅的作用)을 거듭한다고 보았다.
이것을 본시양각(本始兩覺)으로 설명하면, 불각(不覺)이 된다. 그러나 불각에서 깨달음을 추구해 들어가는 과정은 시각(始覺)이 된다고 하였다. 즉, 원효의 기본적 입장은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파악한 것이며, 그 철학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 제8 아뢰야식에 대한 그의 논구(論究)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경우, 제8 아뢰야식 다음에 제9 말라식(Mala識)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경우는 위에서 설명한 8식이 9식으로 전용(轉用)되는 경우이다. 신라의 원측(圓測)은 이 제8 아뢰야식에 관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중국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단시됨으로써 많은 저술들이 인멸되었다.
(중국유학을 가지도 않은,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의 저술 ‘대승기신론소’는 지금까지 선불교의 연구가(중국, 한국, 일본)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의식 밖의 따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의식에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음의 작용. 이걸 뭐라고 했다? 신의 소리라고 했다. 이런 서양에서 진행되어온 과정을 보면 부처님은 이미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뭐 내가 우주를 운행을 하고…’ 이런 말이 없다.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 이런 얘기도 없다. 우주는 이러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다음 이 생명에 대해서도 생로병사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정신작용이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마음은 형성되어-진 것이다. Karma, 전생으로부터 와서 “너는 이렇게 살아라”하고 정해지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 지금까지 신의 뜻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 거. 태어날 때 사주팔자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 거. 전생에 내가 한 행동에 의해서 벌받듯이 살아야 되는 거. 이게 다 숙명론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이러한 업이라는 것은
형성되어-지는 것이기 그것은 때문에 소멸되어-진다.
즉 팔자는 바꿀 수 있다. 나의 운명을 내가 바꿀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이 ‘괴로워라’고 누가 정해줘서 괴로운 게 아니다. 내가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어떻게 작용 하는지 지금 이렇게 보듯이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 다 마찬가지다. 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원리를 앎으로 해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다. 이런 것들은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다. 이거 자체는 수행법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 여기에 기초해서 이제 우리가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소위 사성제 수행법 같은 것, 팔정도 수행법 같은 거는 이런 세계, 이런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해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핵심은 이러한 것들을 잘못 이해해서 마치 12처설을 12요소설로 이해했다. 이 말이다. 이 세계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12개의 요소로 구성이 돼있고 그것의 관계로 이 세계는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각각을 불변의 요소로 이해해 버리면 이게 요소설이 되버린다. 이건 불법이 아니다는 거다. 그래서 앞에 무자가 붙은 거다.
空中, 공의 세계에서, 본질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볼 때, 아니라 할 것도 이거라 할 것도 그런 근본실체는 없다. [無안이비설신의, 無색성향미촉법]이 12처설을 잘못 이해한 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無안계~無의식계]는 18계설에 대한 지적이다. 18계설이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계’자가 붙었다. 여기서 乃至 에 16개가 생략이 된 거다. 안계에도 실체가 없고 (다 생략하고) 의식계에도 실체가 없다. 이렇게 해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我見과 相見의 관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부분을 대승보살의 입장, 깨달음의 입장에서 다시 교정을 했다. 그래서 앞에 無가 붙었다. 그러니까 소승교설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일부 수행자들이 잘못 이해했다. 그 잘못 이해한 사람을 뭐라고 이름 붙였다? ‘소승’이라고 이름 붙였다. 잘못 이해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르게 이해돼야 된다.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덧글;
대승기신론소의 제8식, 아뢰야식이 나와서 몇 자 올립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여러갈래가 있고 그 중에 간화선은 화두공안 타파입니다. 전등록,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에 나오는 화두 1,700칙(則)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중에서 하나의 공안만 타파해도 나머지 거의 대부분이 저절로 풀린다고 합니다.
① 간화선의 원리는 [알 수 없는 마음, 알고는 싶지만 무엇을 알고 싶은지 모르고 알고 싶은 마음, 알음알이는 소용없음, 눈이 멀어 버리고 귀가 먹어 버림, 참구, 의심(일반적인 의심과 좀 다른 개념)하는 마음 -> 의정, 의심의 감정화 -> 의단독로(疑團獨露), 은산철벽(銀山鐵壁), 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 화두(공안)타파, 꿈을 깬다, 생각이전, 차원이 다르다, 시공간을 초월한다, 절대의 세계다, 텅 비었다, 공이다, 삼매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다.] 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② 간화선과는 달리 (깨달음의 원리는 같다) 업장소멸을 해탈이라고 볼 때, 여기서의 ‘업장’은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컫는 제8식, 일심(一心)의 진여문(眞如門), 무의식을 말하고,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일으키는 생멸문(生滅門)을 통해, 7식 -> 8식, 즉 분별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내면속 깊은 무의식의 자리를 본다, ‘내려놓는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 마음의 본래자리, 불성(佛性), 본래 맑은 물(물들지 않음, 본래 청정함), 마음바탕, 마음의 여백의 자리를 찾는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게 회광반조(廻光返照)입니다.
③ 그런데 ①과 ②가 모두 결국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공통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자기의 마음의 본래자리, 참나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반조선(返照禪)이라고 합니다. 반조선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어 선불교가 자리잡기 전에 달마조사부터 승려들이 주로 수행하던 방법입니다. 수행자가 일정기간 수행하다가 고승을 찾아가 점검을 받을 때 고승의 한 마디에 깨쳤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주고받는 법거량을 모은 것이 화두공안이 되고 간화선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④ 조사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고 하지만 - 명상 그 자체로 봐서는 그럴 수 있지만 - 출가자가 아닌 일반인이 생활참선으로 가까이 하기엔 그리 만만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간화선은 한국 선불교의 수행도량에서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선택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이라 사려됩니다. 개인의 근기, 상황, 조건에 따라서는 아무리 좋은 수행법이 있더라도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음식이 체계적인 레시피가 없듯이, 간화선 역시 선지식으로부터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듯...) 이런 차원에서 요즘은 재가불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수불스님이 대표적, 참선의 대중화에 기여) 선원(안국선원, 용화선원 등)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주변에 있는 선원에 찾아가는 것 조차 쉽지않아 다른 방법을 찾다 보니 초기 중국승려들이 주로 했다던 관법(일몰관)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봉암사 적명스님의 소개(법문 참조)로 알게 되었는데, 선정을 하기 위해 마음속에 그린 밝은 원을 바라보는 겁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이것의 용어 ‘니밋타’라고 하던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적명스님은 '까시나' 라고 하심) 같습니다. 이것은 보려고 해서 봐지는 것이 아니라 단전호흡에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나타나게 되고 보는 중에도 보려고 하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을 보다보면 어느덧 호흡도, 몸도, 니밋타도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밝음이나 어두움이 뒤덮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영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들려오는 소리가 이전과 달리 확연하게 들리는...아니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들리는 경험도 하고, 호흡이 매우 거칠게 진행되다가 어느새 밖의 호흡이 단전과 바로 연결된 것과 같이 쉽게 진행되는 (뻥뚫린)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마치 몸의 안과 밖이 하나가 된듯합니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현상이 있지만 (④항 포함하여)깨달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생략하겠습니다. 예컨대 혜민스님의 강의에 따르면 생각이전의 자리는 그러한 생각마저 초월하여 존재하는 텅 비었지만 생생한 알아차림만이 있는 자리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불성과 망상을 보는 관점(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능력, 마음살핌, 알아차림, 지켜봄)은 이전과 좀 다르다는 정도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제가 개인적으로 공부하여 정리한 것이고 경험에 의한 것이므로 정법과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 본인이 꼭 확인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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