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1)
지난번 시간에 무상에 대해서 공부했다. 이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 하고 우리의 육신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며 우리의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이 생명적인 것이든,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하는 것은 없다. 다 변화한다.
無我, 我라고 할 것이 없다. 이 얘긴데 먼저 我라고 하는 것이 뭔가?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도말로는 아트만(ātman)이라고 한다. 첫째 ‘我다’할 때 제일 쉽게는 ‘나다’하는 거다. 우리들 각자 ‘나다’하는 게 있다. 이 나라고 하는 그 어떤 것은 남과 분명히 구별되는 나다. 남하고 구별 안 되는 나는 의미가 없다. 남과 구별되고 나만의 나이고 변하지 않는 나이고 그래서 윤회라고 할 때도 내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나 이곳에서 저곳을 갈 때도 모양은 바뀌고 형태는 바뀌더라도 나라고 하는 영혼,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 이게 바뀌어버리면 의미가 없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걸 전제로 해서 이 모든 것들이 성립한다. 창조설이라는 것도 나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윤회설도 나라고하는 남과 구별되고 나만의 나이고 단독의 나이고 불변하는 나이고 그런 나가 전제되어야 의미가 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가 탐구해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탐구하지 않고 있다라고 전제하고 살아가고 있다. 모든 철학 사상이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과연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이 뭣고?]”
이것이 근원적으로 탐구가 되어야 된다.
어떤 스님이 산 넘고 물 건너 진리를 찾아 수 없는 길을 걸어서 스승을 찾아왔다. 스승에게 찾아와서 진리에 대해서 묻고 배울 것이 한 없이 많았다. 드디어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스승의 처소에 왔다. 그래서 스승께 인사 드리기 위해서 스승의 방에 들었다. 문을 열고 한 발을 딱 들여놓는데 스승이 벽력(霹靂)같이 고함을 쳤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오기는 왔다.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난관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육신이 왔습니다.” 시체만 왔다는 건가? 아무개라는 이름을 대며 “아무개가 왔습니다.” 이름이 왔다는 건가? “정신이 왔습니다.” 귀신이 왔다는 건가? 우리는 물론 쉽게 대답을 한다. 보통 이름을 댄다. “아무개가 왔습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그것으로는 올바른 말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너 누구냐?” 하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할말을 잃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언가? 나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진리를 논할 수 있는가? 그는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7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스승께 인사를 드리고 스승님 설령 한 물건이라고 불러도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령 한 물건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우리 선종의 초기 스승들의 면담에 보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우리도 생각해 보자. 나-나-나 하는데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아내입니다. 남편입니다. 자식입니다. 딸입니다. 아들입니다. 사장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은 다만 조건 속에 주어진 거다. 우리가 버스를 타면 승객이다. 가게에 가면 손님이다.
오 류 : 11강 파일 오류로 인해 내용확인 불가능. 보충자료 별도 업로드. (법륜스님 정토원 강의 17강, 도올 김용옥 강의 15, 17강)
움직이면서 강력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법칙과 전혀 다른 새로운 힘 (?)력에 의해서 결합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렇게 자꾸-자꾸-자꾸 깊이 들어가면서 원자라는 것은 수 많은 더 적은 것들 전자다 양성자다 중성자다 중간자다 이런 것들로 결합되어 있다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소립자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원자는 소립자들의 결합니다.
자~ 이런 데서 결국은 정리해보면 부처님이 무아를 얘기할 때는 우리들의 마음 이걸 중심으로 연구하신 거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인 실체가 있다는 전제 위에 온갖 철학이 성립했다. 하늘에는 브라만이 있고 개개인에게는 아트만이 있고 그 我와 브라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 해탈이다. 범아일여설[梵我一如,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梵, 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我, ātman)는 같다는 우파니샤드(upaniṣad)의 중심 내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깊은 명상과 탐구 속에서 아라고 할 실체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음식을 잘 차리고 불을 피우고 정성을 기우려 공양[뿌자, 뿌자나, pujana, 供養]을 올리면 바로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뿌자를 통해서는 해탈할 수가 없다. 마치 과학자들이 보통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섣부르게 관찰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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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理無語; Gary Moore, 열린 이치, 즉 진리는 말이 필요 없다. 그래서 필요할 경우에 앞으로 나의 필명, 닉네임 뭐 이런 거를 ‘개리무어’로 하는 것이 좋을듯...)
아주 분명하게 관찰하셔서 사실을 밝히신 것처럼 붓다는 우리의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형성이 되며 우리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를 너무나 분명하게 밝히셨다. 이런 불교의 무아의 법칙은 오늘날 과학의 발달과 견주어서 이것을 물질에다 적용을 하고 이것을 생명에다 적용을 했을 때도 무아의 법칙이 그대로 성립한다는 얘기다. 부처님이 물질을 연구해서 설명하고 부처님이 유전인자를 연구해서 설명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붓다의 이 법칙은 사람의 영혼 사람의 마음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생물계에도 적용되고 모든 물질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불교가 너무너무 과학적이구나”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일리가 있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일리가 없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이것은 진실 그대로다.
여기에 우리가 경험적으로 내가 태어나서 내가 경험한 내가 믿고 있는 종교 내가 사는 나라 내가 사는 지역 여기에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한 것으로 우리는 진리로 삼는데 그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그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보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옳고 그름이 생겨난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여기에 큰 산이 하나 있는데 이 산의 왼쪽 기슭에 사람이 살고 있다. 이 왼쪽 기슭에 사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봤을 때는 해가 그 산에서 떠오른다. 그래서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산의 오른쪽 기슭에 사는 사람은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불렀다. 태어나서 한번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 딴 마을에 가본적이 없다. 그런 두 사람이 모여서 대화를 할 때,
“저 동산에서 말이야”
그러니까 한 사람이 “동산이 어느 산인데?”
“저 산”
“그게 어떻게 동산이야 서산이지”
“뭐라고? 그게 서산이라고? 야, 해가 떠는데 어떻게 서산이야?”
“그기서 해가 뜬다고?”
“그기서 해가 지지”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은 동산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서산이라고 하고 밤 새도록 논쟁을 해도 해결이 안 나고 상대편이 정신이상자 같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통 논쟁을 할 때, ‘눈이 삐었다’던지, ‘미쳤다’던지, ‘제정신이 아니다’라던지,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던지, ‘아이고 참자 참아’라던지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로 증거를 보이기로 해서 그래서 한 사람이 증거를 보이는데 해가 뜨는지 안 뜨는지 자연현상을 한 번 관찰해 보자. 아 보니까 분명히 해가 떠. 그 다음 자기 마을에 있는 모든 역사책을 뒤져봤더니 다 동산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다 한 번 물어봤더니 전부 동산이라고 대답을 했다. 다수가 동산이라고 하고 옛날 역사 기록에도 동산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아침에 나가서 봐도 동산에서 해가 뜬다. 그러니 동산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쪽 사람도 증거를 찾아봤더니 모든 역사책에 서산이라고 기록이 되어있고 동네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도 서산이라고 말하고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아무리 논쟁을 해도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다.
바로 이 두 사람이 누구냐? 아내와 남편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보면 너무너무 답답한 거다. “아니 이거 딱 보면 알 수 있는데 왜 이걸 모를까?” 그 남편의 행동이 도무지 얘기가 안 되는 거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어떤 잔소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그런데도 같이 사는 거는 싸우면서도 “싸워봤자 저 뭐 소 귀에 경읽기지” 포기하고 그냥 지나는 거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진정한 이해는 없다. 그냥 적당하게 논쟁해봐야 시끄럽기만 하고 덕이 없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사는 식이다.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남한이고 한 사람은 북한이다. 그래서 여기 남한에서 북한을 얘기할 때 “이해가 안되잖아. 야~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근데 저쪽은 저쪽대로 어떤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다.”
또 한 사람은 한국사람이고 한 사람은 일본 사람이다. 독도를 자기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되나 안되나? 안 된다.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주장이 있고 다수결로 하면 누가 많은가? 일본 사람이 많다. 일본의 옛날 역사 기록에 찾아보면 자기들 땅이라는 게 있나 없나? 있다. 저거는 저거대로 있고 여기는 여기대로 있다. 그래서 이게 서로 안 되는 거다.
또 한 사람은 불교고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다. 얘기 들어보면 “이해가 안되잖아. 야~ 그게 믿어져? 그걸 믿어?” 이렇게 된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창조자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자기 주인도 몰라보느냐?” 이거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로 보면 하나는 여당이고 하나는 야당이다. 또 하나는 진보파고 하나는 보수파다. 지역으로 말하면 하나는 경상도고 하나는 전라도다. 자기들끼리 모이면 항상 옳다. 경상도 사람들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전라도 사람들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야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여당이 어떻고 여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야당이 어떻고 한다. 책을 봐도 옳고 여론을 들어도 옳고…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을 할 때 어떻게 하는가? “길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볼까?” 이런 말이 있다. 이게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 사이의 갈등이다. 옳고 그름을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을 논쟁하고 싸워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 다만 이 마을에서 나오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이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나오면 어떤가? “어, 동산 아니네” “어, 서산 아니네” 이렇게 금방 알 수 있다. 이 얘기다. 나오기만 하면. 바로 그 마을에 갇혀있는 게 我執, 我相이다. 그기서 나오기만 하면 알 수 있다. 동산이라고 했지만 동산이 아니구나 서산이라고 했지만 서산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이산은 동산이라고 했지만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했지만 서산이 아니고 남산이라고 하지만 남산도 아니고 북산이라고 하지만 북산도 아니다. 큰 산이라고 하지만 큰 산도 아니고 작은 산이라고 하지만 작은 산도 아니다. 그건 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이다. 그냥 다만 산일 뿐이다.
그런데 동산 서산 논쟁에서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고 했더니 “아 알았다.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진리를 깨쳤다고 하면 이것 또한 아니다. 비동비서산이냐?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닌 산이냐? 그러면 이 사람은 동산이라는 사람과 또 논쟁을 하고 서산이라는 사람과 또 논쟁을 한다. 왜? 너는 모른다. 너는 못 깨쳤다. 못 깨쳤다고 깨치고 못 깨치는 걸 가지고 또 논쟁을 한다. 이 非東非西山이라고 하는 것이 法執, 法相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버려야 한다.
이 사람은 누가 동산이다 하면 “어, 그래?” 이렇게 대답을 한다. “동산 아니야”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 저 사람이 동산이다 하면 ‘어, 저 사람 왼쪽 동네에서 왔구나’ 서산이다 하면 ‘어, 저 사람은 오른쪽 동네에서 왔구나’ 이렇게 알아버린다. 오히려 상대를 알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동산이다 하는 걸 불법이라고 알고 있다가 동산 아닌 줄 알았다. 그래서 동산 아닌 줄 아는 거를 불법이라고 생각을 하면 큰 오산이다. 그러면 또 동산이라고 하는 사람과 또 싸운다. 우리가 진정으로 불법을 깨달으면 누군가 동산이다 하면 ‘어,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구나’ 이렇게 알아야 된다. 이것이 걸림이 없는 진리다. 이것이 동산이다 서산이다 옳다 그르다 이것이 我요 我다. 그러나 我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이게 법에 있어서의 무아다. 무아는 단순히 무아라고 하는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아라고 하는 지식만 갖고 있으면 비동비서산과 똑같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 체험이 되어있어야 한다. 체득이 되어있어야 한다. 이것이 금강경의
무유정법(無有定法)
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다”할 것이 없는 줄을 아는 것은 이 세상 온갖 사람들이 “이것이다”라는 것까지 다 포용해 낸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온갖 사람들과 걸림 없이 살 수가 있다.
11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1). 정토원 강의 보충
17강 : 無常 無我 空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세음보살님께서 깊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실 때에 “五蘊이 모두 空하다”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
오온은 ‘나’이고 ‘일체’이다. ‘나’가 공하고 ‘일체’가 공하다.
오온은 [色受想行識]이다. 色도 空하고, 受도 空하고~識도 空하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오온의 그 하나하나에 실체가 없다. 無我다. 오온의 그 하나하나는 영원불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無常하다.
오온의 그 하나하나인 色受想行識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나만의 나, 고립된 나, 단독의 나, 독립된 나, 변하지 않는 나, 영원한 나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아니다”라고 할 때는 두 가지를 말해야 된다. 그것은 변하는 것이다. 변하면 영원불멸성이라는 것은 없다. 또 그것은 무엇인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말은 “쪼개진다. 분리된다.”는 말이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말은 “단독자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그것이 실체도 없고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空이라고 할만하다. 이런 얘기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하나의 단어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보통 우리가 “色이다.” 이렇게 말할 때, 가장 좁은 범위에서 볼 때 色은 눈이 보는 어떤 색깔을 말한다. 조금 더 넓히면 눈이 보는 대상은 다 色이다. 색깔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양도 눈에 보인다. 어떤 형상도 눈에 보인다. 이 색깔과 형상을 합해서 色이라고 말한다. 또 조금 더 넓혀서 말하면 눈에 보이는 대상인 색과 귀에 들리는 대상인 소리, 코에 냄새 맡는 대상인 냄새, 혓바닥의 대상인 맛, 감촉의 대상인 촉, 즉 우리가 六根이 감각을 하는 바깥세계의 모든 것들을 色이다.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의 色이 아니고 우리가 감각하는 대상을 말한다. 일체의 감각기관이 감각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色이라고 말한다.
이 色이라고 할 때는 바로 물질세계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물질세계는 고체로 이루어져 있다. 고체로 이루어져 있는 거는 손에 만져진다. 또 물질세계는 액체로도 되어있다. 그것은 혓바닥의 맛을 느끼기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고 손에 만져지기도 한다. 또 물질세계는 기체로도 되어있다. 코에 냄새 맡아지기도 하지만 눈에는 잘 안 보인다. 또 물질세계는 하나의 파동도 여기에 속한다. 그것이 소리다. 아주 짧은 파, 초단파도 엄격하게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빛도 물질이다. 색깔이라는 것은 짧은 파고, 소리라는 것은 긴 파고, 그 다음에 기체, 액체, 고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느낄 수 있는 물질이다. 어째든 이 전체가 다 물질이다. 내가 지금 만지는 대상인 컵은 감각의 대상이다. 눈으로 볼 때는 빛깔과 모양이 보인다. 손으로 만져보면 감촉으로 느껴진다. 두드려보면 소리로 느껴진다. 어째든 이 모든 것으로 인해서 바깥에 감지되는 대상을 色이라고 한다. 어디에서? 五蘊에서. 色聲香味觸法 할 때 色은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형체와 빛깔을 色이라고 한다. 五蘊에서의 色은 그것보다 더 범위가 넓어서 우리가 감각하는 일체의 바깥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色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작용을 제외하고는 여기서는 다 色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다.
물질로 이루어진 그 모든 것, 우리의 육체까지도 포함한 이세상의 모든 것을 색이라고 한다. 이럴 때, 이 색은, 즉 물질은 그 물질을 이루고 있는 근본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는 “있다”라고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긴 사람, 저렇게 생긴 사람은 다 다르다. 바다에 아무리 모래가 많아도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다 개별적 존재다. 구더기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 존재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 존재다. 이 “개별적 존재다.”는 말은 “하나하나가 다 독립되어 있으며 하나하나가 다 변하지 않는다.” 이런데 사실은 (얼른 보면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 존재고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자세히 긴 시간을 살펴보고 주위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결합으로 되어있다. 이런 얘기다. 모든 물질세계가. 이해가 되는가?
그래서 우선 생물을 보면, 지금 저 모양으로 영원한 것 같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生老病死하는 거다. (변한다) [생물현상: 生老病死] 그리고 물질을 가만히 보면 [물질현상: 成住壞空] 영원히 있을 것 같지만 긴 시간을 관찰해 보면 成住壞空한다. 모양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다가 깨져서 없어진다. 우리들의 어떤 생각도 [정신현상: 生住異滅] 영원한 것 같지만 아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가 머무르다가 흩어져서 사라진다. 이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이렇게 변한다.
또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없다. 다 연관되어있다. 물은 수 없는 물방울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방울은 원자와 원자의 결합(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산소나 수소라고 하는 원자는 더 작은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전자와 같은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소립자라고 하는 것은 더 작은 쿼크(quark)라고 하는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몸은 10조개가 넘는 세포로 구성되어있고, 그 세포 하나하나는 다시 각각의 물질로 구성되어있고, 그 물질 하나하나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분자는 수많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렇게 다 결합이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관찰을 할 때, 시간적 관점에서 관찰 할 때는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이런 관찰이 나오고, 공간적 관점에서 관찰 할 때는 “단독으로 존재하느냐? 서로 연관되어 있느냐?” 이렇게 관찰이 된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불변의 요소다. 시간적 관찰에서 변화하면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니다. 즉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 공간적 관찰에서 그것이 단독으로 존재하면 요소, 我가 된다. 공간적 관점에서 그것이 무엇인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실체가 없다. 이렇게 된다. 시간적 관점에서 관찰 했을 때 이 존재의 실상은 無常이다. [시간적 관점: 無常] 공간적 관점에서는 이세상의 [공간적 관점: 無我] 존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無我다. 이렇게 된다. [無常, 無我 = 空] 無常이고 無我라는 것은 그 것은 “空하다.” 이렇게 말한다. 근본교리에서는 “無常하고 無我다.”라고 말했고, 대승불교에서는 “空이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 물질세계가 “空하다.”라는 것을 밝히려면 우선 물질세계가 시간적으로도 관찰해보고 공간적으로도 관찰해본다. 그래서 양쪽이 다 空하면 시공간을 통틀어서 “空하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먼저 시간적으로 관찰을 해본다. 여기에 얼음, 물, 수증기가 있다. 물이 변해서 얼면 얼음이 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 물이 열을 받으면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가 식으면 물이 된다. 물이 더 식으면 얼음이 된다. 우리가 볼 때는 얼음은 고체고 형상이 딱딱해서 조각할 수가 있고 물은 액체고 세수할 수 있고 빨래할 수 있고 목욕할 수 있다. 수증기는 기체라서 풍선에 채울 수 있다. 이 세 개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뭐가 다른가? 물 분자의 결합이 다르다.
물 분자의 결합에 따라서 컵이나 나무 같은 고체로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물체들은 다 그 물질을 이루고 있는 분자가 서로 빈틈 없이 붙어 있고 결합이 강하다. 그런데 열을 받으면 그 사이가 약간 벌어진다. 액체는 사이는 완전히 벌어지지는 않고 그 관계가 움직이게 된다. 분자와 분자 사이가 고정되어있지 않다. 움직이므로 그 사이에 뭔가의 통과가 쉽다. 나무는 손을 집어넣어 통과가 안되지만 물은 쉽게 통과한다. 그래서 그것을 액체라고 한다. 그런데 더 열을 받으면 분자와 분자 사이가 떨어져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이를 지나가기가 너무 쉽다. 물을 통과하는 것 보다 공기를 통과하는 것은 더 쉽다. 이게 서로 떨어져 있어 잘 안 보인다. 있기는 한데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눈의 착각은 두 가지가 생긴다.
저 창문살은 창문살과 빈 공간의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빈 공간이 더 많다. 그런데 그것을 일정한 거리, 어디쯤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아예 없는 것으로 볼일 때도 있고 꽉 찬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쥐불놀이를 할 때 불을 천천히 돌리면 없는 것으로 보이고, 빨리 돌려면 꽉 찬 것으로 보인다. 저 문살을 가는 철사로 해 놓으면 여기서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볼일 때도 있고 사실은 없는 부분이 더 많은데도 꽉 찬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게 눈의 착각이다.
그러니까 이 공기의 분자가 떨어져 있으니 우리의 눈에는 안 보이는 거다. 공기 분자가 붙으면 물로 보이든지 얼음으로 보이다가 서로 떨어지면 안 보인다. 분자가 서로 떨어져도 멀리 떨어지면 가까이서 보든 멀리서 보든 잘 안 보이고 서로 가까이 떨어져 있으면 가까이서 보면 잘 안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형상이 꽉 찬 것으로 보인다. 그게 구름이다. 그러니까 이런 분자들의 서로 결합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서 형체가 바뀐다. 이거를 우리는 상태라고 한다.
상태는 세 가지가 있다. 고체, 액체, 기체. 분자의 결합 방식에 따라서 상태가 바뀌지 사실은 분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대로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형태가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데 열을 가하면 바뀐다. 돌도 열을 가하면 녹는다. 나무도 탄다. 형태가 바뀐다. 우리도 똑 같은 모습인 것 같지만 지금도 계속 바뀌고 있다. 세포 하나는 떨어져서 소멸되고 다른 하나는 그기에 대치가 되고 자동차 부품 갈듯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변하고 있다. 변한다.
이 변할 때 우리가 아주 짧은 순간을 관찰하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긴 시간에서는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변하면 항상하지 않는다. 영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無常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지금도 찰나 찰나에 변한다. 그런데 그 세포 하나가 계속 교체를 하니까 우리의 손을 보고 있으면 변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형태를 유지시켜 주면서 변하면, 세포를 관찰하면 변하지만 손을 보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刹喇無常: 짧은 시간의 순간적 변화]
그런데 10년, 20년, 30년 이렇게 관찰해 보면 이것도 변하는 게 관찰이 된다. [一機無常: 일정기간을 통해 변화] 아주 짧은 시간에 변하는 게 있고 긴 시간을 두고 변하는 게 있다.
우리가 물질의 내부 구조를 봐도 상태는 변하지만 분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분자는 절대를 변하지 않는가? 분자는 원자의 결합으로 되어있어서 물을 전기분해하면 수소와 산소로 분해가 된다. 우리가 열을 가해서 상태가 바뀔 때는 분자는 안 변한다. 즉 물리적 변화에서는 분자는 안 변한다. 그런데 화학적 변화에서는 분자는 변한다. 그러니까 어떤 변화라고 말할 때는 변하는 게 있고 안 변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 안 변하는 것은 영원히 안 변하는 건가?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것도 변한다. 화학변화에서는 분자의 상태가 변한다. 분자의 결합식이 변한다. 즉 원자가 서로 바꿔서 변하기 때문에 분자가 변한다. 그때의 변화에서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관찰해 보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원자는 변하지 않느냐? 아니다. 핵변화에서 보면 그것도 변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가 관찰을 일부분만 하게 되면 변화를 보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변하지 않는 것은 부분적으로 관찰하거나 순간적으로 짧게 관찰할 때 우리에게 그렇게 관찰되는 거지 실제는 변한다. 저 山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변하는 거고 저 太陽도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生成, 消滅한다. 변한다. 그러기 때문에 변화가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그 변화의 차원이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변화의 그 차원이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
물질을 관찰한다면 물리변화, 화학변화, 핵변화가 있다. 이렇게 변화의 질이 여러 차원이 있다. 또 변화하는 시간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다. 이렇게 되므로 해서 우리가 어느 차원에서 어느 사이클만 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것은 변한다고 말하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즉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태양을 보고 영원하다고 하지만 우주적 관점에서는 수명이 100억년이다. 인간은 100년이다. 하루살이가 보면 우리는 영원하다고 할 것이다. 하루살이도 소립자의 관점에서는 하루라는 시간도 영원하다. 그러니까 영원하다는 말은 실제로 영원해서 영원한 게 아니라 그 깜냥에서, 그 관점에서 관찰 했을 때, 자신이 볼 때 긴 시간일 때는 “영원하다.” 할 뿐이지 실제로는 영원한 거는 없다. 긴 시간에서는 영원한 거는 없다. 그러니 色은 空하다.
11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1). 보충자료-1 (도올 김용옥)
제15강 무아란 무엇인가
싯달타란 사람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X라고 보자. 역사적인 인물이 있었다면, 당대의 바라문 전통이라던가 베다문학(Vedic Literature, 이란을 거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들이 만든 신에 대한 제식의 찬가. 산스크리트어로 쓰임. BC 1500~1200년경에 성립)이라던가 인도의 고전문학에 아주 능통했던 게 분명하고 대단한 지식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사색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떤 개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상은 싯달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인생의 어떤 고뇌를 느껴가지고 출가를 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savam-duhkham, 모든 것이 苦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苦의 반대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樂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불교의 목적은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樂의 해탈로 가는 것 같은가? 이 고라는 것이 인도 말로는 두카(duhkha)라고 한다. 두카의 반대말이 樂이 될 수가 없다. 이게 번역이 苦로 되니까 중국 사람들은 苦의 반대말이 樂이다. 감진고래(甘盡苦來) 고락을 같이한다, 生死苦樂 등. 그래서 마치 苦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즐거움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여기 중요한 거는 인도어에서 樂은 苦의 일종이다. 아무리 즐겁다고 한들 어떻게 인생이 즐겁다고만 할 수 있는가? 즐거우면 항상 그기에 執着이 생기기 마련이고 즐거움의 순간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즐거움이 지나가면 허전해지고 더욱 큰 고통이 오는 거다. 그러니까 苦의 반대말은 樂이 아니다.
대게 인생이 즐겁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기꾼들이다. 적당한 사교술을 가지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면서 인생은 즐겁다고 하는 새끼들은 전부 도둑놈들이다. 절대 인생은 즐거울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해탈자에게도 인생은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러면 여기 이 두카의 반대말은 뭔가? 마음의 평화다. 샨띠(santi, 평화), 열반적정(涅槃寂靜, nivanam santam, 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苦도 아니고 樂도 아닌 苦樂을 초월한 거다.
[苦는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상황(Grenzsituation)을 총칭하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명제인다.]
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이런 게 모두 한계상황이다. 그러면 그기에 공포가 있고 원망이 있다. 一切皆苦라는 것은 모든 게 이런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다.
그래가지고 이 사람은 여기에서부터 출가를 했다. 출가해서 처음에 선정주의에 아주 깊게 들어갔다. 이 선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몸의 특수한 상태라면 이건 아편쟁이가 아편에 의해서 도달했다가 깨어나면 이세상이 다 말짱황인 거랑 똑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거는 내 마음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확보하는 길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선정은 싯달타에게 영원한 벗어남(解脫)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 고행을 했다. 이거는 육체의 학대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킨다고 하는 명제가 결코 이런 것은 아주 흔해빠진 초월주의다.
[초월주의와 금욕주의는 상통하는데 이는 다 이원론적 분열(dualistic split)을 전제로 하고 있어 苦를 가중시킨다.]
모든 고행주의, 금욕주의가 정신의 해발을 꾀한다는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이거는 상당히 유치한 이원론이다. 고행론은 인간의 고귀한 영혼이 있고 더러운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육체의 학대를 통해 영혼만을 정화시켜서 순결하게 해서 다시 해방시킨다는 거다. 이거는 영육의 아주 철저한 이원론이다. 이런 이원론에는 이 정신이라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이거는 불교의 無我論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영육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는 항구적인 아트만(atman)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苦의 근원이다.]
“나의 그 위대한 영혼이 더러운 육체에 갇혀서 이렇게 내가 고통을 당하고…”이렇게 써봐야 이건 아주 유치한 서양의 철학에 오염이 된 유치한 문학이다. 대개가 이런 유치한 소설밖에 없다.
행복만 쫓는 쾌락, 그것을 참는 고행을 모두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중도'다.
이 사람은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고 해서 기나긴 사색으로 들어갔다. 이런 거 아무리 해봐야 내가 원하는 그 근원적인 인간의 한계상황을 해결할 길이 없다.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근원적인 게 뭔가?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 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을 깊게 깊게 사색한 것이다.]
기나긴 사색의 끝에 도달한 것이 緣起[paticca(의존하여)+sam(같이)+uppada(일어난다)]다. 모든 것의 의존해서 같이 일어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산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니까 죽음과 삶은 같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여기에 짧은 거라는 게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는가? 짧은 것만은 있을 수 없다. 길다라는 것과 대비되어서 짧다라는 개념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긴 것과 짧은 거는 같이 일어나는 거다.
[長短相較, 노자, 긴 것과 짧은 것은 같이 비교될 때만 생겨나는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짧은 것이 따로 있고 긴 것이 따로 있다고 항상 생각하고 산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같이 일어나고 어떠한 사물이라든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는 거다. 독립된, 고립된 존재일 수가 없다는 거다. [孤起, 고립되어 단독적으로 일어난다] 나만해도 내 부모가 있어서 있는 거고, 나도 자식이 있고, 나도 친구들이 있고, 동료도 있고 이세계가 얽혀져 있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내 강의를 들으니까 내가 여기서 강의를 하고 있는 거지 혼자서 미쳤다고 이러고 있겠는가?
17강을 먼저 들었고 그때도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면 철학자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 많이 있다. 철학자와 수행자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석학의 강의도 분명히 참고가 될만한 내용이 있다. 계속해서...
모든 것이 같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이 연기의 실상을 알자는 거다. 이게 간단한 거 같지만 당대에는 굉장히 어려운 사색이었다. 왜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노-병사에 시달리느냐? 그것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 [무명-행-식~~~] 내가 보기에 이 12연기의 과정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상당히 후대에 형성된 거다. 부파불교 때에 싯달타의 설법을 모아서 편집해서 만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적 붓다는 정확하게 12연기를 설하지 않았다. 12연기는 다양한 연기관계를 설한 파편들이 후대에 종합되어 성립된 것이며, 그것은 아쇼카 3차 결집 이후의 사건이 분명하다.]
그것은 상당히 복잡한 사건이 들어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대학에 아주 존경스러운 학자가 있었다. [고익진, 1934~1988, 전남 광주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평생을 정진하다 교수로서 생애를 마쳤다. 韓國佛敎全書의 위업은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20세기 불교학의 가장 위대한 석학이다. 이 양반의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1990년,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0년에 석사논문으로 제출한 논문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원시불교, 초기불교의 연구에 있어서는 아주 획기적인 저술이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는 안 하겠으나, 우리나라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문제시 되는 천하의 명저로 꼽히기 때문에 소개를 해 드린다.
이 양반도 아함경을 들여다 보면, 대승경전에서 보이는 그렇게 권위있는 부처로 모시는 게 아니라 아주 오만 무도한 인간들
[싯달타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 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사이에서 처절하게 그 인간들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아무 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의 주장하는 바를 깨우쳐 주려고 애쓰는 그런 처절한 인간의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지고 있다고 여기에 기술하고 있다. 그 설득의 핵심은 모든 것이 연기로 다 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연기라는 게 어떻게 나왔냐면, 12처로부터 출발을 했다는 거다. 이게 고익준 선생의 주장이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때 이것은 6근(眼耳鼻舌身意, 감각주관)이다. 이 세간의 모든 것이 이 6근에 담겨-진다. 이 우주는 삼라만상이 이 眼耳鼻舌身意에 수렴되는 것이다. 이 이것, 감각주관, 眼耳鼻舌身意가 있기 때문에 저것, 감각대상, 色聲香味觸法이 있다. 이것은 같이 연기되었다라는 발생에서부터 이 연기론은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이 책의 서두다. 여기서 12처~12연기까지 진행되는 과정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아함경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해 놓은 명저이다.
A->B->C->D 있다. A로 출발해서 D가 있다면 A가 멸하면 D가 없다. 무명이 없어지면 노사까지 다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법이 하나의 항상하는(constant) 자기를 갖고 있지 않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항상 모든 생겨진 것은 없어진다.
[연기의 모든 항목을 제법(諸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기 속의 제법은 불변하는 자기(아트만)을 가질 수 없다. (無我)]
예를 들면 결혼이 성립됐다면 헤어지면 결혼이 없어지는 거다. 마찬가지로 이 세간의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만들어진 것이 흩어지면 없어질 수 있는 거다. 그러므로 그것은 항상 절대불변의, 고정불변의 자기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제법이 항상 고정불변의 독립적인 그러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을 諸法無我라고 한다. 諸法無我가 緣起論에서 도출된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이런 말이다.
[제법무아, sarva-dharmah niratmanah)는 연기론(paticcasamuppada)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나 이게 간단치가 않다. 그러면 無我라는 것을 다시 잘 생각 해보자. 내가 지금 걷는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가? 내가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가? 내가 강의하고 있는가? 내가 싯달타의 말을 전하고 있는가? 여기서 “내가 간다”고 할 때에 우리 말을 잘 살펴보면 “내가 있어서 가는 건가?”
[내가 간다 = 내가 있어서 그 “내”가 간다. 이것은 과연 정당한 명제인가?]
이 말은 가기 전에 어떤 내가 있어야 된다.
석학의 설명, 말 속에, 논리에도 약간의 한계가 보인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설명인지? 내가 오해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미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로 그것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無我에 대한 이해를 단순히 서양의 언어학(특히 영어가 대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하나의 훌륭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인간의 의식, 인식의 한계를 다 보여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자로 되어있는 經典, 善知識(禪問答), 碧巖錄 등의 추상적인 가르침 통해서 깨달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그것을 붙잡기 위해 누구든지 시도를 하거나 하는 행위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의구심만 더 생길 뿐이든지,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져서 “무슨 개소린가?” 하고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것은 정말로 깊고 깊은 자기 성찰이(어떠한 인생의 갈림길에 부딪친 사람이 벼랑에 서있는 상황, 즉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지 않고는) 없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無我가 왜 無我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러한 자기성찰의 전제가 있을 때만이 유효하다는 게 나의 견해다. 아무튼 여기 도올 김용옥 교수의 언어학적 접근법은 여전히 훌륭한 시도임에는 분명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비가 온다.” “비가 내린다.” 여기에 내리는 거와 비가 따로 있는가?
[비가 내린다. ‘비’와 ‘내림’은 과연 분리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사태가 될 수 있는가?]
“구름이 내려온다.” 구름은 떠있을 때 구름이지 내려오면 비가 내리지 구름이 아니다. “꽃이 핀다.”에서 피어있지 않은 꽃이 있는가? 봉우리가 핀다는 안 된다. 왜냐면 피면 꽃이지 그건 봉우리가 아니다. 봉우리가 필 수는 없다. “꽃이 핀다”는 ‘피어있는 꽃이 핀다’는 거다. 그러니까 ‘꽃’이라는 거와 ‘핌’이라는 게 따로따로 있을 수가 있는가?
[꽃이 핀다. ‘꽃’과 ‘핌’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사태일 수 있는가?]
꽃이 있어서 그 꽃이 핀다라는 말이 되는가?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꽃이 핀다”라는 말 속에서 ‘꽃’이 따로 있고 ‘핌’이 따라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 말이다. 이제 이해가 되는가?
용수의 중론에서 보면, [中論, 2세기경 인도의 대사상가 용수(龍樹, Nagarjuna)에 의하여 지어진 중관학의 대표적 저작.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번역이 있다.]
去者則不去(거자즉불거) 不去者不去(불거자불거) 離去不去者(리거불거자) 無第三去者(무제삼거자) 若去者有去(악거자유거) 則有二種法(즉유이종법)
가는 놈인즉 가지 않는다. 가는 작용(술부)을 떠난 가는 놈(주어)이 따로 있어서 그 가는 놈이 가는 것은 아니다.
己去無有去,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감이 없다. 未去亦無去,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감이 없다. 아직 안 간 거는 일어날 수가 없으니까 갈 수가 없다. 그러면 가고 있는 것은 가는가? 가고 있는 것이라는 거는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건데 그 사이라는 거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고 있는 것은 가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離己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도 역시 감은 없다.]
去者則不去, 가는 놈인즉 가지 않는다. 가는 놈이 감에서 분리되어서 가는 놈이 가는 건 아니다.
不去者不去, 가지 않는 놈이 갈 수는 없다. 가지 않는 놈은 안 가는 거다.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제3의 가는 놈은 없다.
若去者有去, 則有二種法,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가는 놈이 간다. 그러면 이 가는 것에 2개의 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① ‘가는 놈’ 속에 ‘감’이 있다. ② ‘간다’의 술부에 ‘감’이 있다. 여기에 ‘감’이 2개가 있게 된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 얘기를 하는가? 이거는 동어반복(同語反覆)의 토톨로지(tautology). 예를 들면, “까만 놈이 까맣다.”고 하면 이건 별로 의미가 없는 문장이다. 우리말을 보면 전부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면, “철수가 간다”에서 철수는 ‘가는 놈’인가? ‘서있는 놈’인가? ‘앉아있는 놈’인가? ‘가는 놈’이다. 그러니까 “철수가 간다”에서도 철수는 ‘가는 놈’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말은 모두 말하는 동시에 모순이 된다.
[“가는 놈이 간다”는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는 놈(주부)과 감(술부)을 분리하는 동시에 이런 오류에 빠진다.]
그러면 “가지 않는 놈이 간다”는 되는가? 안 된다. “가지 않는 놈이 간다”는 모순(contradiction)의 오류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라는 거는 우리가 이 세계를 전혀 반영할 기능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거울이 있다. 우리는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서 본다. 인간이 이세상을 비추는 사유는 언어로 되어있는 거울이다. 이러한 언어라는 거울이 우리는 이 세계를 비춘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언어라는 거울이 이게 알고 보면 개판이라는 말이다.
[언어라는 거울(=사유체계)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꽃이 핀다”도 말이 안 된다. 그건 “피는 꽃이 핀다”라는 핌이 두 번 있는 거다.
언어학에서,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주어가 반드시 있고 동사구(술어)가 있다고 배운다. 즉 이 동사구는 주어의 속성으로써 항상 주어와 술부의 관계가 있어야 이게 언어다라고 배운다. 이게 문법이라고 배운다. 그러니까 주어를 반드시 쓰도록 배웠다. 그런데 이건 웃기는 얘기다.
[서양언어에 있어서 주부(subject)와 술부(predicate)의 관계는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의 관계와 일치한다]
만약에 “불이 났다”라면 어느 집이(주어를 밝히고) 어느 번지에서 몇 시에 불이 났다라고 누가 이렇게 지랄을 하는가? 불이 났으면 그냥 “불이야!”하면 끝이다. 그때는 “불!”이라는 한 마디 밖에 할 말이 없다.
[“불!”이라는 명제는 분리될 수 없는 그 총체적 사태에 대한 언급이다.]
언어에 대한 본질적인 형태라는 것은 원래 주어, 동사가 같이 있는 게 아니다.
현대 문법학의 대석학 노암 촘스키[Avram Noam Chomsky, 미국의 언어학자로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언어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60년대부터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교수는 지금까지 배운 문법은 표층적인 문법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언어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문법을 찾는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
[변형문법(transformational grammar) 촘스키에 의하여 시도된 새로운 언어학의 물결.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라고도 한다.]
이 사람이 이 문법에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유의 법칙을 밝히려는 거다. 문법의 구조를 밝히면 인간의 사유의 구조를 밝힐 수 있다라는 게 이 천재의 획기적인 발상이다.
[표층구조를 변형시켜 심층구조를 찾아내는데 그 궁극적 목표는 문법 그 자체의 발견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선험적 사유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 양반이 인간 사유의 구조에 대해서 얼마나 밝혔는지 모르겠으나, 이 양반도 요즘 한계에 부딪혀서 여러 가지 변형문법이라는 게 비실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말이냐 하면, 언어라는 게 반드시 주어 중심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요새 많은 문법 학자들은 주어가 없이도 성립하는 언어생활이라는 거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다. 요새는 문법학에서 주어중심의 문법에서 동사중심의 문법으로 사고가 많이 변하고 있다.
[주어중심설 -> 동사중심설]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면 “How are you?”에서 반드시 주어를 밝힌다. 네가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안녕하십니까?” 여기에 너나 나나 뭔가 구분이 없다. 이게 어떤 상황에서 술부적 상태에 대한 주어를 밝혀야만 되는 건 아니다. “진지 잡수셨어요?” “어디 가세요?” 이렇게 우리말을 다 보면 주어가 없다. 사실은 주어가 없는 게 우리말의 더 아름다운 언어다. 그게 우리말이다. 이게 사실은 아주 불교적 사유를 반영하는 것이다.
[주어가 숨은 주어로 감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명제에 있어서 주어가 꼭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술부를 주어의 종속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실체적 사유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간다.”라는 문장을 보면, 불변의 내가 있어서 가는 건 아니다. 이해되는가? 무슨 얘기냐 하면, 나는 지금 간다고 하는 속에만 있는 거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내가 있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여러분과 말하고 교감하는 속에 김용옥이라는 존재가 있는 거다.
[나라는 주어는 감이라는 술부 속에만 존(存)한다.]
이 관계가 망가지면 김용옥은 망가진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항상 있어서 그 내가 가는 게 아니다.
11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1). 보충자료-2 (도올 김용옥)
제15강 무아란 무엇인가
이 무아(無我)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건데, 이게 간단치가 않다. 싯달타의 연기론은 한량없이 깊이가 있는 배경이 있다. 좀 더 살펴보자.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책상이 있고 창문이 있고 조그만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잔디밭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잔디밭이라고 부른다. 잔디밭은 적당히 잘 다듬어진 상태에서 우리가 잔디밭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잔디밭이라는 것을 잔디밭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 고생을 해야 한다. 이놈의 게. 내가 이 잔디밭을 없애려고 이가 갈린다. 여기에 시간 뺏기는 게 아까워 가지고 처음에는 근사해 보여서 했는데 우리나라는 원래 정원에 잔디밭 이런 거 없는 거다. 옛날에는 그냥 마당 흙으로 다져놓고 그기에 기껏 해봐야 태정이라고 해서 살 이끼가 끼는 거 그런 게 아름다운 거다. [태정, 우리나라의 전통적 정원술에는 “잔디밭”이라는 것이 없다. 이끼가 덮인 마당이 있었을 뿐이다.] 그 잔디라는 것은 세상 무치한 거다. 이건 서양놈들이 만든 거다. “시누웬수 바랭이웬수”란 말 아는가? 나도 요새 바랭이 웬수다. 그렇게 잡초들이 많지, 벌레 많지, 지렁이도 있지, 모기도 많지, 잔디밭에 낭만적으로 드러누워있을 것 같지만 드러누우면 모기한테 뜯겨서 여기서는 절대 키스도 못한다.
[잔디밭이라는 주어적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잔디밭이라는 주어는 그것을 끊임없이 잔디밭으로 만들고 있는 술어적 상태 속에서만 存하는 것이다.]
이거를 잔디밭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엄청난 노력을 해야 된다는 얘기다. 이걸 안 하면 금방 잡초가 무성해지고 민들레가 금방 퍼져서 흉악한 몰골이 되고 클로버가 나고 부들 이런 것들이 나고 그러다가 이게 금방 잔디밭 아닌 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잔디밭이란 게 있어서 잔디밭이 있는 게 아니다.
항상 잔디밭으로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어떠한 동일성의 체계가 유지되는 이게 아트만이라고 한다.
[자기동일성체계(identity)=아트만(atman)]
그런데 그 아트만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 모든 것은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잔디밭의 모든 요소는 같이 일어나고 있다. 잡초, 잔디, 지렁이, 진드기 등 모든 것이 같이 일어나고 있는 연기적 사태다.
이 연기적 사태는 아트만이 없다. 여기의 ‘나’라고 하는 거는 생물학적 말하면 60조(6X1013)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잔디밭 같은 거다. 이 세포들 간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것이 있는 거지 그 관계가 깨지면 전혀 내가 아닌 게 돼버린다는 거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나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작동하고 있는 거다. 그 작동체계가 무너지면 금방 아트만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아트만은 항상 가합(假合, 임시적으로 합쳐진 상태)적 상태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五蘊, panca-skandha)의 假合이다. 그것은 나(atman)가 아니다. 싯달타] 이것이 싯달타의 혁명적 발상이다.
이전의 것은 언어학적인 無我의 이해를 들었다면 지금은 생물학적인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들어보면, 김 교수의 무아(無我)는 내가 이해한 것과 본질적으로 미묘한 견해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면 왜 그것을 유지하는 '나'가 있다고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오류다. 그냥 여기서는 ‘찰나 찰나의 관계 맺음’이 더 철학적, 사상적 사유로 논리에 근접한 표현이 아닐까? 내가 이해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찰나의 ‘나’, 그 찰나 이전의 ‘나’, 그 찰나 이후의 ‘나’는 다른 ‘나’이므로 결국 독립된, 고립된 ‘나’라는 건 사라지고 다만 찰나 찰나의 연기된 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간다”는 있을 수가 없다. ‘내’라는 거는 걸어가는 속에만 있는 거다.
[“내가 산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와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의 인생밖에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어떻게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가? 나의 인생과 나는 분리될 수가 없는 거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의 인생 밖에 “나”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마치 불변의 나가 있고 그 나가 이 세계를 나의 인생을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관조하는 내가 있고 나의 인생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이게 모든 우리 언어의 오류이고 우리 사고의 오류이다. 싯달타는 우리의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거다.
일체가 緣起되어 있으면,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있다. 강의자가 있기 때문에 청중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너 이 새끼 죽어”에서 내가 때리려고 했던 네가 없어진다는 거다. 이해 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 대상을 너와 나라는 대적되는 상대로 분리해 놓고 “너 이 새끼 죽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없어지면 너도 없어지는 거다. 내가 때릴 타가 없어지는 거다. 내가 원한을 품을 필요가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이것과 이것이 하나가 되는 이것이 동체대비다.
[同體大悲,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같은 하나가 되면 그게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간다는 거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우리가 신을 믿어가지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베풀어라”는 이런 개소리가 없다는 거다. “정말 자비로워지려면 인간이 깨달아야 된다. 연기를 깨닫고, 나나 타인이나 모두 연기되어있는 존재고 근원적으로 我가 없다.”하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연기의 핵심이다.
[불교의 윤리(ethics)는 신앙(belief)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Enlightenment)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인가?
이렇게 무아론으로 가면 무서워진다. 무슨 소리냐? 무아론으로 가면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거부된다. 그 말이다.
[무아론은 모든 실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칠판도 없고 분필도 없고 다 없어진다. 싯달타는 철저하게 형이상학을 거부했다는 말이다. 형이상학은 우리가 언어적 개념으로 아트만화 시켜서 실체화 시켜놓은 것들에 대한 탐구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불교의 본체론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실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이 곧 현상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천여 년 동안 서양철학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헤겔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불교의 동면이었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권 219쪽]
무슨 신이다. 영혼이다.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우주가 무한하냐 유한하냐? 시간이 영원하냐 안 하냐? 신이 있다 없다? “신이 있다”도 참이고 “신이 없다”도 참이다. 이렇게 반대되는 모순되는 명제가 둘 다 참일 때에 이것을 칸트는 안티노미(antinomic, 이율배반,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라고 했다. 같은 사태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명제가 다 동일하게 참일 때, 안티노미다. 싯달타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하냐 별개냐?”는 질문에 “동일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별개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이런 거에 대해서는 자기는 침묵하겠다는 거다.
[싯달타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이것이 원시불교의 소박함이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명제에 대해서 이 싯달타는 침묵한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래는 사후에 생존하느냐 생존하지 않느냐?”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으므로 나는 침묵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일체의 그 어떠한 언전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러한 싯달타의 사상을 無記라고 한다.
[무기, avyakata, “기술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뜻. 형이상학적 명제는 無記의 대상이다.]
원시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거다. 무기는 “기술할 수 없다”는 거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절대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해탈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권 222~3쪽]
연기론에 기반을 둔 無我論은 모든 실체의 존립근거를 무너뜨린다. 모든 형이상학적 존립 근거가 깨진다. 결국은 無我論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아론은 형이상학의 거부로 나가고, 형이상학적 탐구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써 구성된 거다. 언어를 실체화 해서 이 형이상학을 만들어 놨다. 모두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가지고 언어에 속아서 인간이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데 원시불교에서부터 이미 선적인 요소들이 다 들어가 있다. 원시불교에서도 다 통하는 얘기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싯달타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된다는 거다. 언어의 미망 속으로 빠져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Zen Buddhism)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내가 저번에 *춘성스님 얘기하니까 난리야 그냥. ~~~생략~~~논란의 공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문제란 말이다. 춘성스님의 그러한 것 자체가 하나의 공안이고 그것은 그 양반의 철저한 무아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이 양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그러한 언어적 집착에서 헤어나오도록 깨우침을 주려는 거다.
[춘성스님의 일화는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시대의 공안이다. 그것은 논쟁의 꺼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때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선의 본질을 그 당시에 깨우쳤다. ~~~생략~~~ 그런 양반들은 삶의 얘기를 통해서 無我論을 우리에게 설파하고 계신 거고, 그 양반의 무소유적인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신 거다. 그게 하나의 공안인데 그 재치와 그 생각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춘성스님이라고 하는 그러한 위대한 고승들이 산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자랑스럽다. 이 양반은 보통 때 팬티도 안 입고 산다. 평생을 그냥 한 옷만 걸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주무시지를 않는다. 항상 베게도 없고 이불도 없이 그냥 그 단의 하나로 자기가 앉은 좌부동 하나로 배에 대고 주무신다. 승려들이 같이 큰 방에서 자면 같이 누웠다가 딴 사람들이 잠들면 다시 앉아서 좌선을 하셨다. 남들이 자기 때문에 못 잘까 봐 미안해서 그렇게 평생을 사신 분이다. 그 양반은 그야말로 육두문자로 일관하신 법문을 했지만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계율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실천을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깨끗하게 사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분에 대한 존경이 있는 거고 결국 불교의 가장 연기론의 궁극은 뭔가? 무아다. 그리고 무아의 결론이라는 자비행이라는 것으로 귀결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무아에서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은 언어로 쌓여져 있는 나를 해체시켜야 된다는 거다.
[무아(anatman)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해체(deconstruction of linguistic Ego)이다.]
우리는 언어로 인해서 끊임없이 기만 당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싯달타는 그 2500년 전에 (서양철학은 20세기에 와서 겨우 언어철학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을) 설파하신 대철학가이고, 대사상가이셨다. 이것만은 기억하시라.
* 춘성(春城, 1891년 3월 30일 ~ 1977년 8월 22일)은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문인이다. 선승으로도 명성이 있었다. 출가 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이고, 법호는 춘성(春性)이다. 속성은 이씨(李氏)로 이춘성으로도 부른다. 본관은 평창(平昌)으로 속명은 창림(昌林)이다. 별칭은 무애도인(無碍道人)이다.
강원도 출신이며 13세 때인 1903년에 출가하여 백담사에서한용운에게 사사하였고 송만공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였다.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흥사와 석왕사 주지, 광복 이후에는 망월사, 전등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평생을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한국 전쟁 때는 망월사를 지키기도 했고, 거침없는 육두문자 풍자로 유명하였다. 그의 풍자 중 기독교광신도들을 조롱하여 "한번 죽었다 살아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내 좆은 골백번 죽었다가 부활했으니 내 좆을 믿으면 구 천원 이상은 받지 않겠느냐"는 조롱이거나, "평생 한번 죽었다 살아난 것은 내 좆밖에 못 봤다"는 조롱들과 경찰서에 끌려가서 내 고향은 우리 엄마 보지이고, 본적지는 우리 아버지 자지라는 풍자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그는 버스에서 “우리 주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며 전도중인 맹렬 기독교신자를 향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침의 내 자지밖에 없다”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송만공의 제자로 일제 강점기 당시 반일 인사로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1940년대부터 1950년대,1960년대, 1970년대 한국 불교계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였다. 2002년 10월 당시 한국의 철학자 겸 사상가 김용옥이 그의 육두문자 발언을 방송에 인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만큼 실력을 드러내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라는 명성을 얻었다.[4] 이불의 음이 부처와 이별을 뜻한다며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잔 승려이기도 했다. 강원도 출신.
다음은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어느 문구를 참고로 달았다. [싯달타가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뜻에서 언어의 오류 또는 사고의 오류를 유추할 수 있다. 싯달타에 의하면 모든 실체는 연기(관계)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인 가합(가합) 상태이다. 이러한 가합 상태를 제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법은 모두 연기(관계)되어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대승불교의 중관학파는 진제(眞諦), 속제(俗諦)로 표현하는데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공(空)>을 진제라 하고, 그럼에도 연기되어 가합상태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속제하고 한다. 도올에 의하면 싯달타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판단하게 끔 하는 언어의 오류와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하였다고 말한다. 용수의 중론은 이러한 맥락을 언어 사용의 오류를 통해 지적하고 있다. ‘나는 걸어간다’와 용수의 중론의 예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마치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끔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임스 롤러와 대니얼 버윅은 같은 맥락을 얘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임스 롤러는 칸트의 인식론을 빌려 ‘물리적 현상의 객관적인 특징들도 인간 의식의 주관적인 투영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투영된 것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대니얼 버윅은 ‘관계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적어도 두 개의 대상이 필요하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사라진다면 관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같은 이치로 만약(전통적인 의미)의 자아가 없다면 자아는(전통적인 방식으로)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의 논쟁 기저에 싯달타와 용수 그리고 도올이 지적한 것처럼 고정불변의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즉, 고정불변의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사태 인식의 오류임을 그들은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그들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라는 세계는 실체가 아님을 동의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동의는 다른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1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있다. 보충자료-3 (도올 김용옥)
제17강 무아에서 유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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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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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식(의식): 개념적인 의식적 자아의식
제7식(마나식): 개념적 사유보다 더 근원적인 강력한 자기동일의식
제8식(알라야식):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 또는 알라야식阿賴耶識 (Alaya Consciousness) 이다. 이 알라야식은 먼 태고적부터, 무시이래(無始以來)의 훈습(薰習)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프로이드의 이론과는 달리, 유식사상은 이 알라야식조차 무명식(無明識) 이라고 생각하며 망식(妄識) 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정의 대상이다.
전식성지(轉識成智): 알라야식을 전환시켜 반야의 지혜를 이룩한다. 이것이 유식의 실천적 궁극목표다.
예를 들면, 컵(외계의 사물, 세계)이 있고 내 눈으로 보고 망막(retina, 내 몸 안의 사건)이 비춰서 안식의 작용으로 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한다고 하면 이건 실제론이 된다. 그러나 유식사상에서는 이 망막에 비친 사태가 나의 인식주관이 만들어 내고 이것을 내가 인식을 한다. 그렇게 되면 외계의 대상은 사라진다. 없다. 여기에 이것(컵)이 있고 이것이 내 감각기관에 비치고 그것을 내 인식기관이 인식하는 게 아니라 이것 자체가 나의 인식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을 내가 인식하는 거다. 그러면 이것 자체가 나의 의식內의 사건이 된다. 유식론에 있어서 전 우주가 나의 의식내의 장(場) 속에 있다.
이게 이해가 되나? 이게 이해가 될 리가 있나? 이건 거짓말 같은 얘기다. 이게 도대체 뭐냐?
[유식론은 극단적인 주관론이요 유심론이다.] 육조 혜능대사의 일화[벽암록]에 깃발이 펄럭거린 걸 보고 깃발이 움직이는 건지 바람이 움직이는 건지를 사람들이 시비하는 것을 보고 “그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했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은 깃발도 없고 바람도 없고 내 마음이 투영해놓은 것을 보고 있으니 깃발과 바람이 움직이는 사태는 없다는 말이다. 이게 일체유심조다. 이게 문제다.
[유식무경(有識無境): 식(마음작용)만 있고 경(대상세계)은 없다.] 유식(有識), 오로지 식만 있다.
요가카라(Yogacara), 요가행파(瑜伽行派). 유식사상은 요가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깊은 선정체험에서 나온 사상이다. 그것은 매우 실천적 이론이었다.
광관파에서는 컵은 어디까지나 공(空)이지만 가합(加合)상태로 있다는 게 인정이 된다.
공관파(空觀派)의 이론은 대상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대상세계는 연기의 가합상태로서 인정된다. 진제(眞諦)는 공이지만 속제(俗諦)는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의 실제성이 인정된다.
그런데, 유식에 가면 이게 없다. 이건 내 의식의 현상이다. (이게 있나? 없나?)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어렸을 때, 꿈을 가지고 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에 가고 다시 유학을 가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돌아와 교수가 돼야겠다. 또 어떤 사람은 아파트, 자동차 열쇠꾸러미가 가득한 결혼을 해서 일류 대기업에서 성공해서 CEO가 되어서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꿈을 꾼다고 생각을 하자. 이러한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태를 생각해 보자. 분명히 서울대도 있고 하버드도 있고 모든 사태가 존재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알고 보면 나의 의식의 장에서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객관세계는 결국 나의 식(識)의 장(場)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하버드, 서울대, 회전의자, 돈, 명예도 다 있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의식의 투영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러한 새로운 마음의 방법이 유식(有識)이다.
[유식은 우리의 마음의 혁명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의 혁명이다.]
이게 굉장히 어려울진 모르겠으나, 유식사상에서 여기에 이 의자가 있지만 의자라고 하는 자체가 나의 의식의 투영이라고 저것이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의 사태가 아니라 나의 의식의 투영으로서 쳐다볼 때만이 근본적으로 우리는 무아(無我)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저 의자가 있고 나서 저 의자가 나에게 투영되는 게 아니라 저 의자가 근본적으로 나의 의식의 투영이라고 하는 [견분(見分, 能-): 의식내의 주체, 상분(相分, 所-): 의식내의 객체] 그러한 의식내의 사건이라고 볼 때만이 진정으로 이 사람은 의식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게
전식성지(轉識成智)
다. 식을 전환시켜서 지혜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 식을 전환시킨다고 하는 것은 육식까지의 문제가 아니라 아라야식까지를 전부 깨끗하게 씻어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 세계는 나의 아라야식의 종자가 지어낸 업의 세계라고 하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불교의 이론, 혜능선사로부터 태어난 물줄기라고 하는 이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유식(有識)의 세뇌를 거쳐서 나온 거다. 유식(有識)이 없이는 선(禪)이라고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이 선종이라고 하는 것도 복잡한 것이 있지만 이 공관을 거쳐서, 유식을 거쳐서 비로서 중국적인 시각에서 발전한 게 선이라는 거다. [소승->대승->반야->유식->선] 그런데 이 선이라고 하는 거는 대승부락이 갈대로 간 거다. 초기불교가 전개되어간 이론을 탑에 얽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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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1: 여기에 아주 재밌는 동산, 서산 얘기가 나옵니다.
동산, 서산이라고 싸울 때는 我相, 我執이고, 그게 아님을 알았을 때 또다시 非東非西山이라고 우기는 걸 法相, 法執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것마저 초월해서 보아야 하는 無有定法으로 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화두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학인(學人)이 조주(趙州)에게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무(無).”라고 한 화두(話頭)로,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에게는 ‘무(無)’라고 한 의심.
덧글-2: YouTube의 11강 파일의 오류가 매우 아쉽네요. 그래서 정토원 강의를 보충하였지만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한듯해서 도올 석학의 강의를 보충하였습니다. 오늘 강의는 11강 하나 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좀 많은 듯 하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아'의 개념은 불교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하여도 잘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덧글-3:
無我는 '내가 없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나만의 나, 독단적인 나, 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가합(假合)이다.
나라는 존재는 연관되어 존재하고 일시적이다.
無我를 굳이 표현한다면 '나라고 할만한 게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 나툴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나를-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오류이라고 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항상 경계에 끄달릴 수 밖에 없는 구조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비극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덧글-4: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저의 견해는 불교라는 하나의 이론에 처음 접하던 시기의 생각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대승불교의 수행자로서 법륜스님의 무아관과 대석학으로서 도올의 무아에 대한 접근은 이렇게 서로 '맛'이 다릅니다.
지혜와 지식은 매우 차원이 다릅니다. 뭔소리냐? 아무리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자기의 인생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올선생과 법륜스님은 글의 목적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아의 체득없이 단지 학문으로써 무아를 아무리 설명한들 허공에 헛꽃을 꺾으려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덧글-4: 선정체험이 없는 학자(일반인)로서 지식을 가지고 깨달음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지금 이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답답하다ㅠㅠ. 그러나 재밌다ㅎㅎ.
정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
20여년 전 도올 석학의 책을 모두 섭렵했던... 그리고 잊고 살았던... 어떤 식으로던 내 인생에 영향을 지대하게 미쳤을... 정말... 그냥... 사실은 울고싶다.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 얼마나 애쓰며 살았던가!
그냥 차나 한 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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