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무상-일체는 변한다.
지난번 시간에 오온이 모두 공하다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바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다는 것을 공부했다.
인천사람이 부처님께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동쪽으로 가라고 했다. 이것을 모아놓은 게 경전이다. 또 수원 사람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북쪽을 가라고 했다. 이것도 모아놓은 게 경전이다. 춘천 사람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부처님이 서쪽으로 가라고 했다. 이걸 모아놓은 게 경전이다. 그러면 후대 사람들이 볼 때, 서울 가는 길을 물었는데 왜 부처님이 때로는 동쪽으로 가라고 하고, 때로는 북쪽으로 가라고 하고, 때로는 서쪽으로 가라고 했을까? 아~ 불교는 너무 어렵다. 너무 복잡하다. 지금 이렇게 이해한다. 복잡하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한다. 이 말이다.
이건 복잡한 게 아니다. 진실 그대로다. 누가 묻던지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가 아~ 간단하다. 쉽다. 이렇게 생각하는가? 그건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중생의 근기(根氣), 처지에 따라, 즉 길이라면 그가 사는 위치에 따라 서울에 가는 방향을 일러준다. 그것은 그대로 진실이다. 그러나 그 위치가 달라지면 그 정해진 방향은 진실일 수가 없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는 이 방향은 그대로 절대화하면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금강경에 있습니다.) 이 사람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동이 있었고 이 사람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서가 있은 거지 동이나 서를 절대화 하면 안 된다.
그럼 부처님의 말씀을 또 잘못 이해해서 아~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되고 그러면 아무렇게나 가면 되겠구나. 그 말이 아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무렇게나 가면 안 된다. 그럼 서울 가는 길도 없는 거냐? 아니다. 空이니까 없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이 거는 없는 거도 아니고 공이니까 아무렇게나 하면 되겠구나 아무렇게나 해도 안 된다. 제법이 공하다. 서울 가는 길이 공하다. 서울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말은 위치를 무시하고 중생의 근기를 무시하고 이것이다 라고 하는 어떤 절대적인 길은 없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의 서있는 위치에 따라 서울은 분명히 정해진다. 이게 方便說이다. 그러니까 병 따라 처방이 있다는 말이다. 병에 관계없이 이것만 먹으면 다 낳는다 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병 따라 처방이 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자꾸 부처님의 말씀을 언어와 문자에 집착해서 그 사람이 처해져 있는 위치, 상황, 근기를 무시해버리고, 없애버리고 서울로 가는 길은 동이다. 아니야 서다. 아니야 북이다. 이렇게 논쟁을 한다. 이게 바로 파벌, 종파주의, 부파주의다. 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근거가 있다. 이 근거를 얘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얘기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붓다의 가르침인 법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떤 생각을, 의견을 고집한다 이러면 뭐라 하는가? 我相이라고 한다. [자기의 어떤 생각, 의견을 고집하는 것. 我相] 이렇게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빌어서 이게 진실이야 하고 고집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法相이다.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지어버렸다. 그 어떤 상도 지으면 안 된다. 이게 불법이다. [불법은 그 어떤 상도 지으면 안 된다] 법상은 버려야 된다. 그것이 비록 진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더라도 이미 그것을 절대화 하는 것은 진리에 어긋난다. 노자의 말씀대로 하면 道可道非常道.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이런 거와 같다.
그러면 말하지 마라. 입도 벙긋대면 안되겠네요. 벙긋하면 이미 걸러버린다. 입다물고 있어야 된다. 이런 애기 아니다. 인간의 의사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말과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일전에 용수의 중론에 대해 올린 글 참고 바랍니다.) 그러니까 말과 글은 절대화 하면 안 된다. 그 말은 ‘말과 글을 절대화 하지 마라’는 말이지 ‘말과 글을 쓰지 마라’는 말 또한 아니다. 이런 얘기다.
불법이 역사 속에 오랜 세월을 흘러 가면서 이렇게 오류를 범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온전하게 보전해 간다고 하지만 형식은 그대로 지키는데 이미 내용은 잃어버렸다. 법집에 떨어졌다. 법상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이때는 법집을 버려라. 법상을 깨라.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오온설이 요소설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말은 오온을 구성하는 그 하나하나도 다 공하다. 그기에는 어떤 실체도 없고 고정불변하는 것도 없다. 이런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이 色이라는 말이 등장을 한다는 말이다. 이런 법상이 없다면 그냥 간단하게 어떻게 말하면 되는가? 제법이 모두 공하다. 이러면 그걸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하니까 오온은 색수상행식이고 색이 공하다 수도, 상도, 행도, 식도 공하다. 이렇게 말해야 된다.
그러면 왜 색이 공한가? 이것을 우리가 다시 자세히 설명을 해야 된다. 여기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不異라는 용어를 써서 ‘색이 공하다’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왜 不異라는 용어를 써서 ‘색이 공하다’라는 것을 설명하는가? 지금 설명을 듣는 사람이 누군가? 사리자다. 사리자는 소승이다. 그러면 소승의 진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삼법인(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또는 涅槃寂靜)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소승수행자는 삼법인을 아는가 모르는가? 안다.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즉 무상과 무아를 그들은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색이 공하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색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밝혀줘야 된다. 그러면 아~색은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구나. 그러므로 곧 색은 공한 것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뭘? 연기법을 깨달았다. 그 연기. [말미암을 연, 일어날 기, 모든 것은 말미암아 일어난다] 모든 이 세상의 존재는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물처럼 공간적으로 서로 연관되어있고 시간적으로도 연관되어있다. 시간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래서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無我.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無常.
그러면 먼저 무상에 대해서 공부해 보자. 무상. 諸行無常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다 항상함이 없다. 여기서의 상은 항상할 常자이지 모양 狀(상)자가 아니다. 모든 행에는 항상함이 없다. 영원한 것이 없다. 불변하는 것이 없다. 이 불변하는 것이 없다라는 것에 근거해서 나오는 게 이 不異의 의미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때, 첫째가 연기, 두 번째가 무상 무아를 공부해야 된다. 연기가 곧 무상이고 무아기 때문에 무상. 이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세 가지로 분류를 해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물질세계, 생명세계, 정신세계] 첫째 물질세계, 물질에 기초해서 물질과 다른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뭔가? 생명의 세계다. 생명에 기초해서 생명보다 한 차원 높은 게 있는데 그게 뭔가? 정신세계다. 그러니까 물질세계, 생명세계, 정신세계 이 세 가지에 다 한번 적용을 해보자.
옛날부터 내려오는 거라면 물질에 대표적이고 가장 큰 게 뭔가? 우주다. 세계다. 이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고 말했다.
[물질세계인 우주는 成住壞空한다]
이 우주는 이루어지고-머무르고-흩어지고-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루어지고-유지되고-붕괴되고- 사라져서 텅 빈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간다. 이게 진실이냐? 이거는 오늘날의 과학적으로 진실이다. 오늘날 과학에 의하면 태양은 형성된 것이 약 60억년 정도되고 수명은 100억년 정도된다고 한다. 이 태양과 같은 별,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이 밤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을 그 밝기의 등급과 빛깔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그래프로 표시해보면, 이 별이 각각 위치하는 그래프를 H-R도[Hertzsprung–Russell diagram]라고 한다. 이걸 보면 이 별들이 생성 소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저 밤하늘에 있는 별은 우리가 볼 때는 영원하다. 우리가 사는 게 평생 백 년밖에 안되니 영원한 거 맞다. 100년의 시간으로 수 십억 년의 시간을 볼 때 그 시간은 무한대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 우주시간으로 볼 때는 그건 영원한 게 아니다. 생성 소멸을 거듭한다. 밤하늘에 있는 별들은 생성되는 것도 있고 유지되는 것도 있고 붕괴되는 것도 있고 소멸로 나아가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별들이 생성 소멸한다. 성주괴공한다. 이거는 그대로 진실이다. 이거는 현대의 과학에서 그대로 진실로 인정이 된다. 모든 종교 온갖 철학에서 영원하다 하지만 불법은 아주 옛날부터 우주는 성주괴공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런 불법에 가르침을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신을 믿는다 하는 이런 믿음이 아니라 그 불법의 가르침이 너무나 정확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긴다.
그러면 더 좁혀서 지구상에서 영원하다 할 때 주로 맹세할 때 어디에 두고 맹세하는가? 바위에 두고 많이 한다. 저 바위는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만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모양 그대로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저 바위는 원래 큰 암석, 암반이다. 이것은 원래 마그마가 식어서 되기도 하고 또는 퇴적이 되어서 굳어서 되기도 한다. 그 큰 암석이 깨지면 바위가 되고 그게 작게 깨지면 돌멩이가 된다. 이게 더 작아지면 자갈이 되고, 더 작아지면 모래가 되고, 더 작아지면 흙이 된다. 다름 아니다. 이런 모래와 자갈과 흙이 차곡차곡 쌓여서 압력을 받아서 다시 굳어지면 암석이 된다. 이것이 또 똑같이 되풀이 된다. 그러니까 누가 있어서 바위 따로 만들고, 암석 따로 만들고, 돌멩이 따로 만들고, 자갈 따로 만들고, 모래 따로 만들고, 흙 따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 없다.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거다. 또 우리가 사는 대지는 어떤가? 원래의 대지를 원지형이라고 한다. 그럼 비가 와서 계곡이 파여진다. 이것을 유년기라고 한다. 더 패여서 V자로 날카롭게 서면 장년기라고 한다. 더 깎여서 구릉처럼 되면 노년기라고 한다. 다시 평평해지면 준평원이라고 한다. 이게 깎여나가면 다시 융기한다.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또 시작이 된다. 이것을 데이비스의 [William Morris Davis (February 12, 1850 - February 5, 1934) was an American geographer, geologist, geomorphologist, and meteorologist, often called the "father of American geography".] 지형윤회설(The geographical cycle)이라고 한다.
이걸 누가 만들 필요가 있는가? 없다. 이렇게 변해가는 거다. 그러니까 저 우주도 그렇고 이 물질세계, 이 대지가 다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관찰하는 시간이 좁고 이거는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그 변화의 시간이 길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것이 관찰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이 얘기다.
쉽게 생각하면 아침에 태어났다가 저녁에 죽는 하루살이가 내일 또 해가 뜨는 걸 알 수 있을까? 없다. 오늘 해지면 끝인 줄 안다. 일년초가 겨울 지나면 끝인 줄 알지 내년에 또 봄이 오는 걸 알 수 있을까? 없다. 봄에 시작이 되어서 겨울에 끝나는 줄 안다. 시작과 끝인 줄 안다. 그러나 다시 또 봄은 온다. 우리가 백 년 사는 이 인생을 가지고 이 짧은 시간을 가지고 이 긴 우주적 시간 이런 것을 바라보니까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가 많아서 그런 진실을 모르는 게 아니고 우리가 관찰하는 폭이 너무 좁기 때문에 이런 착각현상이 생기는 거다. 우리는 이 착각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사물을 잘못 알기 때문에 착각으로 일어난 무지로 인해서 인생에 온갖 고통이 생긴다. 이게 우리 고뇌의 근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무지를 깨뜨린다. 착각에서 깨어나서 진실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고뇌는 다 사라진다. 이렇게 우주는 성주괴공한다.
물질이 고도로 결합을 하는데 그냥 결합하는 게 아니고 어떤 설계도가 있어서 설계도에 따라 결합을 하게 되면 그 물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용이 일어난다. 新陳代謝(신진대사)라고 하는 새로운 작용이 일어난다. 자기와 똑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복제(複製)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걸 生命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생명의 어떤 특이한 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설계도를 완전히 분해를 해서 해체시켜버리면 그냥 물질이 된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이 한 20,000개 되는데 그 부품 20,000개를 큰 바구니에 그냥 담아놓으면 자동차가 가나 안가나? 안 간다. 소리 낼 수 있나? 없다. 헤드라이트 켜지는가? 안 켜진다. 그것을 설계도에 따라서 잘 조립을 해 놓으면, 이게 소리도 내고 빛도 내고 움직이기도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처럼 설계도. 이게 유전자이다. 이 유전자에 따라 물질이 잘 조립이 되면 신진대사 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생겨나는 것,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늙고-병들고-죽는다. 이런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 생명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인간의 육신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生老病死한다. (우주의 원리와도 같다. 이루어지고-머무르고-흩어지고-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말해
생명은 生老病死한다. 나고-늙고-병들어-죽는다.
부처님이 젊은 시절(사춘기)에 동서남북 문을 나가서 세상을 나가서 인간의 육신은 생로병사하는 것이구나,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만 그런가 소, 돼지, 닭도 그런가? 다 그렇다. 모든 생명 가진 것은 생로병사하는 거다. 그러니까 변한다.
그러면 이러한 생명현상 가운데서 이 생명현상이 더 고도로 발전을 하면 이 단순한 생명현상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기에 다른 프로그램이 깔린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아주 최신형으로 잘 만든 게 인간의 육신이라면, 그기에 소프트웨어를 아주 잘 깐 게 현대인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크로마뇽인(Cro-Magnon man)의 후손. 이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난 것은 한 10~15만년 된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하드웨어 이거는 특별히 개선된 게 없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문명이 빠른 속도로 진화를 해왔는데 여기에는 주로 소프트웨어가 개선이 되었다. 프로그램이 아주 새로운 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저 원시인의 어린아이에게도 이 프로그램을 깔아버리면 그냥 현대인이 돼버린다. 우리가 낳은 아이도 인간사회에서 격리시켜 돼지우리에 키워버리면 이 프로그램을 안 깔면 그냥 돼지 흉내를 내며 살게 된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도 그기에 오락게임만 집어넣어서 하면 오락하는 거 밖에 못쓰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생명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때, 이러쿵저러쿵한 얘기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 믿고 있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걸 합리화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진실에 접근해 가야 한다. 우리는 법을 공부하는 자다. 우리는 진실이 어떤가? 이 이치를 알아서 우리의 괴로움이 우리의 번뇌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아~ 이렇게 이치를 잘못 알아서 생겨났구나. 그렇게 해서 그 이치를 바로 깨닫고 바로 행하게 되면 번뇌가 사라져서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정신현상을 우리 사람에게 적용하면 뭐라고 하는가? 이게 마음이다. 라고 말한다.
이 물질현상을 불교에서는 우주라고 말했고, 이 생명현상은 육신이라고 말했고, 이 정신현상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우리의 마음은 생주이멸한다.
[마음은 生住異滅한다.]
한 생각 쑥 나왔다가 그 생각 유지되다가 그 생각 흩어지고 생각이 없다가 또 한 생각 쑥 나오고 우리의 마음은 죽 끓듯이 그냥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이런 거다. 그래서 이 마음을 여실히 관찰해 보면, 관심(觀心), 마음을 있는 그대로 탁 관해보면 무상하다. 관심무상(觀心無常).
사념처(四念處). 우리가 진리를 관할 때 4개를 관해야 된다. 우리의 몸을 관하는 것-우리의 느낌을 관하는 것-우리의 마음을 관하는 것-법을 관하는 것, 4개가 있다.
우리의 몸을 관하면 몸을 애지중지하지만 몸은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 관신부정(觀身不淨).
우리의 느낌. 기분을 여실히 관하면 그것은 곧 고다. 관수시고(觀受是苦).
우리의 마음을 여실히 관해보면 항상함이 없다. 관심무상(觀心無常).
모든 법은 있는 그대로 여실히 관해보면 그기에는 실체라고 할 것이 없다. 관법무아(觀法無我).
이게 四念處. 우리가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가장 중요하게 관해야 할(깨쳐야 할) 이치이다. 소승불교의 수행법인 비파사나[비발사나, 毘鉢舍那,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팔리어 vipassanā의 음사. 관(觀)이라 번역. 몸과 마음은 무상•고•무아라고 통찰함.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함.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함. 통찰하는 수행.]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관심무상이 있다. 이 무상을 얘기할 때 우리의 마음은 生住異滅한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항상하지 않고 늘 변하는 거라면, 결혼할 때 두 부부가 약속을 했다. 서로 사랑하기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이렇게 약속을 했는데 중간에 한 사람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그래서 배신했다고 하고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근데 사실은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마음은 변하는 거다. 그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런 마음이 일어났는데 살다 보니까 마음이 변했다. 이런 얘기다. 그러니까 그 변한 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된다. 내 마음만 그런 게 아니라 상대 마음도 그렇고 모든 사람의 마음은 다 그렇다. 마음은 변하는 거다. 그러니까 변하는 거를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몸을 죽지 않게 하려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다.
변하는 이 세상을 변하지 않기를 영원하기를 바라니까 결국은 결과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견, 항상하다는 常見과 실체가 있다라는 我見에 사로잡히게 되면, 곧 無智(알지 못한다). 그러면 일체는 다 괴로움이다.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변하는 것을 변하는 줄로 알고, 무상을 무상인 줄 알고, 무아를 무아인 줄 알고, 공을 공인 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 이게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그냥 어떤 얘기가 아니고 과학처럼, 과학이라는 것은 주로 물질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주로 우리 마음의 작용에 관해서 연구를 하셨다. 마음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왜 괴로움이 생기는가? 왜 기쁨이 생기는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의 작용, 마음의 법칙을 확연히 꿰뚫어서 괴로움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요인들을 없애버리면 괴로움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 ‘마음법’이 마음에만 적용이 되고 생명이나 물질에는 적용이 안 되는가? 아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꼭 마음에만 적용했는데 요즘은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물리학, 천문학이 발달하고 화학이 발달하고 또 이런 생명을 이해하는 생물학이 발달하면서 유전자가 발견이 되고 하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기에 다 적용해 보니까 법칙이 일관되게 다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과학자가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한 그 법칙이 오늘의 자연과학과 위배되지 않는다. 그기에도 다 그대로 이해가 되고 적용이 된다.
그러면 어떤 종교는 종교적으로는 진리인데 과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부정된다. 그런데 불법은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봐도 그기에는 모순이 없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이 이 불법은 받아 들일만 하다. 이 말이다. 이게 그냥 불교는 과학이다. 이러면 안 된다. 그러면 과학자는 괴롭나 안 괴롭나? 괴롭다. 엄청나게 이 우주를 얘기하는 과학자도 괴롭고 부부간에 갈등이 생겨서 해결도 못하고 자기 자식 말 안 듣는다고 정신을 못 차리고 화를 벌컥벌컥 내고 그런다. 그건 왜 그럴까? 물질에 대한 이해는 아는데 마음에 대한 이해는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수행자는 마음의 법칙을 이해하는데 이 마음의 법칙이 마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세계 생명세계까지도 다 관통하고 있다. 무상과 무아의 법칙은 그대로 다 적용이 된다. 연기의 법칙은 모두에 다 적용이 된다. 이런 얘기다.
그런 데서 불교는 종교 가운데서도 정말 좋은 종교, 종자가 무슨 종이가? 으뜸 종(宗).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 종교인데 불법이야 말로 이세상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다 라고 할만하고 또 세상에서 말하는 그냥 종교라는 것은 신을 인정하고 신에 귀의하고 하는 이런 종교로 만약에 종교의 의미를 울타리 친다면
불교는 종교를 넘어서있다!!!
이 불법을 종교의 울타리에 가둬버리면 이거는 불교의 큰 장점을 죽여버리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이 종파 별로 네 종파가 낳니 내 종파가 낳니 이런 것도 넘어서야 되고, 또 나아가서는 네 종교가 낳니 내 종교가 낳니 라는 것을 넘어서야 되고, 또 나아가서는 종교니 과학이니 이러한 것도 넘어서야 된다. 그렇게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포용하는 관점에서 딱 서서 진리의 논쟁을 할 수 있어야 된다. 그래야 불법의 위대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은 제행무상, 일체는 다 변한다. 그것이 물질세계든 생명의 세계든 그것이 정신세계든, 즉 우주든 육신이든 마음이든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들의 고뇌는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고 변하지 않는 다고 착각하는 데서 변화의 현상이 일어날 때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괴로워한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가 이 현상에 부딪혀서 괴로울 일이 없어진다.
덧글-1: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는 1년 전쯤 제가 YouTube의 스님 강의를 듣고 일일이 타이핑해서 간직하고 있던 것을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읽고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강의를 청취하다보면 다소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11강이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스님의 옛 강의(정토회 홈페이지)를 따로 보충하였고 다른 분의 강의(도올 김용옥)도 같이 넣었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반야심경은 8만4천 경전 중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언급하면서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만 잘 이해하고 있다면 (제 경험에 따르면) 다른 경전이나 불교에 관련한 사상은 곁 가지나 다름 없으므로 좀 더 편안하게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진리를 다루는 어떤 종류의 고전, 예컨대 성경, 논어, 맹자 등의 내용도 이전에 비해 훨씬 가볍게 접할 수 있으리라 사려됩니다.
그런데 종교를 떠나 명상은 자신의 본성(기독교에서는 성령)을 찾는 것이므로 부처님의 법과 함께 반드시 병행해서 할 필요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명상의 방법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개인의 근기에 맞는 것을 찾아서 적당한 것을 선택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방불교에서 주로 하는 사마타, 비파사나, 선불교의 초기 수행법인 관법수행, 반조선, 그리고 조계종에서 하는 간화선 등등이 있으니 가능하면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면 좋은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시중의 서적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에 제가 언급한 말들은 법륜스님의 조언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달을 가리켰는데 달은 안 보고 손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기 위한 방편,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이론적인 방편이 경전(불법)이라면, 명상은 실기와도 같습니다. 명상은 자기의 무의식을 보는 지름길입니다. 무수히 일어나서-머무르다-흩어져서-사라지는 자기의 무의식을 바로 아는 겁니다. 그것을 탐구하다 보면 아! 내가 잘못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알음알이 떨어지면, 관념이 타파되면, 업장이 소멸하면, 텅 비었지만 생생하게 알아차림이 있는, 본래부터 갖고 있는 자기 마음의 여백, 마침내 찾던 참나를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괴로움은 있었지만 본래 괴로워할 일은 없었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불법 공부의 결과; 지식)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지혜, 반야입니다. 이때부터 괴로움이 없는, 걸림이 없는, 상대성이 떨어진 대자유인의 삶을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알아도, 스님의 말씀을 들어 좋지만 막상 실천이 안되는 이유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깨장'을 통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것도 이와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나누기를 하는 본래 목적은 무의식이 일으키는 잘못된 점을 끊임없이 참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여러갈래 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정견을 갖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반야심경을 꼼꼼하게 공부하고 깊이 이해해서 항상 수지독송해야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제가 올리는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가 법우님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덧글-2:
제행무상(諸行無常)
성주괴공(成住壞空) 물질
생로병사(生老病死) 생명
생주이멸(生住異滅) 정신
물질이든 생명이든 정신이든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변한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생자필멸(生者必滅). 고로, 번뇌는 생겨난 것이므로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런지 안 그런지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어떻게? 아래의 4가지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념처(四念處)
관신부정(觀身不淨) 몸
관수시고(觀受是苦) 느낌
관심무상(觀心無常) 마음
관법무아(觀法無我) 법
그래서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면, 상이 깨진다. 집착이 사라진다. 눈을 뜨게 된다. 괴로움이 사라진다. 여여한 마음이 된다. 자유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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