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경전

9.강 부처님 십대제자-사리자.

開理無語 2014. 8. 13. 20:05

9.강 부처님 십대제자-사리자.


지난번 시간까지 첫 번째 줄을 공부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첫 번째 줄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보살을 대표한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님께서 대승보살의 수행법인 반야바라미다수행을 행하셔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 깨달음의 내용은 모든 법이 다 공함을 깨달으셨다. 그것이 조견오온개공이다. 이렇게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법의 실상을 깨달으니 일체의 번뇌, 모든 고뇌가 다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온갖 번뇌, 괴로움, 고뇌. 이런 것들이 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얘기다.


여기서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서 공부해야 할 것은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거다. 일체법이 다 공하다. 그것을 여기서는 오온이 모두 공하다. 이렇게 표현을 했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하는 것을 알기만 하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데 우리는 “오온이 모두 공하다”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되지도 않고 있다. 그래서 다음 문장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하는 그 문장에 대한 더 깊은 더 자세한 해설이다. 이 반야심경은 법을 설하는 자는 대승보살을 대표해서 관자재보살이 설하고 이 법을 청해 듣는 사람은 소승을 대표해서 사리푸트라, 舍利子이다.


五蘊이라는 것은 色受想行識인데, 그 색수상행식이 모두 空하다고 했으니까 첫 번째 색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한다. 그 색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말하면 수학적인 논리에서 증명하듯이 색이 왜 공한가? 색이 어떠해서 공한가? 하는 것을 증명해서 설명한 것이 그 다음 문장이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렇게 설명을 했다. 이 말이 色이 空하다 하는 것을 확연하게 밝힌 글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受 또한 그렇다. 想 또한 그렇다. 行 또한 그렇다. 識 또한 그렇다. 나머지 네 가지도 동일한 논리에 의해서 동일한 방법으로 “다 空하다” 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내용을 줄여서 受想行識 亦復如是 이다. 이렇게 말했다. 


이 문장을 다시 자세히 이해해야 한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 깨달음의 내용은 뭔가? ‘오온개공’이다. 이 오온개공을 다시 풀어서 자세히 설명한 문장이 그 다음 문장이다.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색을 먼저 들어내어서 색이 공하다 하는 것을 밝히는데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異), 색과 공은 같다라고 하는 즉시(卽是), 불이와 즉시라는 방식으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렇게 말하는 게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라고 하면 色不異空만 하면 되지 空不異色은 무엇 때문에 했는가? 色卽是空만 하면 되지 空卽是色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거다. 이렇게 서로 뒤집어서 역으로 말하는 방법이 곧 색이 공과 같다는 수학적 증명 방법이다. 수학에서 A=B임을 증명하라. 하면, 첫 째 A이면 B이다. 라는 명제가 성립함을 보여야 한다. 두 번째 B이면 A이다. 라는 명제가 성립함을 보여야 한다. 즉 그 명제가 성립하고 그 명제의 역이 성립하면 A=B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면 동물이다. 이 명제는 성립한다. 사람은 사람인데 동물이 아닌 사람이 있는가? 없다. 사람이면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이면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동물이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명제가 성립하고 그 명제의 역이 성립할 때, A와 B는 같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결국은 색이 공하다. 하는 것을 지금 증명하는 거다. 色=空이라는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보여지기 위해서는 “색이면 공이고, 공이면 색이다”라는 두 가지 명제가 성립해야 색이 곧 “공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역으로 반복해 놓은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것이 같음을 증명하는 방법에 속한다. 다시 돌아와서 不異라는 방법을 썼다. “다르지 않다”라는 것하고 “卽是, 곧 그것이다”라는 것은 왜 이렇게 달리 표현을 했는가? 이것은 하나는 시간적 접근이고 하나는 공간적 접근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할 때, 부처님께서 어떤 법을 깨달으셨는가? 이렇게 말할 때, 한마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緣起法을 깨달으셨다. 이렇게 말한다. 緣 말미암을 연, 起 일어날 기. 이세상의 모든 것은 말미암아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 이런 얘기다.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 이 말은 A와 B는 무관한 존재가 아니다.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A와 B는 뭔가 연관된 존재다.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 이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마치 그물처럼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4개의 문장으로 나누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이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관계 맺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은 공간상에서 서로 관계 맺어져 있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 말은 이것과 저것이 시간적으로 상호 인과관계에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원인이라면 저것은 결과다. 이것과 저것은 因緣果報의 관계에 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다.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인 緣起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 네 개의 문장으로 연기법이 표현이 된다. 앞의 두 문장은 존재의 생성, 드러난 존재, 존재가 있다라고 하는 有의 세계, 존재가 일어난다고 하는 生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고 뒤의 두 문장은 존재의 없음인 無를 표현하고 있고 존재의 사라짐인 滅을 표현하고 있다. 


有無 또는 生滅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시 바꿔서 이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유무, 있고 없음]은 별개가 아니다. 실제의 존재는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있다. 그 연관되어있을 때, [우리가 존재를 인식한다]라는 것은 [연관되어있다]는 것이고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연관이 해체됐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로 연관되어있다. 개별적 단독자,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리하면 無我라고 말한다. 공간적 연기관. 我라고 하는 홀로의 단독자는 없다.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과 저것은 시간적으로 상호 연관되어있다. 인과 관계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無常이라고 말한다. 시간적 연기관. 항상함이 없다. [영원하다 영원불멸하다]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연기법은 두 개의 다른 말, 즉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면 무상과 무아, 무아와 무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우리가 중생이란 말은 “나쁜 사람이다” 이런 뜻이 아니다. 중생이란 말은 어리석은 자다. 무지한 자다. 이런 얘기다. 우리는 법에 무지하기 때문에 존재의 참모습이 연기인데도 연기인줄을 모른다. 존재의 참모습, 법의 실상이 무상이며 무아인데 무상이며 무아인 줄 알지 못한다. 항상함이 없고 영원하지 않고 변해가는데도 우리는 착각을 해서 그것이 영원하고 그것이 항상한다고 생각한다. 또, 존재의 참모습은 서로 연관되어있어서 단독이라는 것은 없다. 즉 어떤 존재에도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할 단독의 실체는 없다. 즉 존재의 실체는 무아인데도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我라고 하는 착각인 악연(惡緣)에 떨어지고 常이라고 하는 착각에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잘못 알고 있다. 


이것을 반야심경 뒤에 가면 전도몽상(傳導夢想)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뱀을 만나서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놀라는 것과 같다. 깨어보면 없지만 그 꿈속에서는 어떤 환영 속에서는 분명히 뱀이 있고 강도가 있다. 이런 악연과 상견, 이것은 우리가 무지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는 일마다 다 괴롭다. 일체가 다 괴로움이다. 그래서 苦가 발생한다. 일체개고. 


그런데, 존재의 참모습이 연기임을 깨달으면 곧 무아임을 깨닫고 무상임을 깨달으면 어떤가? 우리가 하는 일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났던 괴로움도 다 사라져 버린다. 괴로움이 사라졌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없다. 이게 열반이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거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은 사실은 연기법이다. 연기는 다른 말로 하면, 무상과 무아라고 말할 수 있다. 연기=무상&무아. 제법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달으면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게 되고 제법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알지 못하고 악연과 상견에 빠지게 되면 괴로움에 떨어지게 된다. 일체 고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무상, 무아, 고 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이 삼법인(三法印)이다. 또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涅槃寂靜). 이것이 3법인(三法印)이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도장이다. 이 애기다. 도장이 찍혔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가르침이든 이 無常, 無我, 苦, 涅槃 또는 이렇게 해서 4법인(四法印)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분명하면 그것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령 부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치를 말해서는 그것은 진리다. 불법이라고 말할 수 있고 비록 그 책 제목에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라는 단서가 붙어있다고 하더라도 무상, 무아, 고, 열반의 내용이 아닌 여기에 배치되는 내용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삼법인이다. 이렇게 말한다.


이 무상과 무아를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용어로 空이라고 했다. 무상&무아=공. 그러기 때문에 제법이 공하다 하는 것을 증명 하려면 제법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임을 제법이 공하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여기 색이 공임을 증명하는데 ‘색이 무상하다’하는 것을 하나 밝히고 ‘색이 무아이다’라는 것을 밝히면 ‘색이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라는 말이다. 


‘무상하다’라는 것은 ‘변한다’라는 말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 즉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다’하는 것은 얼음과 물은 별개인가 아닌가? 별개가 아니다. 얼음과 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이다. 이럴 때 ‘얼음과 물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럴 때 그것이 불이(不異)가 된다. 다른 존재가 아니다. ‘같다’라고 하지만 얼음과 물은 모양과 형태가 다르지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기 때문에 ‘얼음과 물은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무상함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같은 방법으로) 受도 이렇게 하면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상도 마찬가지, 행도 마찬가지, 식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문장을 축약해서 受想行識 亦復如是다. 이 문장은 그 앞의 문장에서의 무엇을 증명한 것인가? 해설한 것인가? 五蘊皆空을 설명한 거다. 이렇게 짜여 있다.


그럼 이 문장을 다시 보면, 사리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아는가? ① 지혜제일 사리푸트라, 줄여서 사리불, 사리자라고 한다. ② 신통제일 마하목건련이다. ③ 두타(頭陀)제일 마하가섭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는 부처님 보다 먼저 열반에 드셨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첫 번째 상수제자는 마하가섭존자다. 그래서 마하가섭존자가 500 아라한을 모아놓고 사회자가 돼서 아난다존자와 우파리존자를 경과 율의 초안자로 해서 경율을 결집했다는 말이다. 그럴 때 가장 상수제자가 마하가섭이다. ④ 천안(天眼)제일 아니루타. 한문으로는 아나율(阿那律) 이라고 한다. 아니루타는 석가족 출신(석가의 사촌동생)이다. 


아주 똑똑한 젊은이였다. 그런데 출가한 이후, 어느 날 법문을 듣는 시간에 졸다가 부처님께 지적을 받았다. 그 한번의 지적을 받고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각오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잠을 안 잤다. 잠을 안 자고 용맹증진을 하다 보니까 눈병이 났다. 눈이 굉장히 아팠다. 그래서 의사 지이봐카를 오게 해서 치료를 하게 했는데 의사 지이봐카가 부처님께 말씀하기를 “다른 특별한 병이 아니고 잠을 자지 않아서 생긴 병입니다. 잠을 자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니루타에게 “눈은 잠을 먹이로 한다. 그러니 좀 자도록 해라.” 이렇게 권유를 했다. 그러니까 아니루타가 부처님께 “깨달음, 지혜는 무엇을 먹이로 합니까?” 하니까 “정진을 먹이로 한다.”고 대답했다. 아니루타가 “저는 설령 눈이 먼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정진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해서 결국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눈이 열렸다. 하늘의 눈이 열렸다. 그래서 아니루타를 천안제일이라고 한다. 


⑤ 다섯 번째 제자는 금강경에 등장하는 해공(解空)제일 수보리(須菩提, Subhūti)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가장 밝게 아는 자다. ⑥ 여섯 번째 제자는 논의제일 가전연(迦旃延)이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논리적으로 다른 이교도들과 논쟁을 할 때, 불법을 자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설명을 하는데 제일인자였다. ⑦ 일곱 번째는 설법제일 부루나(富樓那)이다. 부루나존자는 그 어떤 사람도 불법을 비난하고 헤치려 하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다 교화해 내는 설법의 일인자다. ⑧ 여덟 번째는 지계(持戒)제일 우파리, 우바리(優婆離)이다. 계율을 가장 청정히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다. 이 우파리는 석가족의 머리를 깎아 주는 수드라(노예, 천민, 카스트의 최하위계급) 출신이다. [Sudra, 카스트의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무사와 왕족), 바이샤(농업, 목축업,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에 이은 최하층 신분이며, 직물공, 하인 등과 같은 육체 노동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출가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든 분이다. ⑨ 아홉 번째는 밀행(密行)제일 라후라(羅睺羅)존자다. 


이 사람은 부처님의 외아들이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인데 부처님 출가하신 후 12년째 성도하신 후 6년째 고향으로 돌아와서 많은 석가족들에게 설법을 했고 그때 많은 석가족 젊은이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의 눈이 열려서 출가를 했다. 그때, 부처님의 전 부인이었던 아쇼다라 (耶輸陀羅)공주가 아들 라후라에게 “저기 계시는 저분이 네 아빠이시다. 가서 인사를 드려라. 인사를 하면서 아버지 저에게 상속물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해라.” 했다. 라후라존자가 아버지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아버지 저에게 상속물을 주십시오” 출가한 사람이 상속물을 줄게 있는가? 없다. 그런데 왜 아쇼다라 공주는 아들에게 이렇게 시켰을까? 남편이 출가해서 괘씸해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일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라후라존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사리푸트라여, 이 아이를 출가 시키시오.”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상속물을 주셨다. 대부분 출가는 자발적이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을 하는 거다. 그런데 라후라존자는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의해서 강제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라후라는 승단(僧團)생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라후라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반왕(淨飯王, 석존의 아버지)은 너무너무 상실감에 빠졌다. 아들이 출가한 것으로도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손자마저도 출가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정반왕이 부처님께 “부처님이시여, 20살 아래의 이 미성년자가 출가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을 받고 출가함이 좋겠습니다.”하고 권유를 했을 때, 부처님은 그것이 합당하다고 생각을 해서 승낙을 했다. 그러니까 20살 이상 성년의 나이에 출가할 때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 없다. 그러나 20살 미만의 미성년자가 출가를 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가 있어야 한다. 라후라는 이런 계율이 있기 전에 출가를 했다. 설령 이런 계율이 있다 하더라도 라후라는 부처님이 출가를 허락했기 때문에 즉 이미 아버지가 출가를 허락했기 때문에 또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가 자기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 수행생활이 힘들고 장난이 많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거는 스님들이 와서 부처님 어디 계시냐 하고 물으면 [여기 계시면 저기 계신다] 그러고 [저기 계시면 여기 계신다] 그러고 이렇게 거짓말 장난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어린아이를 출가를 시켜서 이렇게 승단을 어지럽히느냐? 이런 비난의 소리가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부처님께서 늘 라후라를 염려하시다가 이런 라후라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자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외출을 하고 돌아오셨는데 라후라가 새 대야에 발 씻을 물을 떠왔다. 부처님은 발을 다 씻은 뒤 라후라에게 “이 물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라후라는 안 먹으려고 했다. 왜 안 먹느냐고 하니까 “발 씻은 물이니 더럽잖아요.” 그랬다. “물을 버리고 오너라. 버리고 온 대야에 내일 아침에 이 대야에 밥을 빌어라.”하니까 라후라가 또 거절을 한다. “왜 그러냐?”하니까 “아 발 씻은 더러운 그릇에 어떻게 밥을 받아 먹습니까?”그랬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릇을 치우시면서 “라후라야,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몸은 본래 깨끗하지만, 그 마음이 물과 같아서 거짓말을 행하게 되면 발 씻은 물처럼 더러워진다. 그러면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어린 라후라지만 그 발 씻은 대야에 비교해서 설명한 이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닫고 뉘우쳤다. “아~ 그렇구나!” 계율을 어기는 것은 바로 마음을 더럽히는 거고 마음이 더러우면 몸까지 더러워져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버리게 된다. 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라후라는 크게 깨닫고 그 이후부터는 아주 부지런히 정진을 했다. 자기의 정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숨겨서 조용히 정진을 했다. 그래서 밀행(密行)제일이라고 한다. 아들이라고 십대제자가 된 게 아니고 그 수행력이 높았기 때문에 십대제자에 들었다. 


⑩ 그 다음이 다문(多聞)제일 아난(Ananda, 阿難陀 또는 阿難)존자다.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자다.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해서 35살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셨다. 그리고 하루도 쉬지 않고 다니면서 설법을 하셨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을 두셨다. 출가한 무수한 제자들이 있었고 [당대 최강국 마가다의 임금, 빈파사라(頻婆娑羅), Bimbisara 기원전 558~기원전 491] 빔비사라왕, [또 하나의 강국 코살라國, Kosala의 수도 Sāvatthī, 사위성(舍衛城), Pasenadi (Sanskrit: Prasenajit) 波斯匿王] 프라세나짓왕을 비롯한 각국의 왕들까지 포함한 수많은 제가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하실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또 이교도들이 부처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고 부처님에 대한 어떤 살해의 위협까지도 나타났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은 출가 수행자들은 다 스스로 홀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혼자 계시면 안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시봉(侍奉)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에게 건의를 했는데 부처님은 거절을 하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또 건의를 했지만 여전히 부처님은 거절을 하셨다. 부처님이 성도 후 20년, 세속나이로 55세 되던 해 다시 시자(侍者)가 있어야 한다. 하고 청을 했을 때, 부처님은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다. 그래서 대중들이 대중공사(大衆公事)를 해서 누가 가장 좋겠는가 했을 때 사리푸트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목건련존자도 제가 하겠습니다. 마가섭존자도 제가 하겠습니다. [尊者,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이 뛰어난 부처의 제자(弟子)를 높여 이르는 말] 많은 제자들이 다 부처님을 시봉하겠다고 자원을 했다. 그러나 사리푸트라나 목건련존자는 다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셨다. 이런 저런 것을 다 감안했을 때, 부처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또 부처님과 같은 종족(석가족) 출신이고 성격도 아주 온순하고 머리도 아주 총명하고 이런 아난다존자가 제일 적격이다. 그래서 아난다존자가 천거가 되었다.


(그 외에 수많은 스님들이 있다.) 이 가운데서 제일 훌륭한 스님들을 십대제자라고 하고 그 중에서 第一 제자가 사리자다. 그러니까 여기(반야심경)에 사리자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인 사리자도 되겠지만, 이 사리자라는 것은 소승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소승불교의 가장 뛰어난 제자 사리자를 배우는 사람으로 세워놓고, 대승은 보살승이다. 승가(samgha, 僧伽)가 보살로 구성이 되어있다. 대승보살에는 사대보살이 있다. 대지문수(大智文殊) 사리보살(師利菩薩),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전 지장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있다. 이 보살들 가운데서 여기에 법을 설하는 자로 등장한 분이 관자재보살이다. 여기서 관세음보살과 사리자는 대승을 대표하고 소승을 대표해서 자리를 배치했다.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이 사리자에게 관세음보살이 말하고 있는 거다. 사리자야 오온이 모두 공하느니라. 색은 이러이러해서 공하다. 수상행식도 이러이러해서 공하다. 이렇게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다음 문장이다. 는 말이다.


十大弟子(십대제자)

석가의 제자 중 사리불•목건련•가섭•아나율•수보리•부루나•가전연•우바리•나후라•아난다의 10명을 이르는 말이다.

사리불 (Sāriputra) 은 지혜가 가장 뛰어나며 사리불다•사리자•사리푸트라 등으로 불린다. 원래 바라문족 출신으로 바라문교를 믿었으나 목건련과 함께 불교에 귀의하였다.

목건련은 신통력이 가장 뛰어나다. 마하목건련•목련•마하모옥갈나라고도 한다. 바라문 출신으로 죽림정사에서 부처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신통력으로 지옥에서 고통받는 어머니를 구했다고 하며, 육신통이라고 해서 6가지 신통력을 지닌 인물로 알려졌다. 육신통은 첫째,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둘째,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셋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넷째, 전생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며 다섯째, 주위 환경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고 여섯째, 번뇌를 스스로 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가섭은 번뇌를 없애고 불도 수행에 성의를 다하는 두타(頭陀)의 일인자이다. 대가섭•마하가섭•마하카샤파라고도 한다.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았으며, 부처 입멸 후 교단을 통솔해 500명의 장로를 모아 1차 결집을 주도하였다. 선종(禪宗)의 제1조이다. 

아나율은 원근•전후•상하•주야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눈, 곧 천안(天眼)을 지녔다. 아니루타라고도 한다. 석가의 사촌동생으로 아난과 함께 출가하였다. 부처가 설법할 때 졸다가 꾸중을 들은 뒤 밤잠을 자지 않고 정진해 도를 얻었다. 무리한 수행으로 눈이 멀었으나 모든 것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수보리는 사위국 바라문족 출신으로 지혜가 총명하였다. 공(空)의 이치를 분별하는 데에는 으뜸이었다고 한다. 부루나는 바라문족 출신으로 설법을 잘하는 제자였다. 당시 포악한 수로나국에 가서 500명을 설법으로 교화시키고 500개의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가전연은 논의(論議)를 잘하였고 마하가전연 또는 가전연자라고도 한다. 서인도의 아반티국 찰제리족 출신으로 왕명을 받들어 부처를 영접하러 왔다가 출가하였다. 잘잘못을 가려 논박을 잘하는 제자였다. 우바리는 계율을 가장 잘 지켰다. 수다라족 출신으로 본래는 샤카족 왕가의 이발사였다. 샤카족의 남자를 따라 출가하려 할 때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꺼렸으나 부처가 허락하였다. 

나후라는 부처의 아들로 밀행(密行)을 가장 잘하였다. 밀행의 본뜻은 비밀히 다니는 것을 말한다. 비밀스럽게 다니는 것처럼 남모르게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 아난다는 부처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로 아난이라고도 한다. 부처의 사촌동생으로 부처를 가까이 모시며 설법을 들었다. 가섭이 제1차 결집을 했을 때 부처에게 들은 것을 알려 경전을 집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찰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은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나한들을 모시는 곳인데, 더러는 십대제자를 함께 모시기도 한다.





덧글-1: 

緣起法 : 有無, 生滅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有無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있다.

공간적인 측면

개별적 단독자,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無我 공간적 연기관. 


生滅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시간적인 측면

因緣果報

無常 시간적 연기관


몸은 공간에 지배적이다. 마음은 시간에 지배적이다. 즉 몸과 마음은 상대성 원리에 지배된다. 고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절대의 세계로 가야, 차원을 달리해야, 깨달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무상&무아인 줄을 모르면 괴로울 거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무상&무아인 줄을 알면 안 괴롭다.

이것이 3법인(三法印)이다. “이것이 진리(法)다”라는 도장이다.

無常, 無我, 苦, 涅槃은 4법인(四法印)이다.



화두 중에 '북두(北斗)를 면남관(面南觀)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굴을 남쪽으로 향한 채 북쪽의 별을 보라.'고 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얽매여서는, 집착해서는, 무상&무아를 모르고는 이 문제를 수용할 수가 없다. 모든 알음알이를 다 내려놓을 때,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이런 소식 입니다.


그러나 알음알이를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무지무명, 몰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쥐약인 줄 알아도 먹고싶고, 뜨거운 줄 알아도 놓기 싫은 게 뭇중생들의 모습입니다. 


덧글-2: 

(아상&아집) 모르는 거는 몰라서 그런거니까 그렇다치고, (법상&법집, 공상) 부처님 법 만나서 들었는데 잘 못 알고 있는 거는 문제가 좀 심각합니다. 이거는 몰랐을 때 보다 더 고치기 어렵다고 합니다. 

(업장소멸) 그래서 우선 정견을 가져야 되고, 바로 알아야 되고[견도], 잘 안되더라도 알아차리고 내려놓기를 계속 연습하면[수도], 언젠가는 자유인[무학도]이 될거라고 굳게 믿고 가야지요.


정말 삶이 힘들 때, 정말 상처가 깊을 때, 정말 간절할 때, 눈물을 흘리다가 흘리다가 눈물마저 말라버리면, 그때는 아마도 이 반야심경이 생명줄같이 와 닿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걸 그때서야 진심으로 알게 되니깐요. 그러니깐 그 전에는 그냥 아이고~일어나야지~일어나야지~하면서도 좀 더 자고 아이쿠~하면서 사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크게 자기 인생이 문제 없으면, 그냥 그렇게 사는 것도 (아예 법을 모르고 살아도) 나쁘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다 잘 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