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보살이란? Bodhisattva
지난번 반야심경의 배경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반야심경의 배경은 마가다국 왕사성 영축산이다.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대비구들과 보살마하살들이었다. 부처님과 대중들은 아주 깊은 삼매에 들었다. 그것을 우리는 광대심심삼매라고 한다. 그 삼매에 드셨을 때,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보살이 깊은 삼매 가운데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함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그것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리푸트라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그것을 보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질문을 했다. 그 보살의 경지 제법이 공함을 깨닫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 그런 대승보살의 경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관자재보살님은 사리푸트라에게 아주 자세하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설했다. 이 설법이 끝나자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셔서 관자재보살과 사리푸트라를 칭찬하며 바로 지금 설한 법이 진실 그대로다 이렇게 증명을 해 주셨다.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이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닫고 크게 기뻐하고 이 법을 이세상에 널리 전하리라 발심을 했다. 이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경의 주인공이 누구냐? 관자재보살이다. 소승에서 또는 성문연각승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지혜 제일 사리푸트라가 대승보살인 관세음보살에게 대승사상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이 관세음보살님께서 대승의 공사상에 대해서 법을 설하셨다. 이런 형식을 빌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이것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런 논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설해진 설법의 내용 그것이 무엇인가? 누가 말했고 역사적 배경이 어떤가?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내용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내용인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으로 이끄는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봐야 된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문으로 들어간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님께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실 때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오온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여실이 깨닫고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느니라
전체 문장에서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소위 우리가 글을 쓸 때 말하는 두괄식에 속한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첫 문장에 나와있다. 이 문장에서의 주어는 누구인가? 관자재보살이다. 관자재보살이(관세음보살이) 무엇을 했나?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성문연각승이 아니고) 대승보살의 관자재보살이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데 어떤 수행법을 닦았는가? 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그 바라밀 수행법 중에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이렇게 수행정진을 해서(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어떻게 됐는가? 깨달았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았다. 이게 조견오온개공이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았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를 깨달으니 어떻게 되던가?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버렸다. 도일체고액. 모든 번뇌와 모든 속박 끊어져 버렸다. 모든 괴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니르바나, 열반, 해탈.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열반을 증득했다. 해탈을 했다.
다시 정리하면 … 생략(앞문장 반복) … 바라밀 수행법은 몇 가지? 10 바라밀 또는 6 바라밀 수행법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반야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 생략 … 마침내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마침내 붓다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앞으로 몇 번의 강의를 해야 된다.
그 가운데 이번 시간에는 보살이 뭔가? 이거에 대해서 먼저 강의를 하겠다. 보살의 원어는 bodhi sattva, 발음을 한자로 해서 우리식으로 읽으면 보리살타이다. 보리살타를 줄인 말, 보디(깨달음, 부처, 밝음)+사트바(무명, 중생, 어둠). 정반대의 단어다. 하나는 아주 밝음을 상징하고 하나는 아주 깜깜한 어둠을 상징한다. 이 두 가지가 합해졌다. 보디사트바 부처와 중생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앞의 것을 수식어로 하면 “깨달은 중생’. 중생은 중생인데 깨달은 중생. 그러면 중생이 깨달으면 뭔가? 부처다. 깨달은 중생=부처. 깨달은 중생=깨닫긴 깨달았지만 아직은 중생이다. 그러니까 중생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으로부터 첫발을 디딘 보살을 ‘초발심보살’이라고 한다. 초발심보살은 거의 중생이나 진배가 없다. 그런데 점점 정진을 해서 거의 부처에 이르기 직전까지 왔다. 그래도 보살이다. 근데 이 말은 보살이지만 거의 부처에 다름이 없다. 그래서 보살은 이렇게 범위가 넓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 중간단계를 52위, 5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중생이 부처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 그게 바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믿음. 신심이다. 믿음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내가 지금 괴롭게 살고 있지만 내가 이 어리석음을 깨트리면 나도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그런 부처님 같은 분이 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된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중도에 자꾸 포기하게 된다. 비록 내가 지금 몸에 병이 들고 가정에 불화가 있어서 헤어지고 사업은 망해서 부도가 나고 온갖 고통에 빠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따라서 수행 정진하면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한 부처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열반과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 믿는다면 이런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가? 이런 믿음이 확고부동한가? 이게 있어야 보살로서 출발이 된다. 그러니까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 이 발심, 마음을 낸다. 마음을 내야 된다. 어떤 마음을 내느냐? 깨닫겠다는 마음을 낸다. 발보리심. 어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느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최상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자. 이를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하면 그를 곧 보살이라고 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자=발보리심 자=발심한 자=보살. 정리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 그래서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확 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늘 나는 괴롭다 하고 수렁 속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이렇게 웅크려 들어있으면 영원히 이 고통의 바다 육도를 윤회할 뿐이다. 비록 내가 지금 고통에 빠져있지만 내가 여기서 벗어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야 된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여기 깜깜한 어리석은 고통에 빠져있는 온갖 것에 속박 받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있다. 중생의 특징은 무지. 어리석음이다. 무지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는 고통이다. 그 반대편에 아주 밝은, 깨달음, 자유롭고 행복한 이런 세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세계다. 부처의 특징은 밝음. 깨달음.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괴로움이 없는 행복, 속박이 없는 자유, 이렇다. 바로 이 중생이 부처의 길로 나아간다. 이 나아가는 길에 있는 자를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한다. 출발점에서 종착점에 이르는 이 과정에서 화엄경은 5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출발은 했는가? 뒤를 돌아보면서 점검을 하면서 아~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하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된다. 그러나 목적지를 보니 아직 까마득하다면 게을러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정진해야 되겠다. 아직 갈 길이 머니 중도에 앉아서 쉬어서는 안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고 나아가야 된다.
그러면 보살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금강경의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까? 머물러야 합니까? 어떻게 수행 정진을 해야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 괴로운 중생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부처님이 답하기를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말했다.
지금 내가 내 문제 내 인생도 해결을 못해가지고 누구한테 도움을 좀 얻어가지고 해결을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다 들어주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렇게 말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다. 돈이 없어서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딴 사람 도와주라 그랬다. 사랑을 못 받아 괴로워 하소연 했더니 사랑하라 이랬다. 제가 날 이해 안 해주는데요 괴로워서 죽겠어요 하소연을 했더니 네가 그 사람을 이해하라고 했다. 저를 좀 구제해 주세요 이랬더니 일체중생을 구제하라 이러더라. 그러면 부처님이 내 문제를 외면하고 내 질문에는 응답을 안 하시고 딴 얘기를 하셨는가? 아니다. 이게 부처님이 내 질문에 따른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신 거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을 항복 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느니. 즉 내가 이 중생을 구제했다고 하는 이 생각까지도 버려라. 내가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그래서 일체중생을 구제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는 이 생각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 수 있다? 해탈할 수 있다. 이것이 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이게 상하의 개념이 아니다. 좌우의 개념도 아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낼 때, 곧 상구보리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을 못 받아 괴로워 하소연 했더니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나요? 우리는 늘 이렇게 상대를 두고 상대를 고쳐서 내가 행복해지려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해 주면 내가 행복해졌다가 상대가 나를 미워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좋았다가 슬펐다가 하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내가 상대를 바꾸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던지 미워하는 거는 그의 자유입니다. 내 영역이 아닙니다. 나는 싫지만 그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나는 좋지만 그는 싫을 수가 있는 겁니다. 늘 내 마음같지는 않지요. 그래서 다만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다만 이해해야 하고 다만 도와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라밀 수행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그가 나를 사랑하던지 미워하던지 상관없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게 본원인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게 본원인가? 깨달음을 얻는 게 본원이다. 모든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얻는 게 본원이다. 근데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느냐? 부처님의 말씀대로 이세상에 한 중생도 괴로움이 없도록 내가 다 구제 마치면 내가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이세상의 괴로워하는 중생가운데 가장 열악한 게 어디에 있는 중생인가? 지옥에 있는 중생이다. 그 지옥에 있는 중생 한 명도 남김 없이 다 구제를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금강경의 내용과 똑같다. 지옥에 한 중생이라고 남아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으리라. 성불하기 싫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보살의 본원은 성불하는 건데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원이 성불 앞에 가 있을 정도로 그 원이 강하다. 성불하겠다는 원은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는 거는 아니다. 그 수행자의 절대 절명의 원 앞에 중생구제를 둔 거다. 그 만큼 중생구제를 하겠다는 원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면 중생을 구제해야만이 부처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논리다.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중생구제 안하고도 부처를 이룰 수가 있는데 중생들이 하도 불쌍해서 중생구제 다 해주고 부처를 이루겠다 이런 뜻이다.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는 한은 부처가 될 수 없는 얘기다.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는 것을 외면하고는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중생구제를 중생을 위해서 하는가 수행 삼아 하는가? 수행 삼아 한다. 이 얘기 들으면 약간 좀 헷갈릴 거다. 어~그럼 지장보살도 그 이기심 아닙니까? 네~ 이기심이라도 좋습니다. 이기심이라는 거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거다. 지장보살이 성불하겠다고 하는 이 마음에 남을 헤치는 건가 남에게 이익을 주는 건가? 이익을 주는 거다. 그러면, 중생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거하고 내 수행을 위해서 구제를 하겠다고 하는 거하고 차이가 뭔가? 오히려 중생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면 고상하게 보이고, 내 수행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면 좀 이기심으로 보이잖은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 큰 오류가 있다.
중생을 위해서 내가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한다 할 때, 근데 그 중생이 내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나 자기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나? 각자 자기 잘못으로 자기 업보로 지옥에 떨어졌다. 근데 하도 불쌍해서 내가 구해줬다. 그렇게 구해주면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지옥에 안 와야 되는데 이게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지옥에 떨어진다. 내가 3번까지는 구해주는데 또 떨어지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 중생 고통 좀 받게 내버려둬라 정신 못 차렸으니까 이렇게 되기가 쉽다. 왜? 그 중생을 위해 내가 도와주니까. 그 중생이 몇 번 도와줬는데도 효과를 못 보면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원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원이 중간에 멈추게 된다. 그런데 10번 구해주니 10번 떨어지고 100번 구해주니 100번 떨어진다. 그래도 그 중생을 구제해야 내가 성불할 수 있다면 이 중생을 구제해 주는 거는 내 일인가 그 중생을 위하는 건가? 내 일이다. 내 일이니까 도로 짜증을 낸다 내일을 방해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는 우리의 중생 심이고 바로
내 일이라는 이 말 속에는 중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업을 짓고 지옥에 떨어지는 거는 누구 일이고? 그의 일이고. 그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거는 누구의 일이다? 나의 일이다. 나는 다만 구제할 뿐이다.
어떤 바램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구제할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보살의 원은 끝이 없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다시 이 단어를 가지고 수행을 해보면, 자~ 여기에 깜깜한 중생이 하나 있고 이쪽에 아주 밝은 부처가 있다고 하자. 이 중생과 부처 사이에 보디사트바(보살)이 있다.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둡다는 말이다. 밝은 쪽은 부처의 광명이 비춰서 밝고 어두운 쪽은 중생의 어두움이 비춰서 어둡다. 그럼 이 중생이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점점 부처 쪽으로 가면 된다. 그러면 어둠은 점점 적어지고 밝음은 점점 커진다. 그러면 처음에 출발할 때는 밝음은 1%이고 어둠은 99%이다. 중간쯤 오니까 50 : 50이다. 그리고 부처의 가까이 가니까 99 : 1 이다. 좀더 가까이 가면 99.9 : 1이다. 좀더 가까이 가면 99.99 : 1 이다. 그러면 아직도 100이 됐나 안 됐나? 안 됐다. 왜 100이 안 될까? 아무리 가도 100이 안 된다. 왜 안 될까? 이유는? 중생의 어둠이 있는 한은 아무리 가도 100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보살의 위치(○↔◑↔●) 또, 반대로 이 보디사트바가 아무리 중생 쪽으로 가도 부처의 광명이 있는 한은 제로가 될 수는 없다. 즉, 빛이 1%이다. 더 가까이 가면 0.1이다. 더 가까이 가면 0.01이지 제로는 안 된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한은 보살은 중생이 될 수가 없고 중생이 있는 한은 보살은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가 있는 한 우리는 구제 못할 중생은 되지 않는다. 부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우리가 불성이 있다고 표현하는 거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반대로 중생이 있는 한은 보디사트바는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보디사트바가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부처가 되려면 부처 쪽으로 갈게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중생 세계로 가서 중생의 어둠이 하나도 없이 다 소멸해 버리면 보디사트바는 부처가 된다.
이 용어가 이해가 되는가? 그러니까 이런 사상을 갖고 이런 관점을 갖고 수행 정진하는 자를 일러서 보디사트바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승보살은 이런 이념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해탈의 방편으로 삼는 거다. 그러니까 수행처를 깊은 산속으로 택하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을 자기 수행의 도량으로 삼는다. 지장보살은 지옥을 수행의 도량으로 삼고,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를 수행의 도량으로 삼는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 비구라고 하는 한 수행자가 그 당시의 중생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사는 게 가슴이 아파서 “중생들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어 주십시오” 하고 부처님께 청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네가 해봐라. 그런 세계를 네가 만들어봐라” 고 답했다. 그러면 신심이 없는 자는 “아이고 부처님 그런 세상을 제가 어떻게?”라고 할 텐데, 신심이 있는 사람은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된다. 그리고 질문을 해야 된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방법을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 우주 공간에 있는 100,000억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세계를 보니까 정말로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그런 중생 세계를 살고 있는 곳도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사는 그런 세계도 있었다. 그걸 다 보시고는 “부처님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보고 48 가지 원을 세웠다. 이러이러한 공통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이러이러한 좋은 것은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그래서 그기에 신체장애가 없는 세상, 여성이라고 차별이 없는 세상, 전쟁이 없는 세상, 이렇게 온갖 조건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수행 정진을 내세 생생히 다급생래(多級生來)로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세계를 이루었다. 그 세계를 이루자 그는 곧 부처가 됐다. 그러니까 그 세계를 이루자 부처가 됐다. 하니까 이 보디사트바의 원리와 똑같다. 중생을 다 소멸해야 성불할 수 있다. 이런 얘기다. 그런 정토세계를 이루니까 그가 부처가 됐다. 성불했다. 그 정토세계를 극락정토라고 한다. 수 많은 정토가 있는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정토다. 그러자 부처가 된 그 부처님의 이름이 아미타불이다. 그래서 우리가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 곳에 날 수가 있는가? 가는 방식이 좀 쉬워야 된다. 너무 어려우면 못 간다. 그래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10번 만이라도 그곳에 나겠다는 마음을 내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 날 수가 있다. 그러면 나쁜 짓 많이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10번만 부르면 되는가? 된다. 그 참 쉽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쉽지만 쉽지가 않다.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을 불러도 돌부리에 탁 채여서 넘어져도 아미타불이 안 나오고 “아야” “엄마야” 이렇게 나온다. 돌부리에 채여서 넘넘어 질 때 급한가 숨 넘어 갈 때가 급한가? 숨 넘어 갈 때가 더 급하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이 입에서 나오겠나 안 나오겠나? 안 나와. 그 10번을 부른다는 거는 정말로 간절해야 된다.
돌부리에 채여서 넘어가거나, 재산이 다 날라 가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입에서 뭐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나무아미타불~”,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나무아미타불~”,
아무리 괴로워도 사람이 죽어도 “나무아미타불~”,
오늘 병원에 가서 암 검사를 했더니 암이라고 판명이 났다. 뭐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숨 넘어 갈 때 아미타불이 안 나올 수가 있다. 근데, 우리가 지금 부르는 그 염불이 염불인가? 노래다. 그저 기분 안 좋으면 부르고 기분 좋으면 안 부르고, 답답하면 부르고 조금 살만하면 또 안 부르고, 그건 수행이 아니다. 그냥 여가로 하는 거다. 그러면 이런 법장 비구의 서원, 48대원, 극락세계, 아미타불, 이런데도 다 이 대승수행의 원리에 의해서 경전이 설해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의 원리,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했을 때,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어라 일체 중생을 다 구제 마쳤다고 하더라도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 하라.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목욕하고 이랬다고 나와서 “야 오늘 나 세수했다. 나 오늘 목욕했다” 이렇게 자랑하는가 안 하는가? 안 한다. “나 오늘 세수했는데 뭐 줄래?” 이렇게 하는가 안 하는가? 안 한다. 근데, 가끔 어린애는 그렇게 한다. 엄마한테 “나 세수했는데 뭐 줄 거야?”이렇게 묻는다. 그건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다. 어리다=어리석다. 어른은 그런 사람 없다. 왜? 이건 누구 일이니까? 내 일이니까. 남의 일이면 대가를 바란다. 내 일에는 대가가 없다. 보살은 중생 구제 일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바라는 바가 없다. 여기에 세수했다 이런 거 없는 것처럼. 매일매일 세수했지만 세수했다. 매일매일 숨쉬지만 나 오늘 숨쉬었다. 이런 얘기 안 하듯이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지만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런 말 안 한다. 이런 생각도 안 한다. 이렇게 우리가 정진을 해야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서로 부르고 불리고 있는 보살이라는 수행법이 바로 이런 수행법이다. 이런 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바라밀 수행법이다. 이걸 분명히 알고 부지런히 정진을 해 나가야 한다.
덧글-1: 이 장에서 '다만 할 뿐'이란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업을 짓고 지옥에 떨어지는 거는 그의 일이고, 10번이면 10번, 100번이면 100번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거는 나의 일이다. 또한 1000번, 10000번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
덧글-2: 하고 안하고는 다 각자의 자유입니다. 본질은 하느냐 안하느냐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자기의 마음을 보는 겁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냈으면, 즉 해탈하려고 마음을 냈으면 깨달을 때까지 다만 할 뿐입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0.1%에서 고작 0.5%만 되었다해도 0.4%의 깨달음에 도달한 거니까 좋은 일입니다. 다음 생에 나머지 100-0.5=99.5%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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