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애쓸 것 없는 경지-육바라밀(1)
오늘은 관세음 보살님께서 어떤 수행을 했는가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 관세음보살님께서 행하신 수행은 반야바라밀다 수행이다. 관세음보살님 만이 그 수행을 하는 게 아니고 모든 보살들이 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보살님들만 그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셔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으셨다. 여기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셨다. 그것이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행(수행하셨다. 행하셨다. 실천하셨다.) 심(매우 깊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셨다. 여기서 핵심은 반야바라밀다이다.
반야, 팔리어 [[pāli-], 중세 인도•아리아 어의 일종으로, 인도 서쪽 지방의 민중어인 파이샤치(paiśācī) 어를 말함. 팔리어 pāli는 선(線)•성전(聖典)을 뜻함. 팔리 어라는 말은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上座部)의 삼장(三藏)이 동남 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삼장의 언어를 성전어(聖典語), 곧 팔리 어로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됨]는 panna이다. 산스크리트로[Sanskrit, 범어]는 Prajna이다. 번역하면 지혜, 깨달음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지혜,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것을 번역을 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는 이유는 그냥 지혜라고 해버리면 그 지혜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다. 중생의 지혜, 성인의 지혜도 반야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 반야라고 할 때는 적어도 불보살의 지혜, 일체 제법의 참 모습을 훤히 다 알 수 있는 그런 지혜를 반야라고 부른다.
바라밀다, Paramita, Para(저 언덕)+mita(건너가다),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도피안(到彼岸), 여기서 이 언덕이 상징하는 것은 차안, 괴로움을 상징한다. 그러면 저 언덕이 상징하는 것은 피안, 괴로움이 없는 세계, 해탈의 세계이다. 이 언덕의 윤회의 세계, 속박 받는 세계이다.
이 언덕 : 차안-현실세계-중생의 세계-윤회-사바세계-무명
저 언덕 : 피안-이상세계-부처의 세계-해탈-극락세계-광명
그러니,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중생이 부처가 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첫 번째가 뭐니뭐니해도 money가 제일이다. 돈이 있으면 벗어날 수 있다. 돈이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출세를 해야 된다. 돈과 권력이 있어도 세상사람들로부터 비난 받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어야 된다. 명예가 있어야 된다. 이러한 것이 다 갖춰져 있어도 몸이 안 좋으면 소용이 없다. 건강하고 오래 살아야 된다. 이러면 다 되는가? 아니다. 자손만대로 계속 계승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다 돈 벌려고 하고, 출세하려고 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하고, 건강에 좋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고, 자식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하고 이런다. 그러면 정말 괴로움의 이 바다를 건널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런 거로 건널 수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필요가 없다. 부처님은 이미 다 가지셨다. 근데 이런 것으로 해탈,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떤 길인지 찾으시고 마침내 그 길을 찾으셨다. 그래서 그 것을 이루셨다. 성불하셨다고 하는 거다. 그 때 어떻게 해서 이루셨나? 깨달음을 얻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반야를 증득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만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불교가 다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깨달아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러면
깨닫는데 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가?
우리가 밤에 자는데 꿈을 꿔서 그 꿈속에서 칼을 든 강도를 만나 아무리 도망을 가지만 그 강도가 뒤쫓아 와서 누가 나를 숨겨줄 살려줄 사람을 찾는다. 그 때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하나님을 부르든 누구를 불렀다 그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간절하게 불렀더니 누가 도와줬을 때 우리는 가피(加被)를 입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그렇게 숨겨줬지만 또다시 길을 가다가 가도를 만날 수가 있다. 이것은 해결이 되지만 다시 또 재발을 할 수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렇게 도움을 요청을 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는 강도가 쫓아오고 앞에는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도망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옆으로 가려니 천길 낭떠러지고 하늘에는 독수리가 노려보고 있고 땅에는 뱀이 우글거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사면초과(四面超過)다. 이럴 때 우리가 늘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힘이 있어서 호랑이를 없애고 강도를 이기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런 것들을 물리치고 나를 구제해 주든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서 절대 절명의 수간에 처했는데 눈을 번쩍 떴는데 꿈이더라. 그러면 벗어난 건가 안 벗어난 건가? 벗어났다. 어떻게 벗어났는가? 눈을 떠서 벗어났다. 깨달아서 벗어났다. 깨어나서 벗어났다. 그러면, 꿈속에서 누가 나를 보호해줘서 안심하는 거는 사실은 아직도 꿈속의 이야기다. 그 속에서는 하나는 강도고 하나는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이 있다. 그래서 하나는 원수고 하나는 천안[千眼, 帝釋, 제(帝)는 산스크리트어 indra의 번역, 석(釋)은 산스크리트어 śakra의 음사. 신(神)들의 제왕인 샤크라〔釋〕라는 뜻.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을 지킨다고 함.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고 함.]이야. 그런데 눈을 번쩍 뜨니까 본래 강도도 없었고 나를 도와준 하느님도 없었다. 이렇게 고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가 제일 의지하는 사람이 누군가? 남편에게는 아내고, 아내에게는 남편,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제일 의지한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의지하던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게다가 사업도 망했다. 그래서 몸져누웠다가 며칠 후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고 진단이 나왔다. 이런걸 뭐라고 하는가? 업친데 덮친 격이다. 이럴 때도 우리가 눈에서 번쩍 뜨면 마치 꿈에서 깨는 것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냥 그대로 두고 이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벗어나는 게 반야바라밀다이다.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출세를 해서, 명예를 얻어서, 건강하고 오래 살아서, 자식이 잘 돼서, 이렇게 벗어나는 것 이것은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져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것도 완전한 벗어남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 이게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여기에 태어난 이는 다른 이의 즐거움을 자유로이 자기의 즐거움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다고 한다)이다. 이것은 내가 천상에 나고 싶다고 하는 방식이 이런 거다. 그러나 모든 이런 복은 지은 인연의 과보다. 그러니까 아무리 복이 많다고 해도 복이 다하면 다시 이세상에 떨어지는 거다. 이것을 복진타락[福盡墮落, 지은 복이 다 하면 다시 사바 세계로 떨어진다]이다. 비록 천상에 낳다 해도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이곳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세계다. 이것은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러면, 완전하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뭔가? 그게 바라밀다인데 이 바라밀다를 이루려면 바로 반야,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님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얘기다. 즉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부처님 당시에 제일 큰 나라가 마가다국[요즘의 미국, Magadha, Rājagrha]이다. 그 나라의 수도가 라자그라[라자(왕)+그라(지배)=왕사, 왕들의 지배]이다. 그 왕사성에서 왕 중의 왕, 빈비사라왕(頻毘沙羅大王)은 그 당시 인도에 있던 나라 중에서 제일 큰 나라의 왕이었다. 역사도 오래되고, 세력이 제일 크고, 군대도 제일 많고, 마차도 제일 좋고, 제일 큰 집에, 제일 값비싼 보석에,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제일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여인 수십명을 두고 있고, 수십명의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우리의 스승 부처님이 계셨다. 부처님은 가족을 다 버리고 홀로 계시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 다녔다. 아침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어 드시고 나무 밑이나 동굴 안에서 잠을 자고 호위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궁성밖에 그리드라쿠타[Gridhrakuta, 영축산] 돌무더기 위에서 홀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빈비사라왕에게 뭐 부탁하러 가야 되고,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의 제가신자이므로 부처님이 가셔서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집도 많은데 한 채 얻고, 마차도 많으니 한 대 얻고, 옷도 많은 데 한 벌 얻고, 필요하면 궁중에 가서 이거 하나 주시오 저거 하나 주시오 할 텐데 그렇게 한적은 한 번도 없고 왕이 늘 힘들고 괴롭고 답답해서 부처님께 도움을 청하러 온다. 근데 왕이 부처님께 제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왕궁으로 좀 납시라 하면 부처님이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 좋은 음식 차려서 상담하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왕궁에 안 가신다. 그 산에 계신다. 부처님과 의논은 해야 되고 부처님은 안 오시고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왕이 간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왕이라도 인생이 괴로우니까 자기가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산 밑에 두고 걸어서 산을 올라갔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빈비사라왕의 길이 있다.]
부처님과 상담할 때 옆에 신하가 있으면 되는가? 왕이 인생이 괴로워서 상담을 한다. 이거 체면상 안 된다. 그래서 신하들은 있으라 하고 자기 혼자 올라가서 부처님과 상담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성지순례 가보면 [왕이 여기까지 마차를 탔다. 여기서는 걸었다. 여기서는 혼자 부처님께 찾아가서 인생상담을 했다.]라는 안내판이 있다. 부인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 골치가 좀 아프고, 왕자와 공주들이 많지만 골치가 아프고, 음식은 전 나라에서 제일 좋은 거는 다 왕에게 바쳐도 혹시 독을 탔을 지 모르니 그 음식은 만든 이가 먼저 맛을 보고 죽나 안 죽나 보고 안 죽으면 은수저를 넣어서 먹을 수 있고 궁궐의 성벽을 몇 겹을 쌓고 궁궐을 짓고 입구마다 첩첩이 무장한 군인들이 보호를 하고 부부관계를 해도 총칼 들고 옆에서 지켜 봐야 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참~ 이렇게 많이 가지고도 인생이 괴롭다.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진 왕이 인생이 괴로워서 아무것도 없는 부처에게 도움을 받으러 간 거다.
그러면 부처님은 왕에게 좋은 법문을 해줬고 왕은 고마워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어서 내려왔다.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줬는데, 왕은 온갖 걸 가지고도 괴로워서 남에게 도움을 청해야 된다. 그뿐인가 그렇게 다 가지고도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으면 빼앗아 데려와야 하고 어디에 좋은 특산물이 있다면 또 가져와야 되고 말이 그렇게 많은데도 어디에 좋은 말이 있으면 또 가지고 와야 한다. 계속 가져야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든다. 빈비사라왕은 왜 행복하지 못한가? 여기서 우리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재물, 권력, 명예, 건강, 자식으로 해탈과 열반이 담보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 힘을 빌어서 그걸 얻으려고 한다. 이미 부처님은 “이것으로는 해탈의 길이 아니다”하고 이미 버렸지 않은가? 이 말은 재물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권력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러면 완전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깨달음을 얻어야 된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거다. 배우는 우리 불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 안 그러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져야 된다.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세상이 타와자재천이고, 자재천의 우두머리, 자재천왕이 마왕이다. 만약에 그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불자가 아니고 마왕의 자손, 마왕의 제자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해탈의 길이 아니다는 소식이다. 이것은 해탈의 길은 아니다. 이게 분명해야 된다.
이 바라밀다라는 뜻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넘는다. 이런 의미다. 어떻게 해야 저 언덕으로 넘어갈 수 있는가? 깨달아야 한다. 밝은 지혜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면 (바라밀다)이것이 유일한 길인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6가지가 있다.
육바라밀[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아니다 십바라밀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게 육바라밀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반야바라밀이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6개의 바라밀다중에 하나이면서 동시에 6가지를 대표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곧 6바라밀을 말한다. 이렇게 얘기한다.
보시바라밀, 베풀어야 이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널 수 있다.
근데 지금 우리가 괴로운 것은 못 ‘베풀어서’ 괴로운가? 못 ‘얻어서’ 괴로운 거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얻어야 된다. 더 많이 얻어야 된다. 그래야 괴로움에 벗어나는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럼 빌어서 많이 얻어라 이래야 답이 되는 건데 근데 괴롭다고 하니까 베풀어라고 한다.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괴롭다”고 하니까 너 “얼마 가지고 있니?” “없는데요” “하나도 없어?” “아니요 갈 차비밖에 없는데요” “그럼 그거 남한테 베풀어라” “그럼 저는 어떻게 가요?” “걸어 가거라”. 베풀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러면 얼른 들으면 이게 얘기가 안 된다.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그럼 왜 반야바라밀다가 중요한가? 그냥 베푼다고 보시바라밀이 아니다. 어떻게 베푸는가는 베푸는 것에 대한 아주 밝은 지혜와 베푸는 것이 결합이 되어야 베풀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보시바라밀이 될 수 있다. 그럼 그 밝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반야다.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이다.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은 크게 보면 반야바라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세상에 살고 있는 어리석은, 범부 중생은 어떻게 해야 행복한가? 얻어야 행복하다. 왜 괴로운가? 얻지 못해 괴롭다. 그래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달라고 한다. 그래서 제 뜻대로 얻어지면 좋다고 난리다. 가피를 얻었다고 난리다. 그런데 제 뜻대로 안 얻어지면 어떻게 하는가? 부처 믿어도 소용없다고 한다. 기도해봐야 소용없다고 한다. 영험있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 맘에 들면 부처님이고 제 맘에 안 들면 부처님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빌다가 안 되면 저기 가고, 저기서 안되면, 또 다른 데로 가고, 불교에서 안 되면 기독교 가고,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 불교냐 기독교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관세음보살이냐 지장보살이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뭐가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게 주어지느냐 안 주어지느냐가 중요하다. 이것만 주어진다면 종교도 바꿀 수 있고, 종파도 바꿀 수 있고, 절도 바꿀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바란다. 늘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못 산다는 것 아닌가? 자립적인 인간인가? 자립이 안 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겨우 사는 사람이다. 어린애 같다. 어른이 아니다. [성숙하지 못하다] 그런데 늘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데 늘 괴롭다고 한다.
지난 강의에서 공부한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베푸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도움이 필요해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가서 다 도우리라. 그런 관세음보살님이 괴롭다고 하는 얘기 들어봤는가? 그런 말 안 한다. 늘 베푸는데 괴롭다는 말 안 한다. 우리는 늘 도움을 얻는데 괴로워 죽겠다고 한다. 여기서, 범부중생의 특징이 뭔가? 얻으려고 하는 거 이게 범부중생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중생인가, 현인인가, 성인인가, 부처인가라고 봤을 때, 첫 째 범부중생의 특징은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를 보고 얻으려고 한다면 나는 범부중생이구나. 내가 범부중생이기를 원해서 범부중생이 된 거다. 얻는 자는 범부중생이고 주는 자는 보살이라고 한다면 뭐하고 싶은가 하면 범부중생하고 싶어한다. “범부중생은 얻으려고만 하고 이를 못 얻으니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얻으려고 하면 주어진다고 말하는데 이게 어디서 오는가?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게 어디서 오는가? 주는 자가 있어야 된다. 이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얻으려고 하는데 아무도 주려고 하는 이가 없다면 이 얻으려고 하는 게 얻어질까? 안 얻어진다. 그러니까 얻으려고 하는데 안 얻어지니까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범부 중생은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이건 누가 벌을 줘서 그런 게 아니고 이 모순 때문에 그렇다. 다 얻으려고 하고 줄려는 사람은 없다. 얻으려고 하는 대다수는 못 얻는다. 그래서 괴로울 수 밖에 없고 남의 것을 빼앗아 일시적으로 좋지만 뺏긴 사람은 가만히 있나? 또 뺏어간다. 이런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헤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좀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절에 가서 불전함에 10,000원정도 내면서 12,000원정도의 복을 바라는가? 아니다. 20,000원 받기를 바라는가? 아니다. 1,000,000원? 그것도 아니다. 엄청나게 바란다. 복권보다 더 바란다. 나는 불전함에 든 돈이나 불단에 오른 음식 안 먹는다. 그거 먹고 나면 책임져야 될 거 아닌가? 안 그런가? 우리 부처님은 가만히 웃고 말이 없다. 그럼 내려 먹은 사람이 책임져야 된다. 그래서 이 불공물을 절에 살면서 수행자가 함부로 먹지 마라.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소 돼서 갚아야 된다. 그런 옛날 얘기가 있는 거도 그렇다 이 말이다. 그 바램이 그 속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가 있다는 말이다. 그 답답한 심정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해탈로 가는 길이 아니다. 첫 째 그것은 성취될 수도 없고 된다고 하더라도 빚에 속한다. 언젠가 갚아야 된다. 그래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이게 범부중생이다.
두 번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현인이다. 나는 주는 게 없으니 받을 수가 없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나는 베푼 게 없는데 어떻게 얻겠는가? 이런 얘기다. 그래서 베푸는 거다. 이 베풀 때, 베푸는 목적이 뭔가? 베푸는 게 목적인가 이자 쳐서 받는 게 목적인가? 이자 쳐서 받는 거다. 이 범부중생은 베푸는 바 없이 그냥 얻으려고 하고 현인은 베풀어서 얻으려고 한다. 씨를 뿌리고 추수를 거두려고 한다. 이렇게 베품은 인연을 짓고 과보를 얻는 거다. 이것은 범부중생보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가 낮은가? 훨씬 높다. 이건 남을 헤치려는 생각이 없다. 공짜로 먹으려는 거는 아니다. 노력해서 자기가 먹겠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우리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 그런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은 높지만 투자했다고 반드시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는 거는 아니다. 농사를 안하고 그냥 가을 논에 가서 추수하겠다고 하면 얼토당토않지만 부지런히 농사지었다고 반드시 가을에 추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80~90% 확률은 높지만 안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후회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풀지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 농사 짓지 말고 놀걸. 이렇게 된다. 그럼 이때의 괴로움은 더 크다. 그래서 이것도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니다.
그럼 이 베푸는 것을 통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가? 그건 아니다. 이것도 아직 괴로움이 돌아올 씨앗이 남아 있다. 윤회의 씨앗을 심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건 해탈의 길은 아니다. 그러니까 보시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보시바라밀은 아니다. 우리가 보시는 많이 하지만 보시바라밀은 아니다.
세 번째, 보살의 경지, 성인의 경지는 어떤가? 베풀되 베풀 뿐이지 그기에 뭔가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베푸는 것으로 끝나는 거다. 누가 베고프면 음식을 그냥 주는 거다. 아프다 하면 그냥 치료해 주는 거다. 물에 빠지면 그냥 건지는 거다. 설령 건진 뒤에 내 보따리 내 놔라 해도 건져 주는 거다.
다만 베풀 뿐이다.
그럼 베푼 것으로 인해서 뭔가 괴로움이 일어날 아무런 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럼 이게 끝이 나는 거다. 그럼 이게 바라밀다이다.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조건 없는 베품이어야 한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는 어디 절에 보시하면서 “스님 제 이름은 쓰지 마세요. 제 이름은 안 쓸래요.” 이게 무주상보시가 아니다. “왜 이름을 안 써요?”하고 물으니 “무주상보시라야 복이 많데요” 더 많은 복을 받으려고~. 이름을 쓰고 안 쓰고가 핵심이 아니고 절의 제정을 투명하게 하려면 이름을 써야 한다. 이름을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거는 괜찮다. 무주상보시는 뭔가?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보시를 하는 거지 그기에 조건이 안 붙어있다. 이렇게 할 테니 뭘 달라 어떻게 해라 이게 없다는 거다. 이 무주상보시같은 마음이 되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만 사랑할 뿐이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내가 행복하고 남에게 베풀면 우리가 주인이 된다. 두 사람이 똑같이 밭에서 일을 했다. 누가 주인인지 누가 객인지 모른다. 끝나고 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 누가 주인이고 객인지 구분할 수 있다.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준다. 그러면 누가 주인인지 구분할 수 있다. 디스코장에서 막 춤을 춘다. 한 사람은 돈 받고 춤을 추고 한 사람은 돈을 내고 춤을 춘다. 그러면 누가 놀러 왔고 누가 일하러 왔는지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주인과 객을 간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자~하고 베푸는 사람이 주인이다. 받는 사람은 객/종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 되기가 싫다. 다 뭐 되고 싶다? 종 되고 싶다. 그래서 부처님 저 종 좀 되게 해주세요. 저 괴롭게 살도록 좀 해주세요. 우리는 잘한다고 하는데 기도 내용이 늘 그렇다. 이 말이다. 그래서 기도를 늘 하는데도 이 괴로움에서 못 벗어난다. 왜 못 벗어나느냐? 나빠서? 아니다. 어리석어서 그렇다. 거꾸로 알고 있어서 그래서 못 벗어나는 거다. 이 원리를 바로 알고 정진을 하면 금방 얼굴이 밝아지고 좋아지는 거다. 수행한다고 단식 안 해도 된다. 수행한다고 결혼 안하고 혼자 살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된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첫 째 법의 이치를 바르게 알 것. 두 번째는 그 것을 행할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신-[해-행]-증
덧글-1: 여기에 꿈을 예로 들어 꿈에서 깨어나면, 눈을 뜨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현실은 꿈과는 다르기 때문에 꿈에서 깨는 것처럼 간단치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실상일까요?
예컨대, 선지식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아무개입니다."
"아무개는 당신 이름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개똥이 엄마요."
"개똥이 엄마는 당신이 한 가정에서의 역할이요. 당신은 누구요?"
"......"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나, 나' 하고 살잖아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자기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세계를 과연 실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지켜보면 "이게 교묘하게 ~~할 수밖에 없도록 자꾸 몰아가요. 한번 그쪽으로 사고가 움직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결국은 그렇게 하고야 마는 쪽으로 움직이죠." 와 같이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은 일시적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미처 그것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그냥 그것이 실체이고 객관화된 진실로 받아들이고 즐겁거나 괴롭습니다. 마치 꿈과 같습니다. 정말 꿈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한번 한 생각에 매몰되면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해가 되나요?
덧글-2: 불교수행단계인 신해행증(信解行證) 가운데 번뇌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해(解)이고, 이렇게 파악된 번뇌를 떠나는 법을 닦은 것이 올바른 수행인 행(行)이다. 『대승기신론』
'초월 > 경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7.강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0) | 2014.08.13 |
---|---|
6.강 애쓸 것 없는 경지-육바라밀(2) (0) | 2014.08.13 |
4.강 관자재보살, Avlokitesvara bodhisattva (0) | 2014.08.13 |
3.강 보살이란? Bodhisattva (0) | 2014.08.13 |
2.강 반야심경의 배경 (0) | 201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