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경전

4.강 관자재보살, Avlokitesvara bodhisattva

開理無語 2014. 8. 13. 19:41

4.강 관자재보살, Avlokitesvara bodhisattva


지난번 시간의 강의는 보살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수행정진을 하는가? 이 보살이라고 할 때는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는 세 종류가 있다. 불-법-승의 승에는 3 종류가 있다는 말이다. 승문승, 연각승, 보살승. 승문승의 수행법은 4성제 8정도를 닦는다. 연각승의 수행법은 12연기를 관한다. 보살승의 수행법은 6바라밀을 닦는다. 그러니까 소승불교인 승문연각은 4성제 8정도 12연기를 닦고, 대승보살승은 6바라밀을 닦는다. 지금 이 금강경, 반야심경은 대승 경전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보살이고 그 수행법은 6바라밀 수행법. 그 가운데 여기에 반야바라밀 수행법을 닦고 있다. 이 보살 가운데서 수 많은 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이하 한량없는 보살들이 있다. 그 수많은 보살 가운데 이 반야심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살은 누군가? 관자재보살이다. 그러니까 그분이 관자재보살이든, 그분이 문수보살이든 보살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러면 중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삼는 사람들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이 따로 있고 깨달음을 얻는 길이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니다. 이것이 하나로 되어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길과 남을 이롭게 하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되어있다. 중생은 내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손해를 끼친다. 그래서 그 인연과보로 내가 다시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나도 헤치고 남도 헤친다. 이게 어리석은 중생의 길이다. 현명한 사람은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헤치지 않는다.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로울망정 남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지혜로운 자 대승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내가 그의 이익을 위해서 베푸는 거다. 그래서 그가 이롭다. 또한 누가 이롭다? 내가 이롭다. 그(녀)를 사랑하면 그(녀)가 기쁜가 사실은 내가 더 먼저 기쁜가? 내가 더 먼저 기쁘다. 그러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구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곧 내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보리를 구하고 한쪽으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데 이게 따로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이 선에 오면 선농일치(禪農一致), 일을 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다. 오늘 우리는 일과 수행의 통일.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자리이타(自利利他),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일관된 흐름 속에 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정진하는 자, 이런 수행자들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 수많은 보살들 가운데서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다.


그 관자재보살은 어떤 사람인가?

산스크리트로 Avlokitesvara bodhisattva

아바(지킨다)+로키테(본다)+스바라(자재 자유하다) 보디사트바

아바로키테는 지켜본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다. 눈을 뜨고 환한 상태에서 확연히 지켜본다. 이게 ‘아바로키테’이다. 스바라는 그것이 자유자재하다.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환하게 지켜볼 수가 있다. 이 ‘아바로키테’를 한문으로 관(觀)이라고 옮겼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다 할 때 한문으로 깨달음을 각(覺)자 또는 지혜 지(智)자를 쓰기도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에서 견(見)자를 쓴다. 안다. 아는 것의 대부분을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가? 보고 안다. 百聞不如一見. 그래서 볼 견(見)자를 쓴다. 또 그것을 볼 관(觀)자를 쓴다. 그러니까 관자를 쓸 때는 지켜본다. 이거는 그냥 눈으로 모양, 빛깔, 색깔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 할 때 볼 관(觀)자를 쓴다. 


우리가 인도에 성지순례를 가서 박물관에 가보면 Avlokitesvara bodhisattva라고 써져 있으면 그것이 관자재보살이다. 이 Avlokitesvara bodhisattva를 구마라십[Kumārajīva, 鳩摩羅什, 인도의 승려로 여러 곳을 편력하며 가르침을 받다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후《성실론[成實論]》등 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삼론[三論] 중관[中觀]을 확립하여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불리기도 한다.] 대사님은 관세음이라고 번역을 했다. 현장법사님은 이거를 관자재라고 번역을 했다. 관세음과 관자재는 동일 인물이다. 이거는 번역상에서 차이가 생긴 거다. 직역을 하면 관자재가 된다. 자유자재로 지켜본다. 법의 실장을 있는 그대로 다 알아차린다. 그런 분이다. 이런 뜻이다. 근데, 제법이 공한 도리를 꿰뚫어 알아보는 자다. 이럴 때는 관자재 이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중생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아는 자다. 이것도 관자재다. 그럴 때 중생의 고통은 주로 신음소리로 표현이 된다. 아야~ 이렇게 신음소리로 표현이 된다. 그러니까 그 중생의 신음소리 고통의 신음소리가 곧 세상의 소리다. 그 세상의 소리를 다 아시는 분이다. 듣는다고 해서는 좀 불확실하다. 그 중생의 신음소리를 듣고,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환하게 다 아는 자다. 그래서 이름이 관세음이 됐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관세음이라고 번역했다가 나중에 직역을 하다 보니 관자재가 됐다.


[대강 아는 정도를 말하면, 구마라십은 인도북부 (현재의 신장, 쿠차) 실크로드 天山南路 구자사막의 오아시스 구자국에서 태어났다. 초창기 불교를 실크로드를 통해 동쪽(중국)으로 전파하기 위해 산스크리트로 된 경전(반야경, 법화경 등)을 처음 한자로 번역한 장본인이다. 401년 후진왕 요흥에게 잡혀서 그의 압력으로 파계를 하게 되고 왕의 일행에 끌려 중국에서 불행한 생을 마친 승려로 KBS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또는 ‘동쪽으로 간 위대한 스님’을 참고, 사진 몇 장. 구마십의 동상, 동상 근처의 토굴, 지역 원주민]


사람이름은 먼저 불린 게 자꾸 불리 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관자재보다는 관세음이 더 익숙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중생이 관세음보살님에게 도움을 청할 때 그 때 부르는 용어로는 [우리의 고통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이름이 더 다가오는가 [제법의 공함을 훤히 깨달은 분이다]가 더 다가오는가? 우리의 고통을 다 아시는 분이다. 이게 더 다가 오니까 주로 기도할 때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제법이 공함을 논하는 이런 데서는 대부분 관자재라고 쓴다. 차이가 없다. 관세음의 다른 이름이다 라고 이해하면 된다.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 원어는 아바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 이다. 


그럼 이분은 어떤 분이라고 보통 정의 하는가? 극락세계 아미타부처의 좌 부처다. 우부처는 대세지보살이다. 그래서 사바세계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서 저 극락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이 분이 관세음 보살이다. 그러면 이분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이분의 이마에 반드시 부처님의 상이 있다. 불모다 이렇게도 말한다. 한 손에는 연꽃을 쥐고, 물들지 않는 성품을 상징한다. 중생이 이렇게 괴로워하지만 사실은 중생은 본래 부처다. 내가 부처임을 깨닫는 다면 바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한 손에 연꽃을 가지고 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즉시 해탈한다. 이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고 아우성을 친다. 그럼 이 아우성을 치는 중생을 어리석다고 내버려 둘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 손에는 감로수가 든 병을 쥐고 있다. 이 감로수로 중생의 고통스러운 심신, 괴로운 마음, 병든 몸을 치유해 주신다. 치료해 주신다. 이 감로수 병을 가지고 우선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숨 넘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부처님 법의 도리를 깨달아서 다시는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인도하는 자다. 이런 소식이다. 이분이 관세음보살이다. 


모든 보살은 다 원이 있다. 모든 원에는 본원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은 모든 보살은 다 부처가 되겠다는 원이다. 근데 그 부처가 되는 길은 곧 중생을 구제하는 마음을 내는 데서 부처의 길로 나아간다. 그래서 이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원을 갖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중생이 있다면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무관세음보살” 이렇게 부르면 그의 고통을 다 알아 볼 거다. 그 소리를 듣고 그 고통을 알아차린다. 그 다음 그 고통을 구제해 줄 거다. 건져 낼 거다. 구고구난(救苦救難)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을 구하고 환난에서 중생을 구제한다. 구고구난을 본래의 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의심이 든다. 이 많은 중생들이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아는가? 알 수 있다. 어떻게? 그 분은 눈이 천 개라서(우리처럼 여기 보면 저기 못 보고 저기 보면 여기 못보고 그런 게 아니라) 다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천 개의 눈을 가진 자다. 어떻게 이세상 이 많은 사람들을 다 구해주는가? 다 구할 수 있다. 그 분은 천 개의 손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千手天眼 관자재보살. 


그럼 천 개 가지고 62억이나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 구하는가? 옛날의 수 천은 아주 큰 수다. 아라비아 숫자 1,000이 아니고 한없는 눈, 한없는 손 이런 뜻이다. 한없는 눈을 가지고 뭐든지 다 알아보시고 한없는 손을 가지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全知全能이다. 그러니까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전지전능 관자재보살.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이 관세음보살의 원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떤 곳에서도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우리의 고통이 다 들어진다. 그 분은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면 또 이상한 질문을 하는 분이 또 있다. 남의 물건을 가지고 도망을 가는데 경찰이 뒤쫓고 앞의 도둑놈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나 살려달라고 하고 뒤에 쫓아가는 경찰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저 도둑놈을 잡게 해 달라고 한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이럴 때도 관세음보살은 이 중생의 고통도 들어주고 저 중생의 고통도 들어준다. 어떻게 들어줄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님은 110,000,000,000 (천 백 억)가지로 화현을 하신다. 그래서 누구의 모습으로 나툰다(나타나다의 고어)? 도둑의 몸을 나퉈서 경찰에게 잡힌다. 그러면 경찰과 도둑의 소원이 들어진 거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은 어디로 가야 되나? 감옥에 가야 된다. 그래서 자신을 그 중생의 고통을 대신함으로 해서 일체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몸을 천 가지 만 가지로 나투셔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한다. 이런 소식이다. 


그러면 이제 또 궁금한 게 있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떻게 그렇게 큰 능력을 갖게 되셨는가? 어떤 곳(기독교?)에서는 그런 전지전능하신 분은 본래 있었다. 이렇게 말한다. 불교는 그렇게 앞뒤가 없는 얘기는 안 한다. 항상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이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분인가? 이게 관음의 연기다. 어떻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이 되셨는가? 여기 연기에는 여러 종류의 다른 얘기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렇다. 


인도의 저 남쪽 바닷가 한 마을이 있었는데 그기에 한 장자(인도의 사업가, 기업가, 비지니스맨, 아주 부유한 사람)가 살았는데 아내가 있고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아내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내도 그립지만 너무나 두 아들을 사랑하니까 이 두 아들을 키우려면 두 아들에게 키워줄 엄마가 필요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새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필요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고 아이의 엄마가 필요해서 결혼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광고를 냈다. [누구든지 이 아이들을 자기 아이처럼 친 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고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 신분, 지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받아들이겠다.] 당시나 지금이나 인도는 신분을 타파하고 결혼이 성사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는데 그 가운데서 아주 가난하고, 훨씬 신분이 낮지만 아주 착실한 여자를 선발했다. 이렇게 해서 두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이 부인은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봄으로 해서 부귀영하가 주어진 거다. 아주 부자가 되었고 신분이 상승하여 아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것은 두 아이를 돌봄으로 해서 주어진 거다. 두 아이를 정말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이 남편이 볼 때 비록 새엄마지만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진짜 친 엄마보다 더 잘 보살피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심이 드니까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돌보는 보모나 유모처럼 대우를 하다가 이제 마음이 놓이니까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 거다. 그래서 그기에 애기가 태어났다. 보통 애기가 태어나면 자기 애기에게 관심이 더 가게 되는데 이 여자는 전처의 아이들을 더 아끼고 사랑했다. 이 때가지 늘 불안하고 의심하던 남편은 안심이 들었다. 자기아이가 낳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아이를 잘 돌보니까 정말 이 분은 착하구나 하고 안심을 했다. 이렇게 집안을 이 부인에게 다 맡겨놓고 몇 년 만에 장사의 길을 멀리 떠났다. 이렇게 해서 여자는 집에 앉아서 보니 집주인이 자기라는 기분을 만끽하였다. 이런 신분에서 시집을 갔을 때는 남편은 남편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주인이다. 그러니 남편이 있을 때는 집안 주인의 행세를 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언제나 알게 모르게 신경을 세우고 있어야 했다. 요즘은 안 그렇지만 우리도 옛날에는 시집살이 할 때는 긴장을 하고 살지만 친정에 가면 팍 퍼져서 긴장이 풀어지는 것과 이것도 비슷할 거다. 그러니까 남편이 없으니 진짜 자기가 주인이 되었다. 하인들도 부리고 눕던지 일어나든지 자든지 자기 맘대로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해 보니까 어릴 때 고생하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보니까 내가 도대체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됐느냐 참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이 모든 복은 두 아이 때문에 생긴 거다. 그러니까 두 아이가 너무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동시에 저 두 아이가 점점 커서 엄마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시점에 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혜택을 주고 사랑을 베푸는 것도 다 저 아이들 잘 키우라고 그런 거다. 저 아이들 다 커버리면 난 소용없어지지 않겠는가? 그 때 나는 결국은 버려지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낳은 이 아이도 같이 버려지지 않겠는가? 모든 재물과 재산은 저 두 아이에게 상속되지 않겠는가? 지금은 행복한데 10년 20년 30년 먼 미래를 생각하니까 나는 결국 옛날의 그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나는 절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기는 싫다.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그러니까 갑자기 막 불안해 진다. 마치 미래의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날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근심 걱정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부인이 다시 생각해 보니까 결국은 나에게 먼 미래에 오게 될 재앙은 저 두 아이 때문에 오는 거다. 저 두 아이만 없으면 이 모든 재산과 남편의 사랑을 다 독차지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니 저 두 아이가 모든 재앙의 근원,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 하늘에 사무치도록 恨(한)이 맺히게 한 怨讐(원수))다. 하루빨리 저 두 아이를 없애야 되겠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아무도 몰래 저 두 아이가 없어져야 된다. 바닷가니까 하루는 꾀를 내어서 아이들과 소풍을 가자고 해서 작은 배를 타고 멀리 떨어져 있는 무인도로 갔다. 그곳에 아이들이 구경하고 논다고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에 조용히 배를 타고 돌아와버렸다. 이 두 아이가 바닷가에 한참 놀다가 이제 해도 져가고 배도 고프고 집에 가려고 엄마하고 아무리 찾아도 엄마가 안보이니까 엄마엄마 찾으며 밤새도록 울고 이튿날 불러도 엄마의 응답이 없었다. 아무리 간절하게 부르고, 목놓아 부르고, 피를 토하고 불러도 엄마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어리지만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갔구나 이 생각이 미친 거다. 그러니까 엄마가 미웠다. 결국은 우리를 버리고 간 거는 새엄마이기 때문에 우리를 버리고 간 거다. 그러니까 이 새엄마의 미움이 아버지에게 옮겨간다. 엄마는 우리를 버렸지만 아버지를 불렀는데 그 아버지마저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은 아버지가 새 장가를 안 갔으면, 새 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없을 거 아닌가? 결국은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감으로 해서 우리에게 이 고통이 떨어진 거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워진 거다. 아버지가 미워지니까 더 이상 아버지를 부르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생모를 부르게 된다. 다시 엄마엄마하고 아무리 불러봐도 엄마는 대답이 없다. 그러니까 다시 엄마가 미워지게 된다. 엄마가 죽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지 않는가? 이렇게 처음에는 새엄마를 부르다가 다음에는 아버지를 부르다가 그 다음에는 생모를 부르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면서 지쳐 쓰러졌다. 그러니까 가슴에 한이 차진 거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나간다면 아니면 죽는다면 다음 생에라도 꼭 원수를 갚겠다. 그 원수의 첫 번째는 새엄마, 우리를 버리고 갔으니까, 우리를 죽였으니까. 이렇게 가슴에 한이 맺혀 들어간 거다. 이러던 중에 결국에는 동생이, 큰 애는 한 7살 되고 작은 애는 한 4살 됐는데, 동생이 약하니까 동생이 먼저 쓰러져서 이 형의 무릎을 베고 죽었다. 이 동생이 죽으니 형은 얼마나 더 가슴에 한이 맺히겠는가? 그래서 기진맥진해서 한이 극에 달했을 때, 만약에 이대로 죽었으면 다음 생에 원한이 돌고 돌 텐데 그때 엄마를 부르고 부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새엄마도 나의 이 고통을 모른다. 응답이 없고 내 아버지도 내 이 고통을 모른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고, 생모도 이 고통을 모르고 응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이 세상에는 나처럼 이렇게 극한에 처해서 아무리 부르고 부르고 신음을 해도 이웃집의 건너 방에 있는 사람도 모를 수가 있다. 그러니 이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내가 이런 고통에 빠져있는 데도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이 극한적 고통에 처하면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 거다. 그걸 이해하니까 내 고통을 서러워했는데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보이고 내가 알게 되니까 너무너무 불쌍한 거다. 그때 이런 원이 들었다. 나는 내 엄마를 부르고 아버지를 불러도 응답이다.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는 이런 사바세계의 어떠한 복락도 구하지 않겠다. 나는 중생인 지금 나처럼 이렇게 간절하게 고통 속에서 살아나려고 부르는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사람이 되겠다. 누구든지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도 나는 그 고통에 응답하리라. 누구든지 그 고통에서 헤어나고가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기꺼이 구제하리라. 이렇게 원을 딱 세우고 숨이 딱 끊어져 버렸다. 만약에 자기의 고통에만 빠져서 죽었다면 세세생생(世世生生)이 원수를 갚고 갚고 맺고 하는 이 중생계에 윤회했을 텐데 자기의 고통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고통을 통해서 남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에 내가 뭔가 도움을 주겠다고 한 생각 돌이키고 숨이 끊어졌다. 


이게 바로 발심, 초발심이다. 이게 씨앗이 된 거다. 이게 심어지고 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다시 심어지고 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다생급래로 돌고 돌면서 그 역량이 점점 커졌다. 1명을 구제할 수 있는 데서, 100명을 구제할 수 있는 데서, 1000명을 구제할 수 있는 데서 점점 능력이 커져서 지금은 아무리 많은 중생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을 쳐도 그걸 다 알며 마치 엄마가 애기가 울면 그 울음소리만 딱 듣고도 배가 고픈지 어디가 아픈지 아는 것과 같이, 부모가 자기 자식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고 금방 가서 젖을 먹이든지 어떻게 해서 그 아픔을 해소해 주듯이 그렇게 일체중생을 구제한다. 이 분이 관세음 보살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차별이 없다. 이게 보문(普門)이다. 어디든지 그 몸을 나투신다. 그 원력이 깊고 넓다. 중생의 그 고통과 환난을 다 구제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 분은 부모처럼 자비롭고 중생의 아픔에 큰 연민을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보문시현 원력홍심 구고구난 대자대비 관세음 보살]. 바로 그런 분이기에 나는 그분께 귀의 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명호를 간절하게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 보살은 일체중생의 아픔을 다 감싸 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냈는데 내가 그래도 관음행자라면, 관세음보살을 믿는 사람이라면 관세음보살님 저는 아직 힘이 약해서 일체중생은 좀 놔두고 내 남편 이거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내 자식 이거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내 부모 이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아픔을 내가 다 감싸 안고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작은 관세음보살이 된다. 다른 말로 어른 관세음보살이 아니고 새끼 관세음보살이 되는 거다. 그러면 새끼 관세음보살이 점점 크면 어른 관세음 보살이 되는 거다. 쉽게 얘기 한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거는 우리가 괸세음보살이 되자. 관세음보살처럼 나도 그렇게 살자.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어린 아이가 버려져서 죽는 고통보다는 덜하지 않는가? 그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데 왜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 못되겠는가?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고통 속에 있지만 이 모든 고통을 관세음보살님께서 보살펴 주실 거다. 하는 믿음 나도 관세음보살처럼 도리어 남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하는 그런 보살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정진하는 마음을 내야 된다. 이렇게 마음을 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기뻐지고 해탈할 것이고 우리의 가정이 좋아질 것이고 이런 수행자들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가 더 아름다워진다. 지금 욕심으로 살아가는 이런 불자, 이런 기독교, 천주교 이런 사람은 다 불자가 된다고 한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뀌겠으며 다 기독교인이 된다 한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뀌겠는가? 그것이 그거다. 이건 세력다툼에 불과한 거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불자가 늘어난다면 한 명이 늘어나고 2명이 늘어나면 개인에게도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운동을 우리가 일으켜야 된다. 이런 힘을 가져야 된다. 이런 원을 갖고 여기저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불러야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관세음보살이 그냥 중생의 구제뿐만이 아니고 일체중생의 고통을 꿰뚫어 보는 더 근원적으로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치신 분이다. 그래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분이다. 자유자재 하신 분이다. 그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그들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구제하는 무한한 힘을 가지신 원력 보살이시다. 그분이 지금 이 경의 주인공이다. 그분이 지금 이 법을 설한 거다. 이걸 분명히 알고 공부를 해 나가자.





덧글-1: 나툰다는 여기서는 '나타나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만 '작용하다'란 의미로도 쓰입니다.


이 장에서는 관세음보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또 우리가 생각할 때, 괴로울 때는 관세음보살을 찾아야 되나? 하고 하나의 상을 만듭니다. 네~ 관세음보살을 찾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불성을 찾는 거다. 라는 관점으로 돌이켜보면, 괴롭다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아! 내가 또 내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방편으로 나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주문, 즉 '생각 이전' '오직 모를 뿐'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reset key(컴퓨터 재부팅)로서 활용하는 게 어떨까요? 그런 관점에서 '관세음보살=모른다, 무!!!'의 의미가 더 선불교의 맥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덧글-2: 우리가 보통 어떤 한 생각(저 아이들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만 다시 저 아이들 때문에 내가 불행하게 될거다)이 일어났을 때,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한 생각(엄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즉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후회, 자책, 원망을 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고통의 본질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전생 이야기는 바로 현재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린 관세음보살은 마지막으로 숨이 끊어지기 전에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모두 내려놓게 되고) 아마도 자기의 본성, 불성, 대자대비한 마음을 찾은 게 아닐까요?


선불교는 대상(신)에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 매몰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한 독립, 자유인(내 인생의 주인이 나)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라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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