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애쓸 것 없는 경지-육바라밀(2)
지난번에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 행하셨다. 반야바라밀다는 대승보살의 수행법이다. 반야바라밀다는 6바라밀다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또한 이것은 6바라밀다 전체를 의미한다. 육바라밀[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이 여섯 가지는 모두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 그 첫 째 우리가 베풀게 되면 바로 이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가 있다. [보시, 베품(법시, 재시, 무외시), 무주상보시] 이것이 보시바라밀이다.
여기에 우리가 좀 이해가 안 된다. 얻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어떻게 베풀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이건 우리들의 생각이 잘못됐다. 우리가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항상 이 언덕에서 헤매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잘못됐다. 그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살펴봐야 된다. 왜 이것이 잘못됐는가? 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종이 되는 길이다. 노예가 되는 길이다. 속박 받는 길이다. 바로 이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주는 마음 베푸는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종에서 주인으로 전환되는 길이다. 괴로움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보시바라밀.
얻으려고 하는 존재, 줄려고 하는 존재, 그러나 주는 목적은 얻는데 근본이 있다. 그 다음이 조건 없이 주는 존재. 왜 조건 없이 줘야 하느냐?
붓다의 깨달음에서 볼 때는 본래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 無所有, 無我所 이렇게 말한다.
본래 내 것이라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세상의 만물은 다만 존재할 뿐이고 중생의 필요에 의해서 쓰여질 뿐이지 누구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야 된다. 그래서 보살은 베풀되 베푼다는 생각이 없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일체중생에게 다 베풀기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에게는 괴로움이 없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가서 그 지옥중생을 건져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것이 그들을 위하되 위한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야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보람이고 기쁨이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생각을 딱 바꿔서 그들을 돕는다 베푼다 하는 것까지 탁 놔져야 바라밀이 된다. 안 그러면 하다가 그만둔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다만 사랑할 뿐이어야 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안 하고는 누구의 문제다? 그것은 그의 문제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그래야 바라밀다가 된다. 베푼다고 다 바라밀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베풀어야 바라밀다가 된다. 이게 보시바라밀이다.
두 번째 지계(持戒)다. [지킴, 바른행위, 5계, 10계, 48계, 250계] 지계라는 말은 계율을 지킨다는 말이다. 계율이란 뭔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지계이다.
좀 추상적이다.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뭔가?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 뭔가?
자기자신을 먼저 살펴보라. 나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살고 싶나 죽고 싶나? 가끔은 죽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근데 그것은 정신이상이다.ㅠㅠ 약간 정신이상에서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이지 보편적으로는 살아있는 생명은 다 살고 싶어한다. 나만 그런가 다른 사람도 그런가? 다른 사람도 그렇다. 사람만 그런가 다른 생명도 그런가? 다른 생명도 그렇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누가 강제로 죽인다면 자기가 자발적으로 죽는 것은 놔놓고 누가 강제로 죽인다면 저항이 생기나 안 생기나? 생긴다. 미움이 생긴다. 원한이 생긴다. 원한이 생기면 반드시 원수를 갚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내가 죽게 되는 위기에 처한다면 반드시 원수를 갚을 거고 만약에 누군가 내 부모를 죽였다면 내 반드시 그 집에 가서 원수를 갚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게 돌고 도는 거다. 원한 중에 제일 큰 원한이 뭔가? 살인의 원한이다. 그러니까 칼로 가지고 찌르는 것, 총을 가지고 쏘는 것은 작은 행위지만 그것이 생명을 죽였을 때, 돌아오는 과보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작은 행위를 하고 큰 손실을 보는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또 반대로 내가 굶주려 죽어가거나 물에 빠져 죽어가려고 할 때, 누가 나를 구해주면 살려주면 고마운가? 고맙다. 이건 생명의 은혜다. 이 살려준 은혜는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장대로 가지고 구제해 줬다. 이건 작은 노력이지만 그 생명을 살은 사람 입장에서는 엄청난 은혜다. 그러니까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작은 행위를 하고 돌아오는 복은 엄청나다 이거야. 지혜로운 자라면 이렇게 해야 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라면 첫 째 살아있는 생명은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첫째, 살생하지 말고 방생하라] 죽어가는 생명이 있으면 기꺼이 살려준다.
이것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누구한테 이롭다? 나한테 이롭다. 방생을 하는 거는 복권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큰 이익이고 살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손실을 미연에 막는 거다. 이건 속박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지키는 게 속박이다. 지혜로운 자, 인연의 고리를 다 보는 자는 이건 지킬 게 없다.
두 번째, 우리가 아끼던 물건을 누가 빼앗아 갔다. 기뻐하는가 괴로워하는가? 괴로워한다. 찾으려고 한다. 훔쳐갔다. 찾으려 한다. 어디에 놔뒀다가 깜빡 잊어버리고 와서 돌아갔더니 없다. 그래도 섭섭하다. 그래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내가 가진 물건은 그런 물건 중에 하난데 누가 자기 거라고 와서 찾아서 도로 가져간다. 그러면 나한테 재산적 손실이 일어난다. 그래서 가난의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와 남을 동시에 볼 때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마라. 뺐지 말고, 훔치지 말고, 갖지도 마라. 이거는 작은 행위를 하고 큰 손실을 보는 거다. 일시적인 이익을 보고 장래에 큰 손실을 보는 거다. 반대로 우리가 어려울 때 곤궁할 때 그 때 누가 도와주면 너무너무 고맙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 주면 고마운가 안 고마운가? 고맙다. 그러면 그 고마움을 갚으려고 할 때 밥 한 그릇이 문제가 아니다. 수십 수 백배로 갚으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내 거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라. 남의 것은 뺐지 말고, 훔치지 말고, 갖지도 마라.
[둘째, 도둑질 하지 마라, 보시하라]
[셋째, 사음하지 마라.]
어떤 남자가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나를 껴안고 뽀뽀도 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은가 괴로운가? 괴롭다. 그걸 항의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뭐가 어때서? 내가 당신을 때렸어? 내가 당신한테 손해를 끼쳤어? 내가 한 일은 당신 사랑해서 그저 포옹해준 것 밖에 더 있어? 말은 맞다. 그런데 괴롭다. 왜 괴로울까? 이 성적인 문제, 이 애정에 관계되는 문제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좋다고 행하면 안 된다. 왜? 상대에게 괴로움이 되니까. 이게 사음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마라. 그러면 둘이 서로가 좋아서 하면 괜찮은가? 근데 여기 세 가지는 안 된다.
1. 상대가 남편이 있는 여자일 때, 그러니까 우리 둘은 좋지만 그 남자가 볼 때는 어떤가? 너무너무 괴로워.
2. 아내가 있는 남편 그 아내가 볼 때 너무너무 괴로워.
3. 그 다음 미성년자 그 부모가 볼 때 너무너무 괴로운 거야.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남을 괴롭히지 마라가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이것이 삿된 음행에 속한다. 이렇게 남을 괴롭히게 되면 내가 좋다고 남을 괴롭히게 되면, 그 과보가 크다.
넷째, 우리가 누구 말을 듣고 알고 봤더니 속았다. 거짓말이었다. 굉장히 기분 나쁜가? 욕 얻어 먹으면 기분 나쁜가?
[넷째, 거짓말하지 마라]
그래서 말로 남을 괴롭히는 거, 속이거나, 욕설을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꾸며서 말하거나, 여기저기서 두 가지 말을 하거나 이렇게 말로 남을 괴롭히는 거 하지 마라. 오히려 진실을 말하라. 자비롭게 말하라.
이 네 가지가 우리가 말하는 계율에 속한다. 계에 속한다. 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거다. 이게 4 가지 아주 중요한 계율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 되는 게 술을 먹지 마라.
[다섯째, 술을 먹지 마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마라]
중독성 물질을 먹지 마라. 술, 담배, 마약이 다 들어간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보면 남자가 술 먹고, 지나치게 먹고 이렇게 해서 가정불화가 많이 생기는가 안 생기는가? 많이 생긴다. 술 때문에 얼마나 분쟁이 많은가? 자기는 좋지만 타인에게 큰 괴로움이다. 또, 자기의 건강에도 안 좋다.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이건 손실이 많다.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 비록 아버지라 하더라도 아내라 하더라도 남편이라 하더라도 자식이라 하더라도 첫째 살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부부지간이든 부모자식지간이든 두려운가 안 두려운가? 두렵다. 괴롭다. 같은 가족구성원이라도 자꾸 뭘 훔치고 뺏고 하면 괴롭다. 같은 가족구성 부부라 하더라도 강제로 자꾸 이렇게 성적인 접촉을 하면 괴롭잖은가? 가족이라 하더라도 자꾸 거짓말하고 욕설하고 이러면 괴롭다. 가족 중이라도 술 먹고 취해서 돌아다니면 괴롭지 않은가? 가족이라도 이건 행하면 괴롭다. 근데 전혀 낯선 알지도 못하는 다른 남자 여자 그것이 아주 외진 곳에서 두 사람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절대로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뺏거나 훔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타인의 의사에 반해서 성적인 접촉을 행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이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술에 취해서 비틀대거나 이런 일이 없는 사람이다. 이 다섯 가지만 확실한 사람이면 두려워할 일이 있는가? 없다. 우리가 길 가다가 밤에 사람을 동물보다 더 무서워하지 않는가? 왜? 이 다섯 가지 때문에 이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뭐다? 짐승이다]
근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안 피우면 괴로운가 안 괴로운가? 그렇다고 피워버리면 더 나쁘다. 안 피우고 참아도 괴롭다. 우리는 지금 담배를 안 피우고 있다면 지금 괴로운가 안 괴로운가? 안 괴롭다. 왜? 피워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하니까. 피우는 게 나빠서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피우지 않아도 괴롭지 않다. 피우지 않는 사람은 안 피워야겠다는 생각도 안 한다. “아~~담배를 안 피워야지 참아야지” 이 사람은 피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범부는 어떠냐? 계율을 지키지 못한다. 현인은 계율을 지킨다. 참는다. 그러면 성인은 어떠냐? 그것이 나쁜 줄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가 있음을 알고 그렇게 행하면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지킬 것이 없는 거다.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아무도 담배를 안 피워야 된다는 계율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것처럼 지킬 것이 없는 거다.
그것이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이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일 때는 지킬 것이 없는 거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이 계율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 오는가? 속박으로 다가오는 거다. 만약에 이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인 줄을 확연히 알아차리면 속박인가 자유인가? 자유다. 아무런 속박을 주지 않고 우리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고 그거 다 지키고 어떻게 삽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은 그런다. “아이고 당신은 담배 안 피우고 어떻게 삽니까?” 심정이 이해가 되는가? 안 피우는 사람은 “그거 뭐 안 피워도 괜찮아 아무 문제도 없어. 그 담배 안 피우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아무 노력도 안 해” 그러면 그 사람이 피운다는 뜻인가? 아니다. 안 피우는데 안 피운다는 생각도 없다. 이것이 지계바라밀이다.
그러면 이 계율에 대한 반야, “계율에 대한 확연한 깨달음이 있어야 지계바라밀”이 되는 거다. 안 그러면 우리는 지계밖에 안 된다. 그러면 속박이 된다. 그러면 자꾸 어기게 된다. 그러니까 계율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키는 것만으로는 해탈이 안 된다. 지계바라밀이 되어야 된다.
그 다음이 인욕이다. [忍辱, 참음]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이세상을 본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앞뒤오른쪽왼쪽, 동서남북을 다 가른다. 모든 사물을 볼 때, 늘 자기가 중심이다. 자기가 기준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면 한 사람이 앞에 가고 한 사람이 뒤에 갈 때, 뒤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뭘 저렇게 서두르나?” 앞에 가는 사람은 “뭐 한다고 저렇게 꾸물거리나?”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이 같이 일을 한다. 한 사람은 좀 빠르고 한 사람이 좀 늦다 하면 뒤 사람은 앞사람을 보고 빠르다고 한다. 앞 사람은 뒤 사람을 보고 늦다고 한다. 우리는 황해를 서해라고 하고 중국에서 보면 동해다. 강북에서 보면 남산이고 강남에서 보면 북산이다. 이렇게 다 자기 선 위치에서 달리 본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이다. 오늘 우리가 옳다 그러다 맞다 틀리다 하는 것은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바라본 세계다. 자기의 카르마(업식)에 기준해서 본 세계다. 이건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다. 근데 우리는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이걸 절대화 해버린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 늘 시비를 일으킨다.
남편이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온다. 아내 기준해서 보면 나쁜가? 나쁘다. 근데 이남자가 어디 가서 술 먹나 하고 봤더니, 회사 끝나면 꼭 오다가 어디 한 군데 들러서 한 시간쯤 술을 한 잔 먹고 들어오는 거다. 그래서 가 봤더니 주인이 여자다. 근데 남편이 얼마 전에 죽고 혼자 사는 분이다. 근데 애들 키우고 살기가 어렵다. 근데 남편의 아는 분이다. 부인이 그렇게 혼자 어렵게 사니까 오며 가며 술을 팔아주는 거다. 그러면 이 가게를 운영하는 분이 보면 고마운가 안 고마운가? 고맙다. 그런데 부인이 볼 때는 어떤가? 남편이 나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동일한 행위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하면 “아이고 혼자 살고 힘들어서 그렇다” 그러면 보통 뭐라고 하나? “아이고 엉가이(어지간히) 자비심도 많다. 그 여자에게 베푸느니 나에게 좀 베풀어라” 이렇게 나온다. 이렇게 우리는 늘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
그렇게 해서 비판을 하는데 그러면 상대편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보니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각을 잘 못한다. 그러면 이게 갈등이 아주 심해진다. 그럼 이제 서로 억장이 무너진다. 의기가 막히는 거다. 이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라도 해야지 용서를 해줄 텐데, 자기가 더 잘했다고 우기니까 사람이 더 미친다. 이렇게 해서 갈등이 더 증폭이 된다.
그럴 때,
“아 서로 다를 뿐이구나”
“옳고 그르다고 할 게 본래 없구나” 이게 우리가 배우는 공사상이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텅 빈 거구나.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생기는 거구나. 그것을 절대화 시켜서 움켜쥐니 상이 되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그기에 집착을 하구나. 그래서 갈등이 생기구나”
이것을 내가 깨닫게 된다면 그러면 참을 것도 없어지는 거다. 용서해 준다는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지만 용서해준다는 말은 누가 옳다는 건가? 내가 옳다는 거다. 그래서 이 용서해 주는 수준 갖고는 해탈의 길이 아니다. 이거는 현인의 길이다. 성인의 길, 불보살의 길은 뭔가? 용서해 줄 것이 없어야 된다. 왜?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욕바라밀이 되려면 “참을 것이 없는 경지가 인욕바라밀”이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가 가끔 며느리 집에 와서 잔소리를 자꾸 한다. 음식은 뭐 우리 아들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반찬은 이렇게 해야 되고, 이건 삶아야 되는데 너는 볶았고, 이건 생 걸 줘야 되는데 네가 삶았고, 뭐 이러고 옷은 또 팬티도 와이셔츠도 다려줘야 되는 데 그냥 줬고…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귀찮은가 안 귀찮은가? 귀찮다. 그러면 이제 대부분의 하소연이 “아이고 시어머니 잔소리 때문에 못 살겠다. 그냥 집에 와서 가만히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밥 다 해드리면 먹고 구경시켜드리면 구경갔다 오고 그렇게 계시면 좋을 텐데 늘 간섭을 해서 힘들다”는 거다. 그러면, 여기 갖다 놓으면 가만히 있고 저기 갖다 놓으면 저기 가만히 있는 거는 꼬다 놓은 보릿자루나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그러면 이거는 뭔가? 시어머니를 내 시키는 데로 해라 어린애처럼, 밥 주면 밥 먹고, 구경시켜주면 구경이나 하고, 입다물고 있으라 하면 가만히 있으라는 이 얘기다. 이게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태도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갈등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남편은 나에게는 남편이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남편은 자기의 아들이다. 그러면 이 아들의 습성에 대해서 부인이 잘 아는가 어머니가 더 잘 아는가? 어렸을 때부터 키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더 잘 안다. 부인은 내하고 사니까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보면 “어~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저렇게 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간섭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아는 바를 얘기하는 거다. 근데 며느리 입장에서는 이게 간섭이고 잔소리다. 이럴 때 며느리가 만약 불자라면, 불법을 아는 자라면, 지혜로운 자라면, 우리 남편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어머니가 더 잘 안다. 어머니가 왔을 때, 우리 남편이 어떤 식성을 갖고 있고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좀 배워야 되겠다. 이렇게 탁 마음을 내면 어떻게 되는가? “음식을 이렇게 만든다.” “아~예, 그걸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요즘 나로서는 정성을 드려 해줬는데 젓가락 갖고 집적집적 안 먹고 짜증내고 하더니 야~이거 삶아야 되는데 볶아서 그랬구나. 날걸 줬는데 사실은 무쳐줘야 되는구나. 아침에 나갈 때 신경질을 내고 나가서 저게 왜 저러나 했더니 와이셔츠를 안 달여줘서 저렇구나” 이렇게 어머니를 통해서 배운다. 이 말이다. “아~그랬어요? 아~그랬어요?” 이렇게. 그러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참는 건가 참을 것이 없는 건가? 참을 것이 없는 거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배운다. 이 말이다.
그리고 또 모자지간에 오래간 만에 만나면 할 얘기가 많은가 안 많은가? 많다. 그러면 저녁에 “아이고 여보, 어머니하고 주무세요.” 이렇게 자리를 비켜준다. 오랜만에 모자지간에 같이 놀아라고 얘기도 좀 하고. 그러면 이웃집에서 볼 때는 야~ 저 집 며느리 대단하다. 그 시어머니 잔소리를 그렇게 참고 잘 견디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참을 것이 없다.
그러면 참는 자가 오래 참겠는가 참을 것이 없는 자가 오래 참을까? 참을 것이 없는 자는 영원히 참을 수 있다. 이게 괴로움이 아니다 이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忍辱波羅蜜이다. 그러니 우리가 참는 것은 인욕일 수는 있지만 인욕바라밀은 아니다.
그러면 이게 보시든, 지계든, 인욕이든 그냥 베푼다, 지킨다, 참는다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기에는 제법의 공성,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하는 나와 남을 동시에 바라보는 관점. 베푸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라고 하는 그 본질을 꿰뚫어 있어야 이렇게 된다.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만 그기에는 반야바라밀이 들어있고 지계바라밀이라고 하지만 반야바라밀이 들어있고 여기에 인욕바라밀이지만 반야바라밀이 들어있다.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정진 [精進, 목적을 향한 부단한 노력, 애씀], 노력. 우리는 게으르다. 이게 중생이다. 현인은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 노력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는 말인가 하기 싫다는 말인가? 하기 싫다는 거다. 하기 싫다고 안 해버리면 범부중생, 하기 싫지만 하면 현인. 근데 그 [하기 싫다]의 ‘싫다’는 어디서 오는가? 이 거는 내 카르마[산스크리트어, karma, 業]에서 온다. 좋다 싫다는 그러니까 그 싫다에 사로잡힘을 탁 놔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하는 거다. 하기 싫은 데 애쓰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다. 그럼 이것이 노력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아침에 5시에 일어난다. 못 일어나는 사람, 범부중생이다. 일어 나려고 내내 애를 쓴다 노력을 한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이불 밑에서 계속 노력을 한다. 하며 주로 못 일어난다. 아예 범부중생은 일어나기 싫다고 안 일어 나버린다.
근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는 것을 탁 꿰뚫어 보면, 일어나기 싫다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야지 라는 것이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난다. 주로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몸은 죄가 없다. 공연히 수행하는 사람이 몸을 자꾸 문제 삼는다. 못 일어나는 것은 몸이 말을 안들어서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일어나기 싫어서] 못 일어나는 거다. 일어나기 싫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이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는 게 (마음)공부다.
그러니까 어떻게 일어나야 되는가? 일어나버려야 한다. 어떻게 일어난다고? 일어나버리라니까. 그냥 벌떡, 싹 일어나버려야 된다. [그냥, 눈을 뜨면 된다. 꿈에서 깨면 된다] 그러면 일어나야지라는 건 번뇌에 속한다. 일어나야지라는 거는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 있고 그것과 싸우는 또 다른 번뇌에 속한다. 그러니까 번뇌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러니까 벨이 따르릉 울리면 일어나야지 라는 번뇌를 일으키지 말고 벌떡 일어나야 된다. 그러면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은 일어난 뒤에 생각인가 일어나기 전의 생각인가? 일어나기 전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연습을 하지 말고 저녁에 잘 때 벨이 울리면 싹 일어납니다. 이러고 딱 잔다. 그러면 벨이 울리면 싹 일어나려고 했는데 못 일어났다. 번뇌가 끼어서 아~ 오늘 놓쳤구나 다음에 다시 해봐야지. 연습을 하더라도 근본을 딱 꿰뚫어서 연습을 해야 두 세 번 하면 딱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일어나야지 라는 식으로 노력을 하면 10년 해도 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러니까 이 노력할 것이 없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살펴야 된다. 그래서 이 반야가 필요한 거다. 그냥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업식에 휘둘려서, 그 번뇌에 사로잡혀있으면서 자꾸 애 쓰는 거는 효과가 없다. 그러니까 훌쩍 뛰어 넘어버려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화장실 가서도 만화책을 본다. 게임 한다. 그게 노력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노력 하는 거 아니다. 그건 노력한다는 말 안 한다. 그냥 하는 거다. 재미있어서.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이세상의 일을 재미를 내서 가볍게 해야 된다. 이를 악 다물고 이빨이 부러지도록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뭐 된다? 병 생긴다. 그러면 이빨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이렇게 된다. 그러면 병 난다. 그래서 늘 가볍게 마음을 탁 내서 그냥 해야 된다.
그 다음에 간단하게 정리하면 선정이라는 바라밀이 되야 된다. 우리는 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들떠있다. [禪定 : 동요가 없는 마음의 안정, 고요함] 고요하지 못하다. 현인은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말은 고요하다는 건가 들떴다는 건가? 들떴다는 거다. “마음을 고요하게 할 것이 없는 경지” 고요하지 못하다는 거는 마음의 경계에 꺼달려있다는 거다. 경계에 꺼달려서 그기에 시비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다. 우리가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즉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음은 어디를 가나 고요해 있는 거다. 그래서 고요하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고요하게 하려고 할 게 아니라 경계에 꺼달리지 않도록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하지 자꾸 이미 이 경계에 꺼달려서 마음이 들떠있는 거를 눌러서 안정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밑에서 불은 떼고 위에 물은 끓는다고 자꾸 바가지에 물을 갖다 붇는 것과 같다.
불을 빼버려야지!!!
그래서 우리가 선정바라밀이란 선정을 통해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앉아서 선정을 닦는다고 선정바라밀이 되는 거는 아니다. 번뇌를 가지고 놀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것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참는 것은 고행이지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 욕망이 일어나는 데로 따라가면 쾌락이고 그것을 억누르면 고행이다. 오늘 우리는 그 둘을 늘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러면 욕망을 따라가지도 말고 억누르지도 마라. 이게 중도(中道)다.
그럼 따라가지도 말고 억압도 하지 않는 게 뭔가? 참는 거도 아니고 행하는 거도 아닌 거. 다만 지켜보는 거.
그것을 그것으로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짐을 다만 지켜볼 뿐.
이게 비파사나[비발사나, 毘鉢舍那,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팔리어 vipassanā의 음사. 관(觀)이라 번역. 몸과 마음은 무상•고•무아라고 통찰함.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함.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함. 통찰하는 수행.], 알아차림, 지켜봄. 그러면 사라짐. 이렇게 공부를 닦아가야 된다. 이 말이다.
우리가 노력은 참 많이 하는데 이게 약간 조금 방법이 잘못되어 시간을 많이 낭비한다. 수행하다 병 나고. 빨리 자유로워져서 우리가 가진 재능을 이세상을 위해서 세상의 필요에 다 곳곳에 쓰여야 된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중생은 자기 인생도 못 살아 남보고 내 도와달라고 하다가 죽고, 수행한다고 하다가 죽을 때까지 자기 인생만 매달려서 살다가 죽는다. 내 문제라는 거는 간단하게 해결을 해야 된다. 그리고 남는 생을 이세상에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데 써야 된다. 그 필요한데 쓰는 것도 “써야지”하면 안 된다.
자기 문제가 없으면 저절로 쓰여진다.
“이런 과정을 겪어서 반야바라밀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건 순서 개념은 아니다. 반야라는 거는 모든 바라밀의 이 근본 관점이 잡혀있어야 된다. 그래야 그것이 바라밀다가 될 수 있다. 선정을 닦는다고 선정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정진한다고 정진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인욕한다고 인욕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계를 지킨다고 지계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보시한다고 보시바라밀다는 될 수 없다.
이 “보시든 지계든 인욕이든 정진이든 선정이든 그것이 바라밀다가 되려면 바로 반야, 즉 법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다를 다 포함한다.”
그러니까 관자재보살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가 되는가? 베풀되 아무런 대가 없는 그런 베품의 행을 하셨고, 계를 지키되 당연하기 때문에 행하는 거고,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기 때문에 참을 것이 없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보신 거고, 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뭘 애쓰고 각오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거다. 마땅히 하는 거다. 애쓰고 노력하면 세 번 네 번하다 안 되면 실망하고 지친다. 다만 할 뿐이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거다. 안되면 다시 하는 거다. 연구해서 하는 거다. 그것이 정진이다. 길이 잘못됐으면 길을 바로 찾아야 되고, 길이 바른데 아직 거리가 멀면 계속 가야 되는 거다. 그리고 어디에 가나 꼭 무슨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그기서만 선정이 아니라 일체시 일체처에 경계에 꺼달리지 않는 그런 선정을 닦았다. 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바로 경계의 꺼달림을 알아차리고 즉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의 삶 그대로가 정진이다. 이게 그대로 수행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확연히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어느 정도 이런 법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이런 수행을 할 수가 있다. 또, 이런 수행을 통해서 반야바라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얻은 내용이 제법이 공한 도리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제법이 서로 연기되어있다는 것을 깨닫듯이 모든 법이 실체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게 다음 문장이다.
여기서 잠깐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조금 이론적인 설명을 더하면 이 반야라는 말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한다.
1. 존재의 참모습, 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를 반야라고 한다. 이것을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한다.
2. 그 실상을 확연히 있는 그대로 보는 나의 지혜, 이것 또한 반야라고 한다. 이건 관조반야(觀照般若)다. 비추어 보는 힘. 이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라고 했다.
3. 중생의 병을 하나하나 다 알아서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그 인연인연 따라서 바르게 인도해주는 힘. 이게 방편반야(方便般若)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제법의 실상, 진리 그 자체를 말할 때도 있고, 지혜를 말할 때도 있고, 방편을 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실상반야, 관조반야, 방편반야라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 그렇고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반야는 관조반야이다. 존재의 참모습을 내가 확연히 깨닫는 지혜, 비추어 보는 지혜. 이것을 반야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일체 법의 실상을 확연히 깨친 붓다의 지혜, 보살의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다.
덧글-1: '깨달음에서 볼 때는 본래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거는 깨담장에서 "가지고 온 짐 가방은 누구의 것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질문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근데 대부분의 우리는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것이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이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일 때는 지킬 것이 없는 거다.' 이거는 깨담장에서 '모든 것은 원래있던 제자리에 둔다'와 같은 이치입니다.
덧글-2: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텅 빈 거구나.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생기는 거구나. 그것을 절대화 시켜서 움켜쥐니 상이 되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거기에 집착을 하구나. 그래서 갈등이 생기구나” 이거는 깨담장에서 "그 때 왜 화가 났습니까?"로 공부하였습니다.
이거를 <천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자성이 없고 마음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마음 만일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죄와 망심 모두 놓으면 마음 또한 공하나니
시즉명이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이를 이름하여 진실한 참회라 하네
그리고 "불을 빼버러야지!"라든가 "뜨거운 줄 알았으면 탁 놔야지!"라든가 "쥐약이 들었으면 안 먹어야지!"의 표현을 보면 우리 뭇중생은 그것이 그것인 줄을 모르는 무지무명(無知無明)이 든지, 알기는 알겠는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매우 강력한 업식(습관)에 억매인 상태(집착, 취)이므로 선택을 하라는 겁니다. 눈을 떠든지 과보를 받든지~주인으로 살건지 종으로 살건지~^^(불교는 이렇게 매우 simple 합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여기에 우리의 스승 부처님은 매우 유용한 처방을 하나 주십니다.
그것을 그것으로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짐을 다만 지켜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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