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지난번 강의를 정리하면, 반야바라밀다 수행은 반야바라밀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6 가지 수행을 다 포함하고 있다. 육바라밀[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반야바라밀은 6개 가운데 하늘 의미하기도 하고 그 6가지를 다 포함한다. 이 반야바라밀 수행을 어떻게 하는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마침내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았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제법이 공함을 깨닫자 진정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수가 있었다.
여기에 조금 개념의 차이가 있다. 돌아가서 보면, 사리푸트라가 여쭈었다. 보살[수행을 하는 선남자, 선여인], 금강경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어떻게 수행을 해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가? 여기에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자,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선남자 선여인을 줄이면 보디사트바(보살)이 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고 질문을 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금강경하고 비유해서 이 문장을 비교해 본다면, 사리푸트라의 질문에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 즉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내야 한다.” 어떻게?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봐야 한다.”
이것이 범어 원본에 가깝다. 현재의 번역본을 가지고 그대로 해석을 하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았다.] 이렇게 되고 범어 원본에 준해서 해석을 해본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깨쳤다.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깨쳐서 사실은 반야바라밀다가 완성이 됐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거를 그냥 쉽게 말한다면, 수행자가 그전에는 얻으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베풀어라 하는 거를 알고 베풀었다. 보시를 널리 행했는데도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를 않았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봤더니 아직도 이것은 내 것이다. 그런데 너에게 준다. 이게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 것을 너에게 주니까. 네가 가난해서, 네가 불쌍해서, 네가 필요해서 내가 너에게 준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럼 너는 나에게 뭘 줄 것인 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지,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너도 나를 도와주던지 이렇게 무엇인가 보상심리가 있다. 이 보상심리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베풀어도 그것이 공덕은 될지언정, 복은 될지언정 해탈은 안 된다.
그래서 이 한 물건 이 베푸는 물건을 깊이 들여다 봤더니 사실은 이 물건은 내 것이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네 것이라 할 것도 없다. 이 물건 자체는 그냥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네 것이니 내 것이니 하는 거는 본래 없다. 네 것이니 내 것이니 하는 거는 텅 비어있다. 물건이 없다는 거가 아니라 물건(보시물)에 네거니 내거니 하는 어떤 실체도 없다. 그러니 사실은 준다 하는 것은 내 거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준다 하는 상이 생기지, 내 것이라는 상이 없으면 준다 하는 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는 행위가 없는 게 아니다.
내 코로 숨쉰 공기가 상대편 코로 들어간다. 그럴 때 내 숨을 너에게 준다 그런 생각 안 한다. 왜 그럴까? 이것도 분명 주고 받는데. 그것은 이 공기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필요에 의해서 쓰는 거다. 내가 필요해서 쓰는 거고 네가 필요해서 쓰는 거다. 내가 볼펜을 가지고 쓰고 있다가 네가 볼펜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 볼펜을 주는 거다. 그때 내 것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그냥 공기로 숨 쉬듯 그 사람이 필요해 하니까 그 필요에 의해서 주는 거다.
이럴 때는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 내 거라는 상이 없기 때문에 준다라는 상도 안 일어난다. 주는 행위가 안 일어난다는 게 아니다. 내 거라는 상이 없으므로 준다는 상이 없고 준다는 상이 없다는 말은 뭔가 보상심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 주는 행위에 따른 어떤 과보도 없다. 즉 내 것을 준다 하면 보상심리가 있고 그 보상심리로 인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라고 하는 미움이라고 하는 실망이라고 하는 과보가 따른다. 이 과보가 따른다면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이 괴로움의 바다를 훌쩍 넘어가버린 세계, 해탈과 열반의 세계가 아니다.
현재 한문으로 된 문장의 해석은 관자재 보살이 주인공이다. 관자재 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또는 수행하셔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셨다. 여기서 원인이 뭔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것이 원인이고 그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과보가 뭔가? 오온이 모두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셨다. 이런 결과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과보가 뭔가? 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과인데 그 응보가 뭔가? 그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 이렇게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이 경문에 있는 것을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약간 바꿔서 본다면 관자재보살님이 말씀하기를 “진실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쳐야 한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반야바라밀다가 행해질 수가 없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쳐야 보시가 보시바라밀다가 될 수 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보시가 보시바라밀다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베푼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티끌 없는 흔적 없는 그런 경지로 ‘무위의 경지’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런 데서 원본과 한문본 사이에는 약간의 해석상의 차이를 둘 수 있다. 그럼 어떤 게 더 정확한 해석인가? 이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이건 학자들의 몫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인가? 이게 우리의 주 관심사다.
현재의 경문대로 기초해서 말하면, 관자재보살님이 육바라밀을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았다. 이게 뭔가? ‘각’이다. 알았다. 이게 뭔가? ‘지’다. 확연히 보셨다. ‘관’이다. 그와 같은 의미다. 뭐가? ‘조견’이다. [비추어 보다, 내려다 보다, 여실히 알다] 환하게 비추어 보셨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확연히 아셨다. 이걸 우리가 깨달았다 그렇게 말한다. 비추어 보셨다. 뭘 비추어 보셨는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실을, 오온의 특성이 공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 皆자는 모두 皆자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그럼 여기 五蘊이 뭔가? 이 오온이라는 용어는 소승교설이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사상. 일체가 뭐냐? [오온, 일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쌓임] 일체는 곧 오온이다. 이게 오온설이다. 일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섯 가지 쌓임이다. 여기서 蘊자는 어떤 쌓임이다. 또는 다른 데서는 오음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 다섯 가지가 뭔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다. 이 색수상행식이 다 공하다는 여기서 ‘다 공하다’는 뭔가? 이 오온이 복수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은 색도 공하고, 수도 공하고, 상도 공하고, 행도 공하고, 식도 공하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오온의 실체가 없다. 오온의 특성은 텅 비었다. 오온이 일체니까 오온 대신에 일체를 대입하면 일체가 다 공하다. 일체를 제법이라고 말하니까
제법은 다 공하다. 즉 이세상에 있는 모든 만법이 그 본질은 근본은 이거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다.
여기서 소승교설의 용어를 쓰지 않는다면 일체 또는 제법으로 대치하면 된다. 제법이 공함을 깨달으셨다. 제법의 실체가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텅 빈 존재임을 깨달으셨다.
그걸 확연히 깨달으시니까 이 천하만유, 모든 것의 본성이 본질이 근본이 이것이다라는 어떤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고 텅 빈 것을 깨달으니까 어떻게 됐다?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번뇌 고뇌 이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다. 일체, 모든 괴로움과 액난이 다 사라져 버렸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건너가 버렸다.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를 오온이라고 한다. 소승교설에서는 일체를 오온이라고 할 뿐만 아니고 일체는 12처다. 라는 12처설이 있다. 일체는 18계다. 라고 하는 18계설도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하고, 12처설은 색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를 말한다. 여기서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을 때 인식의 그 대상을 우리의 감각기관을 기초로 해서 나누면 6가지가 된다.
즉 우리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은 6가지다. 눈, 귀, 코, 혀, 몸뚱이, 몸뚱이 중에 제일 감각이 예민한 곳은 손이다. 따뜻한지, 찬지, 보들보들한지, 꺼칠꺼칠한지 알아보려면 엉덩이로 비벼봐야 되나 발바닥으로 비벼봐야 되나 머리로 비벼봐야 되나? 손으로 만져봐야 된다. 손바닥이 감각이 가장 예민하다 그래서 몸이라고 하는데 몸의 가장 대표적인 접촉을 통해서 어떤 것을 알아내는 가장 대표적인 게 손이다. 그래서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은 뭐로? 손으로 감각을 알아낸다. 우리도 깜깜한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역시 손으로 더듬거린다. 발로 더듬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일 정확한 게 손이다. 손으로 더듬어서 알아차리고 간다. 이 말이다.
그 다음이 머리로 생각하는 의가 있다. 이것들을 한문으로 안이비설신의이다. 눈으로 본다고 할 때 보이는 대상은 빛깔, 모양이 있다.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그 대상은 빛깔과 모양이다. 모양이 없는데도 빛깔이 있으면 볼 수 있다. 모양이 없는 데 어떻게 빛깔이 있는가? 레이저 빔이나 이런 거는 가서 손으로 만져봐야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빛깔이 있으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칼라가 아니라도 어떤 형체가 있으면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이 형체나 빛깔에는 빛이 있어야 되는가 아닌가? 빛이 있어야 된다. 빛이 없는 캄캄한 데서는 빛깔도 모양도 볼 수가 없다. 그거를 일러서 색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12처설에서 6가지 감각기관에 대응되는 그 감각의 대상에 있어서의 색은 눈의 대상이다. 그러니까 똑 같은 색이라는 용어가 쓰여져도 그게 앞뒤의 문맥을 따져서 어떤 의미로 쓰여졌느냐에 따라서 개념이 다르다. 이것이 색이다.
귀의 대상은 소리다. 소리가 있어야 들리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귀다. 귀는 듣는 작용을 한다. 듣는 작용의 대상은 소리다. 코는 냄새, 혀는 맛이다. 몸 또는 손은 감촉이다. 접촉이 되야 한다. 접촉이 안되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뜻의 대상은 생각의 대상은 법이라고 한다. 원리. 그래서 색성향미촉법이다. 그러니까 일체라는 거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뜻으로 알음알이 하는 이것이 곧 일체다. 이 밖에 뭐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일체를 설명하는 거를 12처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과학적인데도 불구하고 이것만 갖고는 설명하는 데 조금 부족함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와 다른 사람이 똑 같은 모양을 똑 같은 눈을 가지고 봤는데 두 사람이 때로는 다르게 볼 수가 있다. 잘못 본 게 아니고 각자가 정확하게 봤는데 달리 보는 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이 이론을 가지고 이건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만약에 내가 정신을 잃어버리면 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볼 수가 없다. 그럼 이런 경우에 설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 보는 주체, 듣는 주체, 냄새 맡는 주체, 맛 보는 주체, 접촉하는 주체, 알음알이 하는 주체로서의 ‘식’이 있다. 이 식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식이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는 거다. 그래서 식의 6가지가 있다. 그래서 보는 작용을 안식, 듣는 작용을 이식, 그 다음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렇게 해서 다시 식의 6가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게 18계설이다. 전부다 뒤에 (자세히) 나온다.
소성교설에서 (소승불교에서) 일체는 이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3가지가 있다. 일체는 오온이다. 일체는 12처다. 일체는 18계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은 오온이 공하다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12처도 다 공하다, 18계도 다 공하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만법이 다 공하다. 이런 얘기다. 그래서 이 문장자체에서의 핵심은 오온이 아니고 제법이다. “제법이 모두 다 공하다”는 말이다. 존재의 특성이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제(諸)자. 모든 법 할 때의 이 법은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치, 원리,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제법이라고 할 때에는 ‘존재’ 이런 얘기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존재. 이런 의미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법이다 함은 [제법, 존재하는 객관적인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런 의미다.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 바깥 세상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런 의미도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 제법이 공하다 하는 공성을 확연히 알았다. 비추어 봤다. 꿈에서 깼다. 그러니 도일체고액이다. 모든 괴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이 문장 하나가 이 전체 경문의 핵심이 된다. 관자재보살님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함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 이 얘기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일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즉 6바라밀 수행하는 거다. 우리가 6바라밀 수행을 하게 되면 제법의 공성을 깨닫게 되고 제법의 공성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번뇌는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다.
범어 원본에 준해서 본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보시바라밀다를 행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는 게 아니고 보시를 행하다가 제법의 공상을 깨달으니까 그 보시가 완성이 돼 버린 거다. 보시의 완성이 뭔가? 보시를 행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런 얘기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거는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야 된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확연히 알아야 우리의 수행이 그것이 비록 보시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시바라밀행이 될 수 있다. 또 보시행을 해야 보시바라밀행을 해야 제법이 공한 도리를 확연히 깨칠 수가 있다.
앉아가지고 제법의 공상을 깨닫자 하고 텅 빈 거야 텅 빈 거야 이렇게 한다고 공성이 깨쳐지는가? 아니다. 그것은 번뇌 속에 휩싸여 있다. 제법이 공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니까 이거는 공의 모양을 생각으로 지었다 하니까 공상이 된다. 공이라는 모양을 생각으로 지으면 이거는 공이 아니다. 공이라고 이름 붙여진 하나의 상 또는 유아에 해당이 된다. 이러면 이제 공에 집착했다. 공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제법의 공함을 확연히 깨치면 번뇌가 사라지는데 제법이 공하다고 생각을 하면 번뇌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제법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번뇌가 사라지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일은 안 일어난다. 학자가 불교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지식으로 알 때는 자신의 인생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이게 공병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이 공이 아니라고 하면 공이야 하고 싸우게 된다. “왜 공이라고 하는데 너는 공이 아니라고 하느냐 그건 불교가 아니야”하고 다툰다.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다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공이라는 상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기에는 분별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난다. 이게 큰 차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 제법이 공하다 하는 지식, 알음알이 이거를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설, 교리는 알지만 우리의 인생에 붓다의 가피, 법에 귀의한 어떤 과보 이거는 안 일어난다.
오온이 뭔가? 간단하게 살펴보자. 일체가 오온이라고 했을 때, 왜 그들은 일체를 오온이라고 했는가?
1. 色
色受想行識의 색은 우리 몸뚱이다(몸통)라고 말할 수 있다. [色, 객관대상, 인식대상, 물질계, 현상] 그런데 몸뚱이만이 아니고 몸뚱이를 포함한 이세상의 일체 물질 현상계는 다 색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이 물질계가 색이다”를 넘어서서 우리가 그것이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코로 냄새 맡든, 혀로 맛보든, 손으로 만지든, 인식의 어떤 대상. 그러니까 나 밖의 내가 어떤 사물을 인식을 할 때 인식의 대상이 되는 거는 다 색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색은 우선 몸뚱이를 말하고 [몸과 마음] 할 때는 [몸뚱이]를 말하고, 이것은 [정신과 물질] 하면 [모든 물질 세계]를 말하고, 이것은 어떤 [우리가 인식을 하는 모든 대상]은 다 色이라고 할 수 있다. 색이 있다.
2. 識
밖에 色이 있다. 안에는 識이 있다. [識, 요별작용, 분별, 판단]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식이 있다. 컴퓨터로 말하면 색은 하드웨어고 식은 소프트웨어다. 고성능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색이고 그기에 깔려있는 프로그램이 식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있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반드시 맞는 거는 아닌데 비유해서 말하면 그렇다.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이다. 색과 식이다. 몸뚱이와 마음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3. 受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러면서 바깥에서 정보가 들어온다. 이 정보가 들어오는 작용, 컴퓨터로 말하면 정보를 입력시키는 작용, 이게 수다. [受, 감수작용,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 감수작용. 그런데 이 수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이 감수작용을 뜻하는 이런 작용만 수를 뜻하는 게 아니고 이런 감수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 몸과 마음에서 어떤 반응(응답)이 일어난다. 기계는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바깥에서 어떤 정보 들어갈 때, 소위 Feeling이 일어난다. 몸과 마음에서 어떤 떨림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감각이 일어날 때 어떤 정보가 들어오면 정보가 들어오는 것 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감각, Feeling, 반응, 응답이 일어나는 것도 受라고 말한다. 딱 사물을 봤을 때 내 거를 저 사람이 가져갔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가? 내 거를 누가 가져 가면 기분이 나쁜 게 먼저 일어날까? 우리는 보통 내 거를 가져가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데 기분 나쁜 게 먼저 일어난다. 몸과 마음에서 반응이 먼저 일어난다. 이 반응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반응까지도 수에 들어간다.
4. 想
그 다음에 想은 생각이다. 라고 말한다. [想, 지각, 표상작용, 기억, 상상] 쉽게 말하면 이렇게 들어온 정보가 쌓여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다. 이게 다 상에 들어간다. 생각한다는 다 상에 들어간다. 생각 想자를 쓴다. 들어온 정보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이 기본 프로그램(식)으로 인해서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정보들이 저장이 되어서 언제든지 되살려 낼 수가 있다. 이게 想이다.
5. 行
이렇게 표상작용이 일어나면 나한테서 감정이 일어난다. 기분이 나쁘다. 화가 난다. 욕심이 난다. 갖고 싶다. 이렇게 감정이 일어나면서 그것이 어떤 행위를 유발시키는 감정이다. 하고 싶다든지 하기 싶다든지. 이렇게 뭔가 행위가 유발되는, 안에서 바깥으로 정보가 나가려고 하는 어떤 행위를 유발하는 게 일어난다. 이게 行이다. 여기서 행위는 세 가지가 있다. [行, 의지작용, 의지, 욕구] 마음이 하고 싶다. 이것도 행에 속한다. 말로 하고 싶다. 이것도 행에 속한다. 몸이 가서 그것을 해버리는 것도 행에 속한다. 그러면 이 행이 일어나면 반드시 과보가 생긴다. 그러니까 새로운 업이 형성되는 것은 행에 의해서 형성이 된다.
2. 識
행에 의해서 새로운 것(업)이 형성되고 그 ‘형성되어-지는 것’은 다시 識으로 돌아가서 저장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한 순간에 작용을 할 때 식이 있다. 다음 순간에 작용을 할 때는 식이 또 달라져 있다. 아무튼 내가 갓 태어났을 때는 모르겠는데 (전생부터 있었다고 이렇게 말하니까 그러나 그걸 땐다면, 그 때나 내가 백지상태일까) 항상 이 식은 현존하는가 안 하는가? 현존한다. 식에 대한 설명 없이 어떤 문제를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 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
하다. 각자의 자기 (업)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늘 반응을 해서 인식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견해도, 생각도, 가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걸 다 소멸해 버리면 물론 객관이 그냥 투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존은 하는 한 그거는 어렵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사실을 확연히 알면 어떻게 되는가? 나타난 현상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 내가 옳다고 고집하지 않게 된다.
저 벽이 붉게 보이는 거는 그냥 있지만 저 벽 색깔이 붉다고 고집하지는 않게 된다. 내가 저 벽은 붉은 색깔이네 하는데 어떤 사람이 아니야 푸른 색깔이다. 이래도 갈등이 안 생긴다. 이것은 내 눈이 이렇게 보이고 저것은 저 사람 눈에 저렇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나의 업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저 벽은 붉은 색깔이야 하는데 누가 푸른 색깔이야 하면 너 잘못 봤어 너 틀렸어 이렇게 되니까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일체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수작용이 있고 표상작용이 있고 의지작용이 있고 그런데 그 안에 이미 형성되어-진 識이 주관으로 여기에 대응하고 있다. 이것이 일체다. 여기서 감수작용만 생각하면 色이 있고, 受가 있고, 想이 있고, 行이 있고, 색-수-상-행-식, 識은 별개다. 이래서 형성되어-진 결과물일 때 識이 맨 끝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受가 識이 있기 때문에 色이 감수작용을 일으키면서 好不好의 떨림이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사실은 색-상-수-행-식의 순서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색-수-상, 색-상-수. 이거는 그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거다. 이것이 딱 순서대로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다섯 가지의 쌓임이다.
이래서 이거 나눌 때, 몸뚱이다. 하면 나머지는 다 마음작용에 속한다. 우리의 어떤 정신작용에 속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 受라는 것은 거의 몸뚱이로부터 일어나는 것도 受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feeling도 受니까 이 受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중간에 양쪽 위치를 가지고 있는 거다. 그래서 크게 육신과 정신, 몸과 마음 이렇게 나누지만, 이 작용을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둘로 딱 나눌 수는 없는 거다.
자~ 여기서, 결론은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五蘊은 곧 일체다. 일체가 공하다. 일체의 특성이 텅 빈 것임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확연히 보셨다. 이게 照見, 비추어 봤다. 이 말이다. 이게 핵심이다. 그래서 이 오온은 색수상행식이기 때문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확연히 깨달으셨다 하는데, 그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照見五蘊皆空을 그 다음 단락에서 다시 설명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다음 단락에 내려가서, 색이 공하고, 수가 공하고, 상도 공하고, 행도 공하고, 식도 공하다. 이 설명을 그 다음 단락에 가서 다시 하고 있다. 그러면, 색이 공하다. 할 때, 이 설명을 다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이렇게 설명한다. 색만 그런 게 아니라 수상행식도 다 그렇다. 그래서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제법이 확연히 공하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그 공한 세계에서는 강도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는 것처럼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고, 늘어남도 없고 줄어듬도 없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다.
덧글: 영어권에서는 오온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아봤습니다.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色受想行識 The five skandhas (from WIKIPEDIA)
The sutras describe five aggregates:
1. "form" or "matter" (Skt., Pāli rūpa; Tib. gzugs): external and internal matter. Externally, rupa is the physical world. Internally, rupa includes the material body and the physical sense organs.
2. "sensation" or "feeling" (Skt., Pāli vedanā; Tib. tshor-ba): sensing an object as either pleasant or unpleasant or neutral.
3. "perception", "conception", "apperception", "cognition", or "discrimination" (Skt. samjñā, Pāli saññā, Tib. 'du-shes): registers whether an object is recognized or not (for instance, the sound of a bell or the shape of a tree).
4. "mental formations", "impulses", "volition", or "compositional factors" (Skt. samskāra, Pāli saṅkhāra, Tib. 'du-byed): all types of mental habits, thoughts, ideas, opinions, prejudices, compulsions, and decisions triggered by an object.
5. "consciousness" or "discernment" (Skt. vijñāna, Pāli viññāṇa, Tib. rnam-par-shes-pa):
1). In the Nikayas/Āgamas: cognizance, that which discerns
2). In the Abhidhamma: a series of rapidly changing interconnected discrete acts of cognizance.
3). In some Mahayana sources: the base that supports all experience.
The Buddhist literature describes the aggregates as arising in a linear or progressive fashion, from form to feeling to perception to mental formations to consciousness. In the early texts, the scheme of the five aggregates is not meant to be an exhaustive classification of the human being. Rather it describes various aspects of the way an individual manif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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