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경전

8.강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開理無語 2014. 8. 13. 19:59

8.강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지난번 강의를 정리하면 “관세음보살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시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가운데서 오온개공에 대해서 말했다. 일체가 다 공하느니라. 일체개공(一切皆空 ). 이렇게 하지 않고 왜 오온개공이라고 했는가? 왜 앞에 소승교설을 써서 이 공을 표현했는가? 이런 문제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오온은 일체기 때문에 일체가 다 공하다. 즉, 제법의 본성이 텅 빈 공성이라는 것. 

2.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라는 것 마저도 ‘그것이 어떤 진리다’라는 어떤 생각으로 모양을 지어버리면 ‘이것이 진리다’라는 어떤 진리에 절대성을 가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이런 얘기다.


이것을 우리가 ‘공상’이다. 공이라는 상을 지어버렸다. ‘법상’이다.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지어버렸다. 그건 이미 진리가 아니다. 이런 데서 “일체가 오온이다”하고 하는 하나의 교설을 하나의 진리로서 이것을 고정화 시켜버렸다. 이렇게 되면 법상이 된다. 그 법상을 깨트리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오온개공이다” “제법이 모두 공하다”라고 하지 않고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표현을 썼다. 즉 이것은 소승교설이, 그 당시의 소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는 부처님의 중도사상, 무유정법의 사상에 이미 어긋나 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조금의 논란이 있다. 선불교에서는 간화선을 최상승선이라 주장한다. 남방불교의 사마타의 한계가 선정시 입출정이 있다는 건데…… 아마도 본문의 맥락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려되나,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제법이 공함을 깨닫다”라고 하는 이 일체의 고액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해본다. 우리 인생은 괴롭다. 그러면 괴로울 때만 있는가 즐거울 때도 있는가? 즐거울 때도 있다. 그러니 인생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굳이 세분하면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그런 경우도 있다. 苦가 있고 樂도 있고 苦도 아닌 樂도 아닌 이런 상태도 있다. 이 苦樂의 사이에 오고 감을 輪廻라고 한다. 그래서 이 고락의 사이를 오고 가는 ‘윤회=고’다. 이런 얘기다. 


그래서 우리가 락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락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금만 시간이 가거나 상황이 바뀌면 곧 고가 돼버린다. 그래서 그 락의 본질도 사실은 고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고+락=고’이다. “일체는 고다. 인생은 고다.”라고 할 때, 그 苦는 苦와 樂의 苦가 아니고 苦와 樂을 다 포함해서 둘을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은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어서=알지 못해서 樂을 추구하지만 苦를 받기도 하고, 苦에 떨어졌지만 그 가운데서 또 樂을 맛보기도 하고, 그래서 苦는 싫어하고 樂은 구하는데, 그 樂이 구해지지도 않고 구해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늘 이 苦에 허덕거리게 된다. 그래서 중생세계의 일체는 다 결국은 苦로 귀착이 되게 된다. [중생계에 일체는 전부 苦로 귀착하게 된다] 그래서 일체가 다 苦다. 이런 얘기다.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행하는 그 어떤 결과도 다 苦로 나타난다. 


그러면 일체가 다 苦인 원인은 뭔가? 無智에서 출발한다. [苦의 근본은 無智, 無明에서 온다] 無智, 無明, 알지 못함.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다. 이런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니까 강도에 쫓기는 사람의 두려움 그 苦는 강도가 헤치려고 하는 데서부터 苦가 일어난 게 아니고, 없는 강도를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말이다. 이 착각하는 게 전도몽상의 몽상, 꿈속의 생각이다. 없는데 있다고 환영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자기 착각 속에서 도깨비한테 홀리는 것과 같이 환영 속에 휩쓸려 있다. 남이 나를 헤치려고 하진 않는데도 헤친다고 잘못 생각해서 두려움에 빠져있거나 이것은 남편과 자식, 부모와 형제, 이웃, 이웃나라 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업식에 투영되어서 거짓된 모습, 어떤 환영을 보고 있다. 그 환영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게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여기로부터 우리의 인생에 苦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된다. 이 환영에서 깨어나야 된다. 이 환영에서 깨어나려면 이 환영이 환영인 줄 알아야 된다. 꿈을 꿈인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꿈에 강도를 만났을 때, 1 깨어나서 그 두려움에서도 벗어나지만, 2 그 꿈속에라도 이게 꿈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버리면 안 두려워한다. 꿈인 줄 알면 눈 뜨려고 하지 도망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경험이 없는가? 같은 꿈을 되풀이 되면 도망을 가다가 아 이거 꿈이다라고 해서 눈 뜨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가? 그 때 그 눈뜨려고 노력할 때는 눈뜨기 이전에 이게 꿈이다 하는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거다. 그래서 우리가 꿈인 줄을 먼저 알아야 되는 거다. 꿈인 줄을 알아야 눈을 뜨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꿈인지 모르고 현실로 알고 있다. 이게 전도몽상이다. 그래서 꿈을 꾼인 줄 아는 거 이것이 다 제법이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환영 같고 … 금강경에 나온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일체 ‘함’이 있는 법은, ‘상’이 있는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我라는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대개 상이 있음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相)이 상 아닌 것을 알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모두 다 허망하다. 허망≠허무. 허망=텅 빈. 이것은 환영과 같은 거다. 그걸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게 꿈에 비유해서 꿈 같은 거다. 환영 같은 거다. 물거품 같은 거다. 그림자 같은 거다. 아침 이슬 같은 거다. 번개 불 같은 거다. 이렇게 6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꿈을 꿈인 줄로 봐야 꿈에서 깰 수 있다. 허망한 줄 아는 것, 그래서 꿈에서 깨는 게 곧 깨닫는 거다. 그게 곧 부처를 보는 거다. 


그래서 이 고는 우리가 깨어나지 못하면 이 괴로움에 휩싸인다. 그러면 괴로움의 종류, 깨어나기 전 상황에서 괴로움은 이 괴로움은 몇 가지가 있을까? 


일체는 고다. 한 단어로 고다. 이것을 조금 나누면 사고(四苦),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것이 고다. 인생살이가 고다. 이런 말이다. 여기서 조금 더 늘려서 표현하면 8고라고 한다. 이 생로병사는 육체적 한계에서 오는 거라면, 나머지 四苦는 정신적인 고통이다.


팔고(八苦) = 육체적인 고통(生老病死) + 정신적인 고통(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陰盛苦)


1.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이 사랑(愛)는 꼭 사람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한다는 좋아하면 뭐하고 싶은가? 갖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다. 이게 좋아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뭐~뭐를 하고 싶다. 근데 그게 다 뜻대로 되는가? 안 된다. 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저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근데 그게 안돼 그 사람은 날 안 좋아해. 나는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안 좋아하는 거야. 이런 경우가 많은가? 많다. 내가 좋아하면 저 사람도 마땅히 좋아해야 하는데 안 그렇다. 그럼 억울한 거 같지만 뒤집어 보자. 누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도 그를 좋아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안 좋아한다는데 그 사람이 나를 자꾸 좋아한다면 괴로운가? 괴롭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될 수 있다. 그리 되면 그 사람은 가버린다. 그러니까 이게 나에게 괴로움이 된다. 좋아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다. 좋아하면 갖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되니까 괴로운 거다. 좋아하는 건 문제가 없다. 좋아하는 것, 바다를 좋아한다. 이건 안 괴롭다. 바다가 내 거라는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별을 보고 좋아한다. 그건 괴롭지가 않다. 그걸 가지려고 안 하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바닷가에서 가서 그 곳이 좋아 가지고 싶지만 내가 돈이 없으면 괴로워진다. 좋아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다. 좋아하면 생기는 심리현상은 갖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고 그것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괴롭다. 이게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2. 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이런 거다. 이 말은 내가 싫어하면 멀리하고 싶다. 싫어하면 안하고 싶다. 근데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안 할 수가 없는,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집에 안 살 수가 없는, 같은 직장에서 같이 일을 안 할 수가 없는 조건에 처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 미워한다. 싫어한다. 그러면 같이 안 있으면 되고, 같이 안 하면 된다. 그러면 괴로움은 안 된다.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다 괴로움이 되는 건 아니다. 좋아하니까 갖고 싶은데 뜻대로 안되니까 괴롭고, 미워하는데 싫어하는데 (그게 다 괴로운 건 아니다) 싫어하면 우리는 멀리하고 싶고, 헤어지고 싶은데 이세상은 그게 뜻대로 안 된다.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좋아해서 만나서 차 한잔 하다가 싫은 마음이 일어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지면 된다. 결혼하면 그렇다고 헤어질 수 있는가? 없다. 부모나 자식일 때, 헤어질 수 있는가? 없다. 같은 직장에 있는데 그가 싫다고 직장을 사표 내고 나올 수가 있는가? 없다. 왜?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러니까 그기에 있게 될 때의 괴로움. 이게 원증회고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아프지만,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야 되는 괴로움, 어쩌면 이게 더 크다고 말 할 수 있다. 


3. 뭔가 내가 얻고자 하는데, 이루고자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앞의 것도 이 속에 다 포함된다고 하지만,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얻고자 하는데, 이루고자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괴로움이 求不得苦. 


4. 일체는 오온으로 이루어져있다. 오온의 쌓임이다. 실체가 없다. 다만 다섯 가지의 쌓임에 불과하다. 이 다섯 가지의 쌓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이게 五陰盛苦다. 


그래서 이 4개를 포함해서 八苦라고 한다. 이걸 좀더 확대해서 수를 더 늘이면 108번뇌다. 이 걸 좀 더 확대하면 84,000 번뇌망상이다. 이 84,000 번뇌망상이라는 거는 한 가지, 한 가지 다 헤아리면 그 고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얘기다. 


이런 모든 고뇌가 잠을 깨면, 눈을 뜨면,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달으면 그냥 사라져 버린다. 어떻게 사라지느냐 그건 악몽에 시달리던 사람이 잠에서 깼을 때, 꿈 속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이 사라진다는 용어 때문에 또 착각을 한다. 있다가 사라지는 건가 본래 없었던 건가? 본래 없었던 거다. 이 사라진다는 용어 때문에 있다가 사라졌다. 자꾸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고뇌가 사라졌다는 것은 본래 없음을, 즉 괴로워할 일이 있는데 이러, 이러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본래 괴로워할 일은 없는 거다!!! 


근데 괴로움이 없다는 건 아니다. 꿈속에서 괴로웠나 안 괴로웠나? 괴로웠다. 그 괴로움이 없다는 게 아니라 꿈속에서 괴로운 거는 강도 때문에 괴로웠다. 근데 강도는 없다. 강도가 없다면 괴로워할 일이 없는 거다. 지금 우리는 눈을 뜨면 괴로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안 괴로울 수 있는 길이 쉬운가 어려운가? 쉽다. 괴로울 일이 있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 나려면 굉장히 힘들지만 


본래 괴로워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안 괴로운 게 정상이다. 


화가 나는 게 정상이 아니고 화가 안 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이 괴로운 거라는 것은 마치 악몽을 꾸듯이 어떤 착각 속에 빠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착각 속에 빠지지 마라. 그게 


“순간순간 깨어 있어라!!!”


는 거다. 순간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눈 감지 마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는 천신만고 끝에 되는 게 아니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거다. 우리가 지금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착각에서만 깨면 바로 괴로움 없는 경지로 가는 거다.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그러니까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앙굴마라, 央掘魔羅, 범어(梵語) 앙굴리말라(Angulimāla)의 음사(音寫)로, 한역(漢譯)으로는 지만외도(指鬘外道)라고 한다. 처음은 바라문교(婆羅門敎) 스승의 시사(示唆)로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잘라 내어 머리를 장식하곤 하였는데, 1천 명째에 석가모니를 만나(일설에는 1,000명째에 어머니를 죽이려 할 때 석가모니를 만났다고 함), 그의 교화(敎化)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예전의 행위 때문에 시민들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그것을 잘 참고 견디는 참회 생활을 보냄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꿈 깨듯이 그냥 깨버렸다. 그러니까 그전에 있었던 모든 악행이 꼭 악몽과 같은 거다. 그러나 이 사람은 꿈에서 깨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꿈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거고 산모가 아기를 놓다가 앙굴리말라가 왔다고 하니까 애기 낳다가 기절을 해버린 거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가서 이거를 하소연을 했더니, “비구야, 그 여인에게 가서 [나는 이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번도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시오” 살생을 엄청나게 했다. 여기서 이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가 무슨 뜻인가? 꿈에서 깬 이래로. 그럼 그 전은 꿈속의 얘기다. 


이렇게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듯이 이렇게 우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는 그 강도로부터 도망가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강도를 잡아서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게 우리가 말하는 복을 구하는 거다. 돈이 부족해서 괴로우니 돈 좀 주세요. 출세 못해서 괴로우니 출세하게 해주세요. 건강이 안 좋아서 괴로우니 건강하게 해주세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셔서 괴로우니 우리 어머니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 살려주세요. 이렇게 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 거다. 이건 꿈속에서 강도로부터 보호받는 거다. 근데 눈을 딱 떠버리면 본래 강도는 없다. 그러면 괴로워할 일이 없고 도움을 받을 일이 없다. 도울 자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거다.


그럼 내가 아무리 이런 얘기를 해도 이게 우리 현실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이 든다. 그럼 이걸 현실적으로 한 번 적용해 보자. 제법이 공하다고 하는 이 꿈 깨는 소식이 우리 일상 작은 일들에 한 번 적용해 보자. 어디 갔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스님, 올해 이사 가려는데 언제 가면 좋은가요? 이사를 가려는데 북쪽에 대장군이 섰다는데 가도 됩니까?” “이장을 해야 되는데 올해 삼제가 들어서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런 문제까지도 진리로 접근해서 해결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다. 지나 번에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부모님 산소를 문중 산에 썼는데 그 문중의 장손이 그 문중 산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가 개발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산소를 이장을 해야 된다. 그런데 어디 가서 물어보니까 산소를 이장하면 안 된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장하지 마세요.”

“왜요?”

“안 좋다고 하니까.” 이유불문하고 안 좋다니까 이장 안 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니까 하지 마라고 한 거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시

“이장해야 되는 데요.”

“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그럼 이장하세요.” 이장 안 할 수가 있는가? 없다. 없는데 물을 필요가 뭐 있는가?

“이장하세요.” 내가 이장하라고 이장 되는가 저절로 이장해야 되는가? 저절로 이장이 되는 거다. 나한테 물을 필요가 없는 거다. 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안 해도 되면 하지 말고 할 수 밖에 없으면 하라는 거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질문의 요지는 이장은 안 할 수가 없고 이장을 하면 나쁘다고 하고, 그래서 이장도 나쁘지도 않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이 얘기 하려는 건가?”

“그렇다.”

그럼 질문을 그렇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하니까 대답이 쉬울 수 밖에… “나쁘다-하지 마라” “갈 수밖에 없다-가라”

그러면 이장은 해야 되고 이장하면 재앙이 따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래서 내가“반야심경을 7독하고 이장을 하라”고 했다.

“아니 스님 그렇게 하면 됩니까?”

“네” 내가 만약에 돈을 많이 받고 이런 비방을 가르쳐줬으면 다시 안 물었을 거다. 그런데 내가 무료로 가르쳐주니까 믿기지 않는가 보다. ㅎㅎ 너무 쉬워가지고.

“그럼 7독하면 왜 되는데요?”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이 공사상이다. 우리가 잠 속에서 눈감고 흐리멍텅한 상태에서는 실체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잠에서 깨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 허깨비고 환상이고 실제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색이 공한 도리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가면 재수가 있다 없다 이게 뭔가? 꿈속의 생각이란 말이다. 꿈에서 깨버리면 재수가 있고 없고 동이고 서고 다 없는 세계란 말이다. 그곳은 불생불멸의 세계요. 불구부정의 세계요. 부증불감의 세계란 말이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보고 있는 텅 빈 세계다. 그 텅 빈 세계에서 옮겨버린다(이장)는 말이다. 그럼 텅 빈 세계에서는 오고 감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옮겼으되 옮긴 게 아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재앙이 붙을래야 붙을 수가 없다. 또 텅 빈 세계는 재앙이 있고 재앙이 없음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불구부정이니까. 텅 빈 세계에서 옮기면 거기는 재앙이 붙을 수가 없다. 재앙이라는 게 본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반야심경 7독하고 옮기면 된다. 우리는 법에 대한 믿음과 귀의가 없기 때문에, 지금 반야심경을 입으로 독송하고 있어도 그 법의 실상, 그 공상에 우리가 노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생활에 바로 적용이 된다는 말이다. 또 그분의 질문이

“화장을 해야 됩니까 매장을 해야 됩니까?”

“땅이 있으면 매장을 하시고 땅이 없으면 화장을 하세요.”

“이장을 하면 안 된다던 데요.”

“지금 내가 (?; 잘 안들림; 녹음상태가 안 좋음)를 얘기 했지 않습니까?”

“그 자기가 살던데 있다가 딴 데로 가면 문제가 있다면서요?”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50~60년 살고 있다고 오늘 죽었다고 보자. 그래서 3일만에 장례를 치른다. 이 밝은 세상에 있다가 땅속에 묻어놓는다. 깜깜한 세상에 있었다. 그런데 묘 쓴지가 30년이 됐다고 한다. 그러면 밝은 세상에 있다가 깜깜한 세상에 묻어도 항의하는 경우가 없다. 그런가 안 그런가? 그렇다. 그러면 30년이나 깜깜한데 있다가 깜깜한 데로 잠시 옮겼다. 그런데 이거는 왜 항의를 합니까? 항의를 한다면 처음에 묻을 때 항의를 해야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맞는가? 네. 아니 스님이 말하니까 맞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거다. 그러니 이렇게 육신이 다 있는 상태에서 이 밝은 대낮에 살다가 죽어서 그것도 3일만에 깜깜한데 묻었다 이 말이야. 그래서 살이고 뭐고 다 썩어서 뼈만 남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다가 그걸 옆으로 옮겼다 그걸 가지고 왜 항의를 하겠냐는 말이다.


“땅이 없는데요.” 이러면 땅이 없으면 매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 그러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다. 화장을 해야 된다. 화장을 해도 괜찮은가? 괜찮다. 왜 괜찮은가? 이 죽은 지 3일밖에 안 된 사람도 화장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땅속에 30년 있어서 뼈밖에 안 남았는데 그 사람을 화장한다고 특별히 항의를 하겠는가? 종교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러니 화장을 해도 되고 매장을 해도 된다. 형편 따라 해라는 거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자세히 설명을 할 때, 우리가 듣고 동의를 한다. 이게 뭔가? 깨어있는 상태이다. 깨어있는 상태에는 이게 환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 열로 밖으로 나가면 우리 생각 속에 빠진다. 이 말이다. 그 업식에 사로잡힌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러니까 두려움이 생긴다는 말이다. 흔들어 깨워놓으면 강도가 없는 데 또 눈을 감고 자면 또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활에 적용이 되는 거다.


여기에 금이 이렇게 동그랗게 그어져 있다. 이 가운데 개미가 한 마리 있다. 이 개미가 금을 통과하지 않고 이 금 밖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다. 개미는 하루 종일, 한달 내내, 일년365일 돌고, 돌고, 돌고, 돌아도 이 금 밖으로 못 나간다. 그런데 개미가 나에게 부탁을 하면 이 금을 지나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잡아서 위로 들어서 밖으로 내 놓으면 된다. 왜 이게 가능한가? 개미는 2차원 평면에 살고 있고 나는 3차원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원을 높여서 (2차원에는 높이가 없다) x-y-z의 z축으로 이동해서 옮겨 놓는다는 말이다. 3차원 공간에서 바닥, 위, 양 측면이 다 막힌 공간에 있는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려면 벽에 구멍을 뚫지 않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여기에 갇히면 365일 10년을 애써도 나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4차원에서는 금방 내 보낼 수가 있다. 시간 축을 통해서 이동해버리면 된다. 그러면 벽을 통해서 나가는 건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가?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이와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2차원 세계에 갇혀서 살고 있다. 자기 생각이라고 하는 그기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런데 딱 눈을 뜨면 한 차원 다른 세계로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재앙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거 다 쓸데없는 소리다가 이런 얘기가 아니다. 그런걸 부정하고 이런 게 아니라 이것은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랬더니 이 분이 아주 좋아하면서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더 물어보세요.” 그때 방문을 열고 중학생쯤 되는 사내애가 하나 나왔다.

“스님, 제가 우리 아들인데요. 우리 아들 어떻게 잘 되겠어요?” 하고 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님을 늘 그렇게 관상 보는 사람으로 이렇게 생각을 한다. ㅎㅎ 어디를 가나… 그래 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하고 내가 “남편은 어디 갔어요?” 그러니까 대답을 안 해. 또 물어보니까 “없어요.”

“아 네, 돌아가셨어요?”

“아니요.”

그래서 더 이상 안 묻고 “아들 잘 안되겠는데” 이랬다.

“아니 왜요?”

“응 아들 별로 안 좋다.”

그러니까 딱 의자를 갖다 붙여가 “아니 스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아들을 위해서 당신이 헌신할 생각이 있습니까?”

“네,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데 아들한테 좋다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해야지요.”

“요번에는 조금 힘이 든다.”

“힘이 들어도 하겠어요.”

“그러면 오늘부터 하루에 108씩 하면서 참회를 해라.”

“아~네, 어디에 참회를 합니까?”

“남편한테 참회를 하세요.”

“네?” 이러더니 “그 인간한테는 참회를 못해요.”

“왜 못해요?” 그러니까

“아니 그 인간이 나한테 참회를 해도 내가 받아줄까 말까 하는데 내가 왜 그 인간한테 참회를 해요?”

“그럼 하지 마세요. 그럼 자식은 안돼.” 그랬어.

“왜 그래요?”


아이 입장에서는 이분은 내 아빠고 이분은 내 엄마다. 엄마 아빠가 다투고 원수가 되면 아이는 엄마 말 들으면 아빠가 나쁜 인간이고 아빠 말 들으면 엄마가 나쁜 인간인데, 이세상에서 남이 우리 아빠 나쁜 사람이다 할 때는 그 사람 말 안 들으면 되는데, 엄마가 말하는 데 안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 엄마가 거짓말을 하면, 엄마가 자식한테 거짓말을 하면 엄마가 나쁜 사람이다. 엄마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짜로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이다. 그러면 자기 아빠가 나쁜 인간이다. 나쁜 인간의 자손이 자긍심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굉장한 열등의식을 갖고 살아야 된다. 아빠는 훌륭하고 엄마는 나빠. 이러면 아이는 자긍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누구 말도 믿을 수가 없고 어느 거를 믿어도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 정신분열이 일어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아이는 어쩌면 공부는 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행복해질 수는 없다. 앞으로 결혼을 해도 가정생활이 원만해지기가 힘들다. 직장생활을 해도 직장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정말 아이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장사해서 돈 좀 벌어서 애한테 과외 시키고 좋은 옷 사주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한테 참회기도 하시오. 

“여보. 제가 어리석어서 내 생각만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고 옳으니 맞니 그르니 틀리니 해서 미워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 법 만나서 알고 보니, 이게 다 내 생각이네요. 내가 지은 것일 뿐입니다. (꿈속에 내가 강도를 미워한 것과 같다. 이 말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속에 남편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사라져야 그 다음에 내가 아들에게 내가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아들이 오히려 아빠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면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의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다.” 

“근데 왜 엄마는 헤어졌어?” 

“엄마가 성질이 나빠서 그런 거야. 너도 나하고 살아봤잖아. 엄마가 성질이 안 좋잖아.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이런 여자를 좋아하겠니? 너의 아빠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해 줘야 이 아이는 자기 아빠의 훌륭한 것을 가지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또 엄마에 대해서는 어떤가? ‘아~우리 엄마는 성격은 좀 모났을지 몰라도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아빠에 대해서 저렇게 애정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느껴서 아이가 부모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가 있다.


이것도 다 空이다. 남편이 나쁘다. 이건 色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그것의 좋고 나쁨은 내 마음이 짓는 거다. 제법이 공하다. 일체개공(一切皆空 ). 이렇게 우리가 사물의 공성을 꿰뚫어 보면, 부부간의 갈등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바로 아이를 잘 키울 수가 있다. 그러면 다시 재결합해야 되는가? 스님은 재결합하라는 소리는 한적이 없다. 살고 안 살고는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같이 살아도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헤어져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미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심 과제’


이지 살고 안 살고가 중심 과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기도 하세요. 그래야 앞으로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성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해서 나타나는 많은 재앙을 이게 미연에 방지하는 거다.” 이게 우리가 불법을 믿는 태도고 이 불법을 믿음으로 해서 얻는 가피(加被)다. 이 얘기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고통을 소멸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고통도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따름으로 해서 우리가 얻는 무한한 축복이고 가피다. 이 힘은 참으로 묘하기 때문에 가피지묘력(加被之妙力)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은혜를 입어야 된다. 그런 가피를 받아야 된다. 그럴 때 내가 불자이니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내가 불법 만난 게 너무너무 기쁘다. 이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부처님 형상만 봐도 소리만 들어도 “감사합니다”하고 귀의(歸依)하는 마음,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덧글-1: 일체개공(一切皆空),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모두 다 텅 비었다'. 그래서 '그것을 다만 그것으로 볼 뿐'으로 가야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업식에 투영되어서 거짓된 모습, 어떤 환영을 보고 있고 그 환영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착각에서 깨어나기 위해 대승불교의 수행법, 6바라밀을 행하면 마침내 본질을 꿰뚫어 아는 지혜가 생기고, 본래 괴로워할 일이 없는 줄을 알아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간다. 그러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이승에서 잠시 빌려쓴다는 몸통(무상, 무아, 무소유)을 통해 인연을 따라 나투는 대자대비한 보살행을 할 수가 있는 거다.


숭산스님은 선의 원(Zen circle)을 통해 참선을 하면 일정한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소개하셨습니다. 소아(0)-업아(90)-무아(180)-묘아(270)-대아(360)


법륜스님은 다음장에 공사상에 대한 실전 tip을 주십니다. 


덧글-2: 이렇게 우리가 법에 대한 정견을 갖추어 가는 것을 의리선(義理禪)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직 지혜가 아니라 지식에 머무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업아


마침내 찾던 것을 찾았습니다. 이게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합니다.

무색무공(無色無空)

오직 모를 뿐=생각 이전=할!, 방!, 손가락 하나!

개구즉착(開口卽錯)은 말하자 말자 곧 틀리다. 다시 말해 말을 한즉슨 그 참모습과는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무아


무아와 대아의 사이에 진공묘유(眞空妙有, 완벽한 자유의 영역)의 영역, 묘아(자유로운 나)의 경지가 있습니다. 소승불교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영역에서의 표현은 아래와 같이 정말 묘합니다.

'바위 옆 돌 호랑이가 애기를 안고 잔다.'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다.'

'코끼리 등에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 간다.'


우주는 텅 비었다. 할!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올바른 '기능'에 대한 통찰로 가야 됩니다. 이게 조사선(祖師禪)입니다. 형이상학적 스타일에서는 여여(如如)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좀더 완벽하게 말하면 즉여(卽如)진리라고 합니다.

색즉시색(色卽是色) 공즉시공(空卽是空)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여여(如如)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흐른다. 즉여(卽如)

다만 인연을 따라 나툴 뿐.

대아


제 공부가 깊지 않아 다만 참고로만 하시기 바랍니다.


덧글-3: 생자필멸.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생겨난 것은 머무르다 흐터져서 사라집니다. 이게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겨난 원인을 밖으로부터 찾습니다. 누가 화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화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고찰은 이전에 제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4/29, 4/30)을 참고 바랍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화는 어디로부터 생겨났나요? (12연기의 차원에서 보면) 바로 내 마음이 그렇게 감수작용(수, 쾌불쾌)이 일어났고 그에 따른 의지작용(애, 호불호)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무지무명(그냥 잘못알았다) 또는 업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외경(外境)을 식별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밝힌 불교의 교설의 차원에서 보면) 또한, 모든 분별의식(크다/작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는 나의 무의식(아뢰야식, 업식)으로부터 시작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 또는 학문적 차원에서 보면)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사람의 성품에 따른 분류를 로멘티스트, 휴머니스트, 아이디얼리스트, 에이젼트로 분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혈액형으로 분류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모두 다른 색안경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대승불교의 승려로서 법륜스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달을 보며 내가 슬퍼할 때, 달이 나에게 슬픔을 주었나요?

내가 산을 좋아하고 강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했지만, 그 산과 강과 바다가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내가 시비를 일으킨 적이 있나요?


이렇게 (다각적인 불교의 관점에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돌이켜서 나로부터 일어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게 회광반조(廻光返照)입니다.


간화선의 관점에서는 예컨대,

길을 가다가 누가 불렀을 때, 알아차리고 돌아봤다. 그때 알아차리는 놈은 뭔가?

누가 물었을 때, 대답을 하려고 머뭇거린다. 이때 머뭇거리는 놈은 뭔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누가 부르면 알아차리고 일어난다. 이때 알아차리는 놈은 뭔가?

명상할 때 다리가 저린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가?


위의 질문에 구분이 된다면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고 북쪽의 별은 본다." 또는 "내가 나의 눈을 본다." 할 때 이게 수용이 되는가?


와 같은식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 보는 것이 화두참선, 참구법입니다. 그럴 때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이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이 역시 다만 참고로만 하시기 바랍니다.


덧글-3: 가장 최근의 Podcast '제789회 부모님 묘지 때문에 자식들의 갈등이 심합니다.'에도 이와 비슷한 법문이 있으니 참고하시길~~